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청일전쟁 직전 일제는 풍신수길 묘와 유적지 정비 해이등박문과 풍신수길 뜻하는 풍국신사가 주도하여 단장풍국회까지 만들어 추진 임진왜란 왜장 후손이 핵심인물임진왜란 조선인 코 무덤을 찬양하는 내용 새긴 비문세워 여덟번째 이야기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300년제(1898년)와 이총(耳塚)에 숨겨진 비밀앞에서 말한 토요쿠니(豊國) 신사 외에 명치(明治) 신정부가 출범한 이후 오사카와 교토에서 거행되었던 일련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현양(顯揚)사업을 시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글: 공관(북동중아시아연대 중앙위 의장 ) 왜구 포로 조선인 염사근, 명.일의 국토분할점령 비밀 책동 막아고니시유기나가와 심유경, ‘조선을 남북으로 분할하여 점령’밀약염사근이 이를 명나라 황가에 전달-> 복건성 유방예->명 조정19세기말 청일전쟁, 러일전쟁 거치며 또 남북분할 점령안 대두미제에 의한 8.15 남북분단확정, 75년 비극의 분단역사 진행 중 국가의 생존법. 정보공작의 힘 (2)한 사람의 중요한 정보가 몇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임진왜란기 하인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염사근이 명·일의 ‘한반도분할점령’ 비밀책동을 애국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임진왜란을 주도한 세력은 죠수번으로 현재 야마구치현덕천 막부에 패하고 절치부심 명치유신으로 부활 조선재침략이들의 후예가 현재 일본 자민당 세력, 아베신조가 선봉장 네번째 이야기메이지유신의 2개 번(藩): 조슈 번ㆍ사쓰마 번일본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철저하게 짓밟고 약탈했다. 그러한 임진왜란의 주도세력으로 살아남은 자들이 250년 만에 막부(幕府)를 뒤엎고 메이지유신을 일으켰으며, 바로 조슈 번주(藩主,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사쓰마 번주 '시마
글: 은영지(사드철거투쟁시민) 리조선 5백년 이래 상전 외국군대 호위무사, 자국 경찰4월 26일은 박근혜가 불법으로 사드 배치를 시작한 날진밭교 아래 계곡물은 미제압제 치하 흐르는 피 울음소리 "어디 가십니까?"이른 아침 불법 사드 기지에서 평화 행동을 하고 걸어 내려오는 나를 진밭교 어귀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이 턱 막아선다."어디긴 어디예요, 주민이 불법기지에서 평화 행동하고 내려오는 거 안 보여요?""아! 예~"하며 그제서야 길을 터준다.소성리 여기저기를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점령한 경찰 주제에 무슨 권리로 선량한
李조선 왕조,능력을 무시한 후계자 결정, 피를 부르다유교 성리학 이념과 명분론에 사로잡혀,장자세습, 적통 고집하다, 비극 왕조사 거듭 자초하다세상에 나온 지 8년 만에 비명에 간 영창대군,가부장 장자세습, 혈통 고집의 희생양이었다 날씨가 추웠다. 아침이라서 더욱 그랬다. 서기2019.03.10. 아직 겨울 날씨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경기 안성 죽산면 매산리 산106, 영창대군 묘역이다. 그래도 대군에 맞는 대우를 해주었는지 일반 산소와는 달랐다. 묘에 둘레돌이 있었고 주변 석물들이 달랐다. 비석도 달랐다. 특히 상석과 묘 사이에 비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탄생한 노론, 망국과 매국 소굴이 되다병자호란 당시 지배세력의 난맥상, 오늘날도 다르지 않게 되풀이 되다스스로 주인이기를 포기한 사대주의, 기득권 지배세력은 호의호식,그들을 떠받치는 민생은 죽지 못해 사는 처지로 전락하다글: 이 병 권(시민기고가) 이 영화는 김훈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병자호란이 발발한 1636년 12월 14일 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47일 동안 남한산성에 대피한 인조 정부 내의 치열한 노선투쟁과 처절했던 당시 모습과 무능한 정부의 부끄러운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전주에서 기생을 두고 삼각관계를 벌인 이성계의 조상 이안사...힘에 밀려 동해안 삼척에서 다시 함북 영흥으로 쫓겨가다... 전주이씨인 이성계가 그 먼 옛날(1335년생) 어떻게 함북 영흥이 고향이 되었나? 지금 세상으로 생각하면 남북분단이 안 되었다면 삼천리금수강산이 하루 생활권이니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 남쪽 끝의 전주가 교향인 전주이씨가 반도의 최북단인 함경북도를 고향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꿈과 같은 얘기다. 물론 전주이씨 벼슬아치가 조정에 죄를 짓거나 권력자에게 밉보여 함경도 땅으로 귀양을
영세중립국 선언으로 살 수 있었음에도 국제정세를 잘 못 판단,적에게 생존비법을 갖다 바치다... (서기19세기말) 열강이 조선을 무대로 침략의 손길을 뻗치고 정부는 돌파구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 때 중립화론이 대두 되었다. 가장 가치 있던 중립화론은 서기1885년 조선에 와 있던 독일 부영사 버들러가 내놓은 영세국외 중립국론이다. 당시 독일은 조선과 국교를 맺은 지도 얼마 안 되고 기타의 이해관계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아시아 정책은 영국과 경쟁하면서 러시아의 남하정책도 꺼리고 있었다. 또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친권적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사대노예근성이 뼈속까지 스며들어 그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사회...소중화 조선... 3) 기자조선, 중공의 동북공정의 원조앞서 살펴 본대로 기자조선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속의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일부사서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통치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기자조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이 기자조선을 역사로 확실하게 못 박아 놓고 있다. 그 의도는 명백하다. 우리의 상고시절부터 한국을 식민통치해 왔다는 것이고 이제 다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의 음모에 우
기자조선 인정하면,조선(단군)의 역사 1천년이 사라지고, 47분의 단군들도 절반이 없어진다. (6) 기자가 책봉받아 간 곳은 동북방 단군조선이 아니다.설사 기자가 중국 주나라 무왕의 책봉을 받거나 아니면 스스로 조선이라는 곳으로 갔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동방의 단군조선이 아니다. 사기 38권 송미자세가의 기자자箕子者에 대한 ‘사기색은’의 ‘주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두예가 말한다, 양국의 몽현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杜預云 梁國夢縣有箕子塚).”이 양국 몽현이라는 곳은 현재 중국 북경 남부의 하남성 상구시 중심부 서쪽을 말한
조선(단군)을 이어 중국인 기자의 조선이 1천년 지속되었다고 하나, 소중화 조선이 날조한 무덤과 유물 몇개와 문헌만 존재한다.소중화 조선이 날조한 기자조선 1천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중국 한나라 식민지 한사군에 앞서, 1천년간 중국인의 지배를 받은 것이 된다. 실제로 중국은 소중화 조선의 이 사관을 받아 들여 현재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기자조선을 그려놓고 있다. 동북공정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5) 삼국유사 ‘고조선’편으로 보는 기자조선 부존재 증명고조선편을 보면 '위서魏書' 를 인용하여 그 위서를 쓰던 당시에서
기사수정: 서기2016.7.8. 17:41 중국인 기자가 가지고 와서 우리를 문명개화 시켰다는 '8조범금',그러나 우리는 이미 조선(단군)이 있기 수천 년전인 '신시'시대에1년 365일을 일일이 규정하는 고도로 분화된 규범을 갖고 있었다.지금으로 부터 약 5213년 전의 일이다. (2) '8조범금’를 통해서 보는 기자조선 부존재 가능성한서지리지에는 기자가 8조범금이라는 것을 가지고 와서 교화시켰다고 한다. 이 기자의 8조범금이라는 것은 대체적으로 형벌법규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신시배달국
기사수정: 서기2016.7.6. 13:23 '기자조선'이 실존했다면 왜 그 보다 1천년전에 존재한 조선(단군)의 흔적보다턱없이 부족한가, 이 땅의 산천 산하 구석 구석엔 단군의 흔적만이 존재한다... 2)기자조선 긍정설‘기자조선’ 이라는 관념은 앞서 밝혔듯이 이조선 시대를 거치며 생성, 고착화 되었다. 그것도 5백년동안 주입, 세뇌되어 왔기 때문에 그 뿌리는 깊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기자조선의 실재를 당연히 여기며 ‘왜 국사책에 빼버렸느냐’고 따지며 다시 집어넣어야 한다고 외치는 세력이 상당하다. 그럼 ‘기자조선’을
소중화 조선 정권은 를 사대주의 관점에서 편찬하여,마치 고려가 북한 평양(서경)에 기자묘를 설치했던 것처럼 기술하였다. 3. ‘기자조선’, 인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지금까지 실체가 없는 만들어진 기자조선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 하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기자조선 논쟁을 다루기로 한다.1)기자와 은왕조에 대한 정의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기자와 기자의 조상나라인 ‘상商’나라로 알려진 은왕조에 대한 정체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향후 이것을 가지고 기자조선이 우리 민족이 세운 우리의 역
고기잡이 배로 가장한 중국의 해적떼가 버젓이 강화도 앞바다, 한강하구까지 들어와서 고기식량을 약탈해가도 눈만 껌벅거리고 쳐다보는 나라, 필리핀에서 수많은 우리생민들이 피살되어도 제대로 목소리 못 내는 나라, 독도가 어느 나라땅인지 전공이 아니라서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을 대표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대학의 교수노릇해도 아무렇지도 않은나라,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침략을 막으라고 세운 국가기관의 연구원이 독도는 한국땅이 아니라고 하는 나라, 오늘날 대한민국의 이 어처구니 없는 모순의 근본원인은 어디에서 오는가,우리의 근본이 뽑혀
일제로 하여금 우리 역사의 새벽을 말살하게 하고, 광복된지 70년이 넘어가고 있는 이 때까지도 이를 이어 받은 강단주류사학이 식민사학을 굳게 믿고 고개를 뻗뻗히 들고 버티고 있는 근거를 누가 제공했는가? 본지에서는 그 근본 원인을 제공한 소중화 조선의 만행을 고발하는 동시에 해결책을 모색하는 '기획특집2 기자조선과 동북공정'을 연재하고 있다. 지난 글에 이어 이번에도 우리의 세계관,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소중화 조선의 역사왜곡 날조를 조명한다. -명조선의 기자조선 만들기(4)-(4) 이조선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명조선의 기자조선 만들기(3)- (2)이조선의 삼국사기 왜곡조작삼국사기를 보면 이러한 문장을 거의 빼다 박은 내용이 나온다. 다음과 같다.“논하여 말하면, 현토 락랑은 본래 조선의 땅인데 기자가 책봉을 받은 곳이다. 기자는 그 백성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고 옷감을 짜고 물건을 만드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금8조를 가르쳤다(論曰玄菟樂浪本朝鮮之地箕子所封箕子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設禁八條-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위 글이 고려조 인종(재위: 1122년 ~ 1146년) 때의 학자 김부식이 기록한 것으로 삼국사
-명조선의 '기자조선' 만들기(2)-소중화 조선의 우리역사 지우기, 우리역사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4) 이조선의 한국사 말살과 부모 없는 나라 만들기이와 같이 이조선 정권은 중국인 기자의 나라와 공자유교를 통치지배이념으로 삼아 나라의 기초를 탄탄하게 닦는다. 그리고 고려제국의 혼과 역사를 기억하고 지키려는 고려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한다. 대략 10만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이성계의 이씨조선 정권에 학살되었다고 한다. 특히 고려왕족에 대한 천인공로할 학살극은 이조실록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 명조선의 '기자조선' 만들기(1)-1.총설우리의 오늘 됨은 지난날이 쌓인 결과다. 개인은 그 개인의 과거가 쌓여서 오늘의 그가 있는 것이며, 나라와 민족은 그 나라의 역사가 쌓여서 오늘의 그 나라와 민족이 있는 것이다.그런데 역사가 개인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쉽게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역사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크다. 이조선 정권이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먹었기 때문에 일제강점시대가 왔으며 뒤 이어 6.25. 한국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국이 한국 전쟁 후 복구사업에 절대적
에 담긴 계략과 음모“태종조(太宗朝)에 하륜(河崙)이 제사(諸祠)의 목상(木像)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여 삼성(三聖)의 목상도 또한 예(例)에 따라 파하였다 하며, 의물(儀物)의 설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1472년 2월 황해도관찰사 이예(李芮, 1419-1480)가 성종에게 상주(上奏)했다. 구월산(九月山) 삼성당(三聖堂)의 한인(桓因) 한웅(桓雄) 단군(檀君) 세 분 천왕(天王)의 목상과 위패가 있었는데 이를 부숴 없애버렸다는 사적(事跡)기록을 올린 것이다.여말선초에는 ‘삼성당 아래 근처에는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