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화 조선에 의해서 우리는 부모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명조선의 '기자조선' 만들기(2)-

소중화 조선의 우리역사 지우기,

우리역사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4) 이조선의 한국사 말살과 부모 없는 나라 만들기

이와 같이 이조선 정권은 중국인 기자의 나라와 공자유교를 통치지배이념으로 삼아 나라의 기초를 탄탄하게 닦는다. 그리고 고려제국의 혼과 역사를 기억하고 지키려는 고려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한다. 대략 10만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이성계의 이씨조선 정권에 학살되었다고 한다. 특히 고려왕족에 대한 천인공로할 학살극은 이조실록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남효온의 추강집의 추강냉화에는 소중화 이성계조선 정권이 고려왕족을 유인해서 수장시키고 참살한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1)이조선의 한국태고문헌사료 수거령

또한 고려제국까지 이어온 제국의 자주역사를 철저히 지우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서 당시 까지 전해오던 모든 제국의 역사를 없애 버렸다. 이조선정권이 얼마나 많은 우리의 자주제국의 역사문헌을 없앴는지 다음과 같은 이조실록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서운관(書雲觀)에 간직하고 있는 참서(讖書) 두 상자를 불살랐다. 풍속이 전조의 습관을 인습하여 음양 구기(陰陽拘忌)를 혹신하여 부모가 죽어도 여러 해를 장사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임금(태종 이방원)이 박은(朴訔)·조말생(趙末生)에게 명하여 서운관에 앉아서 음양서(陰陽書)를 모조리 찾아내어 요망하고 허탄하여 정상에서 어그러진 것을 골라 불태웠다(丙申/焚書雲觀所藏讖書二篋 俗因前朝之習, 酷信陰陽拘忌, 親死累年不葬者有之 上命朴訔、趙末生坐書雲觀, 盡索陰陽書, 擇其妖誕不經者焚之-太宗 34卷, 17年(1417 丁酉 / 명 영락(永樂) 15年) 12月 15日(丙申) 1번째기사).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 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세조7권, 3년(1457. 정축/명 천순(天順) 1년) 5월 26일(무자).

-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예종7권, 1년(1469. 기축/명성화(成化) 5년) 9월 18일(무술).”

-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智異聖母)》·《하소량훈(河少良訓)》, 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성종1권, 즉위년(1469. 기축/명성화(成化) 5년) 12월 9일(무오).” 하였다.

위에 이방원(이조 태종)이가 불태웠다는 2상자 포함 서적들을 보면 고려시대풍습과 공자유교를 국시로 하는 이조선의 지배이념이 상극임을 알 수 있다. 공자유교 매장제도에 맞지 않는다고 관련 서적을 모조리 불태운 것이다. 고려조정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음양서인데 이조선 정권이 불태워 지금은 알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풍습이 새겨져 있는 서적으로 보인다. 특히 이 '서운관'이라는 관청은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기후, 기상을 살펴 농사, 어업 기타 수많은 국가정책을 입안한다. 천문,지리학地理學,역수(曆數:책력),측후(測候),각루(刻漏) 등의 사무를 맡아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조선 초기에는 고려조에서 쓰던 서운관(書雲觀)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두지만 세종대로 들어와서는 관상감(觀象監)으로 바꾼다. 서운관에 있던 음양서를 두 상자나 붙태웠다는 부분에서 수많은 천문서적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대륙에서 관찰한 대륙고려의 천문서적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조선의 천문학은 중국 명나라 천자만 하늘을 볼 수 있다고 하였고 노예제후국인 이조선은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래서 천문학분야에서는 이조선은 암흑기였다.

그리고 위 세조, 예종 때에 수거되어 지금은 사라진 책들의 이름 중에는 우리의 간절한 단군조선의 역사를 알려주는 듯한 ‘고조선비기’도 보인다. 또한 우리의 한인, 한웅, 단군을 암시하는 ‘삼성밀기, 삼성기’도 보인다. 이 책들은 현재 이름만 전하는 삼국유사 ‘고조선’편의 ‘한인 한웅 단군’에 대하여 구체적인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 이조실록을 보면 이조선의 통치이념과 세계관에 맞지 않는 한국태고사문헌사료를 내놓지 않고 개인적으로 숨기다가 발각되면 ‘참형斬刑’에 처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목을 잘라 죽이겠다는 소리다. 사극에서 보면 이른바 ‘망나니’가 피 묻은 시퍼런 칼을 들고 죄인의 목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책을 안 내놓고 버티다 발각되면 이렇게 죽이겠다는 것이다.

위에 적혀있는 책들은 지난 군사독재정권 때의 용어로 말하면 '불온서적, 금지서적'들이다. 자기 정권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 서적들은 이렇게 낙인찍어 수거하여 모조리 없애 버린 것이다. 더우기 명나라 사대노예세계관과 공자유교를 국가이념으로 하여 중국의 역사는 황제국의 역사로 바꾸고 우리는 역사가 시작한때부터 중국의 식민통치를 받아온 번국, 제후국으로써 조공이나 바쳐온 역사로 바꿔치기 했다.

그런데 위 서적들은 그 반대로 우리가 본래 제국이고 중국은 우리에게 조공을 바쳐오며 우리의 지도와 감독 하에 제대로 문명화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이조선 정권이 그냥 놔둘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조선 정권은 이와 같이 우리의 뿌리 태고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자료를 수거하여 없애버린 다음, 고려시대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 사료와 문집을 중국 사대노예 세계관에 맞게 ‘개간改刊’해 다시 펴낸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및 기타 고려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사료나 문집의 저자는 고려시대 사람으로 새겨져 있으나 무늬, 껍데기만 그렇고 내용은 모두 이조선 정권이 새로 쓴 것이다. 마치 고려시대 사람이 그렇게 쓴 것처럼 사기극을 벌인 것이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나,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그리고 제왕운기의 저자로 알려진 이승휴 등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면 원통하고 분하여 다시 살아나 이조의 만행을 규탄할 것으로 본다. 이조선 정권은 이와 같이 한국 혼을 말살하기 위하여 저자의 이름까지 도적질하여 사기극을 서슴지 않은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대표적 사례인데 다음과 같다. 이조선 정권이 중국이 파견한 조선 총독, 기자箕子에 머리를 두고 조상으로 모셨고 기자가 중국의 선진문물을 가지고 와서 미개야만의 우리를 개화시켜 문명인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은 앞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서 살펴보았다. 기자가 우리를 문명개화시켰다는 도구는 ‘8조범금’과 ‘홍범구주’라는 것이다. 이것은 공자유교의 ‘인의예지仁義禮智’사상과 거의 일치하는데 ‘인仁’으로 교화시켰다는 것이다(3부에서 이어짐).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