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의 기자는 누구인가?

소중화 조선 정권은 <고려사>를 사대주의 관점에서 편찬하여,

마치 고려가 북한 평양(서경)에 기자묘를 설치했던 것처럼 기술하였다.

 

3. ‘기자조선’, 인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지금까지 실체가 없는 만들어진 기자조선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 하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기자조선 논쟁을 다루기로 한다.

1)기자와 은왕조에 대한 정의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기자와 기자의 조상나라인 ‘상商’나라로 알려진 은왕조에 대한 정체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향후 이것을 가지고 기자조선이 우리 민족이 세운 우리의 역사이니, 기자조선을 긍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소중화 조선은 북한 평양에 기자의 가묘를 설치해서 마치 기자조선이 한땅(한반도) 북부 평안남도에 실재한 것 처럼 역사를 날조했다. 사진은 왜구난동기때 찍은 것으로 보인다. 소중화 조선정권이 세운 기자무덤에 수백년이 흐른 세월의 녹이 묻어 있다. 이후 일제는 소중화 조선의 이러한 역사날조만행을 이어 받아 더욱 강고한 일제식민반도사관을 만들어 우리에게 주입시킨다.

(1)기자와 은나라

‘기자箕子’ 는 먼저 기자라는 말에서도 풍기듯이 중국인 공자, 맹자, 장자, 노자 등의 중국식 이름이며 중국인은 자기네 조상으로 이미 확정시키고 있다. 그리고 은나라도 역시 마찬가지로 ‘하, 은,주, 진, 한’ 식으로 관습적으로 말하듯이 이미 중국의 역사로 기정사실화 되어 사용되고 있다. 은나라의 풍습과 문화 그리고 고고학적 유물 등이 우리와 많이 닮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방계족속이 만든 단군조선의 제후국의 역사라고 할 수는 있어도 이것을 이유로 우리민족이 만든 나라라거나 우리의 역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은나라는 이미 중국화한 중국의 역사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만약에 은나라가 우리민족이 만든 나라라거나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한다면 똑 같은 논리로 우리에게서 은나라 이전에 가지 쳐 나간 황제헌원의 역사도 우리 것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수나라, 당나라도 그 이전의 5호16국시대를 거치면서 한 대륙(중국대륙)에 나타났는데 이는 중국, 화하족과는 거리가 먼 북방초원의 선비족류의 자손들이 세운 나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선비족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단군의 조선에 가 닿는다. 그렇다면 이 나라들도 우리의 역사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황제헌원에서 출발한 역사는 현재의 중화족(중국)의 역사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또한 수나라, 당나라도 중국의 역사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더구나 서기전 1백 십수년에 중국 한나라의 사마천이 썼다는 ‘사기’에도 ‘은본기殷本記’라는 별도의 장을 할애하여 은나라를 중국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 주나라의 역사인 ‘주본기周本記’와 함께 나란히 실려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사마천의 시대에도 은나라는 중국의 역사이지 우리의 역사가 아님을 알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로 실려 있는 ‘조선열전’이 저 것들 과는 별도로 편성되어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은나라와 은나라의 사람으로 알려진 ‘기자, 더 정확히 말하면 ‘서여敍餘’는 우리의 역사라고 할 수 없다.

(2) 기자의 이른바 ‘홍범구주’와 ‘8조범금’

기자가 ‘홍범구주’와 ‘범금8조’를 가지고 조선으로 와서 조선 생민들을 미개야만에서 문명개화 시켰다고 한다. 기자조선 존재설은 은나라의 사상과 철학, 신화, 문화 등이 우리 것과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은나라에서 낳고 자란 성인인 기자가 와서 가르쳤다는 홍범구주, 8조범금도 우리의 뿌리 사상, 철학,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기자가 설했다는 ‘홍범구주’ 라는 것과 ‘범금8조’를 보면 모두 중국의 사상철학인 공자유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홍범구주의 내용을 보면,

오행사상(火水木金土)이 나오고, 대동사상이 나오며 붕당과 음행을 말하고 있으며 천자는 백성의 부모이고 천하의 왕이라고 한다. 이는 수직적 지배복종의 세계관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삼국유사 고조선편의 ‘개국신화’에 나오는 수평적 평등사상인 ‘홍익인간, 제세이화’ 라는 우리의 뿌리사상과 어울리지 않고 특히 우리의 원 뿌리인 마고삼신을 이야기하는 ‘부도지’의 사행사상 즉 ‘기화수토氣火水土’라는 우리의 토속철학사상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명백히 중화주의 세계관을 내세우는 중국의 사상과 철학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8조범금八條犯禁’을 조선에 시행했다는 내용이다. 이 8조범금이라는 것은 ‘한서/지리지/연지燕地’에 나오는데 그 내용을 보면 역시 공자유교철학사상을 말하고 있다. ’인현지화仁賢之化‘라고 하여 어진 성현(기자)이 조선 백성을 교화 시켰다고 하며 그 결과 ’동이東夷‘의 천성이 부드럽고 순종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공자가 이것을 부러워하여 이 지역에 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자가 우리 고유의 정신세계가 아닌 중국의 공자유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기자의 '8조범금'이라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이미 '기자'가 오기전에 실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8조범금'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것은 '기자'가 생기기 전에 단군의 조선시대에 우리가 이미 실시했고 나중에 은나라에서 배워가서 중국화되어 중국인의 문화로 실행되고 있었다는 것으로 볼 것이다. 서기전 1285년, 22세 색불루 단군시절에 우리는 이미 '금8조 禁八條'를 시행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번한세가 하'편에 나온다. 그 내용도 기자가 가지고 왔다는 '8조범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기자가 가지고 온 것은 공자유교의 중화사상이 진하게 배어 있는 것이고 우리의 '금8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것은 기자 8조범금의 '인현지화仁賢之化'가 아닌, '인양지화仁讓之化' 라고 하였다.

한편 삼국유사 ‘고조선’기에는 단군이 우리의 원 조상이고 단군의 조선이 중심으로 나온다. 기자에 관련된 것은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만 나온다. 그리고 기자가 봉 받자 이것 때문에 단군이 장당경으로 이사했다고 한다(壇君乃移於藏唐京). 이것은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중국 주나라라는 외국세력의 세력 확장으로 할 수 없이 수도를 장당경으로 옮겼음을 말한다. 한마디로 외세 때문에 밀려 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장당경으로 할 수 없이 밀려난 단군은 나중에 아사달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이것은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였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즉 외세를 몰아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조상님이 우리의 원뿌리 조상을 단군으로 보았지 기자를 우리역사의 한축으로 절대 보지 않았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기자와 그가 태어나고 자랐다는 은왕조는 우리에게 연고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중국화한, 중국에 뿌리를 둔 존재들이다. 더구나 기자가 가지고 와서 펼쳤다는 ‘홍범구주’를 보면 명백히 중국 것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기자도 중국인이요 은나라도 중국의 역사로 정의한다(7부에서 계속).

글: 오종홍(삼태극http://cafe.daum.net/mookto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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