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의 머리를 잘라 버린 주범은 누구인가?

일제로 하여금 우리 역사의 새벽을 말살하게 하고, 광복된지 70년이 넘어가고 있는 이 때까지도 이를 이어 받은 강단주류사학이 식민사학을 굳게 믿고 고개를 뻗뻗히 들고 버티고 있는 근거를 누가 제공했는가? 본지에서는 그 근본 원인을 제공한 소중화 조선의 만행을 고발하는 동시에 해결책을 모색하는 '기획특집2 기자조선과 동북공정'을 연재하고 있다. 지난 글에 이어 이번에도 우리의 세계관,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소중화 조선의 역사왜곡 날조를 조명한다.

 

-명조선의 기자조선 만들기(4)-

(4) 이조선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사대노예 역사책 편찬

이조선 정권은 이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조작날조해서 펴내는데 그것이 이른바 ‘고려사, 고려사절요’등이다. 고려사의 경우 처음 이조선 정권의 기틀을 잡은 정도전이 ‘고려국사’로 펴낸 것을 이 후에 중국천자의 나라에 불경스러운 기록이 많다는 이유로 세종시기에 김종서, 정인지등을 시켜 최종적으로 중국사대노예세계관(공자유교의 주자학적 관점)에 맞게 찍어낸다. 그리고 고려시대 고려역사를 기록한 사서를 모두 없애버린다. 고려시대 고려조정에서 쓴 것으로 알려진 『고려실록』,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 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 고려 말기 사관(史官)들이 써놓은 사초(史草)등이 오늘날 하나도 전해내려 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조선 정권 스스로 ‘고려사절요’에 ‘사신왈史臣曰’ 이라는 사론史論을 57개나 집어넣으면서 고려왕조를 비판하는 처지, 무신정권을 비판하는 문신 중심적 처지, 유교윤리와 사대외교를 옹호하는 처지를 취하는 것으로 나와 명백히 중국사대주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고려시대 역사를 편찬한 것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같은 내용이라도 전략적 상황에 따라 중국에 사례를 하면 제후국이 황제국에게 조공을 한 것으로 기록한다든가, 당시 중국 송나라가 고려에 더 많이 사신을 파견하여 문물을 배워갔는데도 이것은 축소해서 기록하고 고려가 송나라에 파견한 사신 즉 ‘상국’이라고 표현하며 마치 주인의 나라에 황제를 알현하러 간 것처럼 기록하는 것 등이다.

또한 고려가 제국으로서 연호를 쓴 것을 다 빼버리고 전략적 상황에 따라 송나라의 연호를 사소한 것에 쓴 것을 가지고 마치 고려가 중국의 속국으로서 중국 송나라의 연호를 쓴 것처럼 확대하여 기록하는 것 등이다. 앞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논왈 論曰’이라는 기록도 이런 맥락에서 이조가 고려인종 때의 사람, 김부식의 이름을 빌어 집어넣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이성계와 정도전을 주축으로 하는 중국사대노예, 공자유교세력은 공자유교의 나라를 꿈꾸다가 위화도회군반란을 기화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주인, 상전, 부모나라로 하는 이조선을 개국한다. 이것은 중국에서 단군조선을 미개야만에서 문명개화시킬 목적으로 파견한 조선 총독, 기자에 머리를 두고 단군에서 기자로 성을 갈아치우는 기자의 조선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당시 명나라의 초대 왕, 원장이와 이성계 세력은 이른바 ‘기자조선’을 기정사실화 시키며 대대적으로 기자조선 찬양과 실체화 작업에 들어간다. 문헌적 근거 확보를 위해 고려사를 새로 쓰면서 중점적으로 왜곡 날조한다.

▲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이 들 사료는 소중화 조선의 개국 국시에 맞게 새롭게 편찬되었다. 고려사 만 하더라도  명나라 사대주의(중화패권주의, 동북공정) 사관에 맞게 여러차례 개작한 바 있다.

‘고려사’ 기사에 고려태조 왕건의 직계 조상이 당나라에서 온 태자와 고려여자 사이에서 난 사람이라고 하여 일단 고려도 중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으로 기록하고, 후당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해서 ‘고려왕 왕건아, (너는) 기자箕子가 이룩한 변방국가의 자취를 잇는구나’라고 기록하고(고려태조왕건 재위16년), 거란족의 동경유수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을 빌어 ‘우리 고려는 기자의 나라를 상속했다’고 하고(고려사 문종 9년 7월), 고려조 신하, 형부상서 ‘정문’의 이름을 빌어 ‘평양에 기자사당을 지으면 어떻겠느냐’의 상서문을 집어넣고(고려사 열전8), 송나라 사신의 답변 형식을 빌어 ‘기자 봉토 운운’ 문구를 집어넣고(고려세가 문종3년), 금나라 황제의 조서형식을 빌어 ‘기자의 옛터 운운’을 집어넣는다(고려사세가 신종2년).

이러한 문헌사료 조작날조 생성과 더불어 실제로 기자조선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평양에 기자묘와 사당을 짓고 재정을 지원하여 이조선 5백년 내내 기리도록 한다. 그 최초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를 일으킨 임금이니 평양부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해야한다(이조태조실록, 태조1년 예조전서 조박등의 상소문).” 이를 이어 몇 년 후에는 다음과 같은 이성계의 명령이 떨어진다. “기자는 조선에 봉토를 받아 실제로 풍화의 기초를 닦았으니 마땅히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전답을 두어 사철 제사를 지내라(이조태조실록, 태조5년, 이성계가 지시한 말).”

이조선 정권은 이 기자조선을 더욱 뿌리내리게 하기위해 각종 역사서를 창작해 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이조태조 초기의 ‘기자조선과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라는 기준이 세웠다는 마한의 위치를 부각시킨 권근의 ‘동국사략’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조선의 중국 사대노예세계관이 굳혀져 감에 따라 제도와 문화로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이에 따라 이이 이율곡과 같은 사람은 ‘기자실기’까지 쓴다. 그리고 이조선 후대로 내려오면서 수많은 중국명나라 사대주의 새끼 중국인들을 양산하였고 권력을 가진 학자들, 관리들도 이러한 풍토 속에서 낳고 자라 추호도 의심 없이 기자조선을 실재 역사화 하는 문헌사료들을 무수히 남긴다.

그 대표적인 문헌은 이조 성종이 개입하고 명나라 사대주의를 바탕에 깔아 놓은, 기자조선-마한-신라를 강조한 서거정 등이 쓴 관찬사서 ‘동국통감’, 기자조선을 맨 앞에 기술하고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라는 기준이 도주하여 정착한 마한을 정통으로 삼고 삼국은 정통성이 없다고 하며, 단군조선은 무시해 버린 안정복의 ‘동사강목’, 단군조선은 빼버리고 기자조선을 우리역사의 시작으로 기술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등 이다. 그리고 기자조선을 역사적 사실로 만들어 기자를 부모로 섬기는데 첨병을 역할을 한 이조선 왕들이 기자조선의 신봉, 찬양자들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만든 기자조선은 그럼 몇 년간을 존속했다는 것일까, 이조선 숙종 때의 고위관리 우의정 허목이라는 자의 발언을 보면 확실하게 드러난다.

“단군(檀君)은 순후(淳厚)하게 다스리고, 기자(箕子)는 팔조(八條)로 가르쳐 각각 1천 년씩을 가고, 위만(衛滿)은 병력(兵力)의 위엄과 재물(財物)을 가지고 수천리의 땅을 개척했으나 갑자기 얻었다가 갑자기 망했습니다(숙종 6권, 3년(1677 정사 / 청 강희(康熙) 16년) 1월 12일(기축).”

이렇게 이조선 정권은 새롭게 맞아들인 양부모, ‘기자’를 위해 국력을 다 쏟아 부었다. 반면에 자기를 낳아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길러주신 생부모, 단군의 사당은 방치하거나 단군사당과 신위를 다른 곳으로 옮겨 버린다. 이에 몇몇 제정신이 박힌 신하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상소하면 마지못해 지방관리로 하여금 관리를 하라고 하는 정도였다.

한마디로 이조선 정권은 사리사욕과 부와 권력을 위해 중국 명나라에 나라와 제국의 역사를 팔아먹었고 더구나 이제까지 자신을 있게 한 조상이요, 부모인 단군을 버리고 중국인 기자를 조상이요, 부모로 모시는 폐륜망동을 저지르고 전 백성에게 5백년동안 강요를 해 왔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이조 5백년동안 부모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를 이어 받은 일제의 단군신화 날조와 미제산 기독교회 목사교 등 이 땅을 지배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우리는 곰의 자식이라는 말이니 단군은 거짓이요, 신화다. 그러니 단군상은 우상이니 때려 부셔야 한다.’며 지금도 우리는 부모 없는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조선 정권은 이렇게 ‘단군씨’에서 ‘기자씨’로 성을 갈아 버리는 천인공로 할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저주받을 폐륜을 참다못해 단군조상님이 저주를 내렸는지, 황해도 문화현에 있는 단군사당을 함부로 가짜 기자묘와 기자사당이 있는 평양으로 옮겨 정체불명의 기자 옆에 놓자, 그 지역에 대대적인 괴질이 돌았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갔다. 잠시 그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5부에서 이어짐).

글: 오종홍(국사광복단 http://cafe.daum.net/mookto)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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