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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2: 기자조선과 동북공정(5)조선아, 조선아, 단군조선아...자손들이 너를 버렸구나...
오종홍 | 승인 2016.07.04 11:48

고기잡이 배로 가장한 중국의 해적떼가 버젓이 강화도 앞바다, 한강하구까지 들어와서 고기식량을 약탈해가도 눈만 껌벅거리고 쳐다보는 나라, 필리핀에서 수많은 우리생민들이 피살되어도 제대로 목소리 못 내는 나라, 독도가 어느 나라땅인지 전공이 아니라서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을 대표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대학의 교수노릇해도 아무렇지도 않은나라,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침략을 막으라고 세운 국가기관의 연구원이 독도는 한국땅이 아니라고 하는 나라,

오늘날 대한민국의 이 어처구니 없는 모순의 근본원인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의 근본이 뽑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명조선의 기자조선 만들기(5)

5) 이조선 정권의 단군 삼성사 때려 부수기

“경창부윤(慶昌府尹) 이선제(李先齊)가 상서하였다.

신이 들으니 황해도 인민의 병이 갑자기 여항(閭巷)에서 발생하여 사방에 전염해서 북으로 평안도에 이르고 남으로 기현(畿縣)에 이르러, 사망이 서로 이어 민호(民戶)를 싹 쓸었다 합니다. 어찌 까닭이 없이 그러하겠습니까? 신이 무오년·기미년 간에 집현전에 입직(入直)하는데 봉산군(鳳山郡)에 사는 서리(書吏) 오성우(吳成祐)가 직소(直所)에 따라 들어왔습니다. 신이 황해도 인민의 발병한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 날에 문화현(文化縣) 단군(檀君)의 사당을 평양에 옮긴 뒤에, 괴이한 기운이 뭉치어 마치 귀신 모양 같은 것이 있어 밤에 다니며 검은 기운이 진(陣)을 이루고 행동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바라보고 놀라고 괴이하여 숨어 피하고, 이것으로 전파하여 고하였습니다.’ 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병의 발생이 실로 단군의 사당을 옮긴 까닭이다.

여기(癘氣)가 먼저 구월산의 산간 민호에서 일어나 점점 문화·장연·재령·신천 등지에 번지어 전염되어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니, 민생이 불쌍하다.’ 하였습니다...중략...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세종의 생각을 따르시어 대신에게 고루 물어서 천제가 아들을 단수(檀樹)에 내린 근원과, 신주를 옮겼기 때문에 괴이한 것을 일으키는 연유를 연구하여 의논하고 문화·장연·신천·재령의 늙은 사람과 원평·교하의 전염병 증세를 널리 물어 권도에 따라 의논을 정하여 다시 성당(聖堂)의 신주를 세워 전시병(傳尸病)의 뿌리를 끊으면 온 나라가 심히 다행하겠습니다(단종이조실록-단종 즉위년 임신(1452, 경태3)6월 28일(기축).”

“(황해도 구월산) 삼성당(三聖堂)에 환인 천왕(桓因天王)은 남향(南向)하고, 환웅 천왕(桓雄天王)은 서향(西向)하고, 단군 천왕(檀君天王)은 동향(東向)하여 다 위패가 있습니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는 모두 목상(木像)이 있었는데, 태종조(太宗朝-이조태종 이방원)에 하륜(河崙)이 제사(諸祠)의 목상(木像)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여 삼성(三聖)의 목상도 또한 예(例)에 따라 때려 없애버렸다고 하며, 의물(儀物)의 설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三聖堂 桓因天王南向, 檀雄天王西向, 檀君天王東向, 幷板位。 俗傳古皆木像, 我太宗朝河崙建議, 革諸祠木像, 三聖木像亦例罷, 儀物設置與否未可知).” (이조성종실록-성종3년 2월 6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도 구월산에 위치한 삼성사. 이곳에는 삼성전이 주전으로 되어 있고 '한인, 한웅, 단군'의 삼성의 천진이 모셔져 있다. 좌측하단의 사진 왼쪽부터 '한인, 한웅, 단군'의 천진이고 우측하단의 전각이 삼성전이다. 국내 강단매국사학계에서는 북한 김조선 정권의 단군릉 복원과 위와 같은 삼성조를 모신 것 등이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삼성조의 역사를 부정해 버린다. 김조선 정권의 정치적 의도가 포함 되어 있을 수 있으나, 이조선실록에 까지 엄연히 실려 있는 삼성의 역사까지 싸잡아 부정하고 있다. 이를 인정하면 자신들의 식민사관이 설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조선 정권은 우리의 뿌리조상인 ‘한인, 한웅, 단군’ 사당에 나무로 조각된 이 세분의 상을 없애 버리고 공자유교식으로 위패로 바꾸었다가, 한인 한웅 단군의 신위 중 단군신위만 분리하여 가져다가 평양에 설치한 중국의 기자사당에 합사하였다는 것이다. 세분이 함께 모셔져야 함에도 단군만 떼어 밖에서 들어온 객귀인 기자사당에 기자의 신하로 합사하고 삼성사는 헐어 없어지도록 내 팽겨 쳐놓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괴질이 수년간 계속되었고 황해도 평안도 심지어는 경기도 이조궁궐지역까지 괴질이 번져오자 겁을 먹고 다시 복원했다는 이야기다. 그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괴질이 사라졌다는 내용이다. 정조 때에 와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예를 갖추어 대하는 기사가 나온다. 그러나 이때도 기자사당에 지내는 제사보다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단군은 중국인 ‘기자’보다 서열이 아래였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자箕子‘ 광풍이 불었는지 이조선 후반기의 대유학자로 알려진 송시열의 정신세계를 보면 실체를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얼마나 새끼중국화한 나라였는지 청나라 태조 금누루하치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송시열의 말 :

“오로지 우리 동방은 기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고 … 기자께서 동쪽으로 오셔서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이조숙종실록, 7권, 8권)

청나라 태조 금누르하치의 말 :

<극심한 ‘중화 사대주의’에 대해 만주족 국가인 청의 태조 아이신조뤄 누루하치는 “중국과 조선, 이 두 나라는 말이나 글은 다르지만 그 옷이나 생활방식은 완전히 똑같다('滿文老''太祖' 卷13, 14)”고 개탄했다>(김운회의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③ 기자조선의 진실, 중앙선데이,2011.1.30.).

이것은 완전히 요즘 속된 말로 말하면 ‘~빠, ~빨’ 수준 이상임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고려시대까지도 저들의 말에 따르면 이미 기자가 2천년이 훨씬 넘은 이전에 이 땅에 들어와 문명교화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금수 같은 오랑캐의 때를 다 벗지 못하고 있다가 이조선 들어서 완전히 뼈속까지 중국인 ‘기자’로 도배하자 비로소 사람구실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조선이 원 부모인 단군을 버리고 얼마나 지독하게 이조5백년 강제점령기간 내내 중국인 기자를 뿌리조상으로 섬긴 기자의 나라였는지, 이조선 말기 외국인이 쓴 ‘은자의 나라’라는 책을 보면 여실이 드러난다.

서기1801.11.25. 중국의 황제에게 보낸 글에는 인사말과 뒤에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청나라)폐하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은나라의 유민들이 동방으로 이주(서기전1122.)한 이래로 이 소국(이조선)은 예법에 적힌바 모든 것들, 이를테면 정의와 충성을 틀림없이 이행하고 자신의 임무에 모두가 성실하기로 항상 남다른 바가 있었습니다."

또 서기1802.1.25. 기독교(천주교)에 대한 왕의 포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 ‘기자’에 그 머리를 두고 있는 이 왕조(이조선)는 개국 4백년 이래 2천여리의 전강토(疆土)에서 태평성세를 누려 왔다."

(빌리월이 그리피스 지음<은자의나라 한국> 53쪽, 1882. 초판)

위 글을 풀어보면 천주교(예수교) 객귀가 이조선 땅에 들어와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며 ‘예수천국, 불신지옥’ 외치고 다니자 이조선 정권이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우리는 기자의 문명개화된 문화로 이미 고도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을 구가하고 있으니 예수 객귀의 가르침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결코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단군의 가르침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중국 객귀 ‘기자’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주나라가 파견한 조선총독, 기자를 부모로 삼고 중국사대노예의 공자유교를 국시로 하여 개국한 이조선 정권의 정체를 보다 직접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조선을 열고, 기초를 다지고, 전성기를 이룩한 이성계, 이방원, 세종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는 기록이다.

-이조태조 이성계의 정신세계

"우리 국가가 삼국(三國)을 통일한 이후로 큰 나라 섬기기를 근실히 하여, 현릉(玄陵=공민왕)께서 홍무(洪武) 2년에 명(明)나라에 복종하여 섬겨 그 올린 표문(表文)에, ‘자손만세(子孫萬世)에 이르기까지 영구히 신하가 되겠습니다.’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 뜻을 계승하여 세공(歲貢)의 물품을 한결같이 조지(詔旨)에 의거했으므로, 이에 (명나라)황제가 특별히 고명(誥命)을 내려 현릉(玄陵)의 시호(諡號=공민왕)를 내려 주고 전하의 작(爵)을 책봉하였으니, 이것은 종사(宗社)의 복(福)이요 전하의 성덕(盛德)입니다(이조태조실록-위화도회군반란을 정당화 하는 이성계의 상소문 중에서)."

-이조태종 이방원의 정신세계

“조정의 내사 황엄, 전가화, 해수, 한첩목아와 상보사 상보기원 등이 오니, 산붕(山棚)을 만들고 나례(儺禮)와 백희(百戲)를 베풀고,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모화루(慕華樓)에서 영접하였다. 사신(使臣)이 경복궁(景福宮)에 이르러 칙서(勅書)를 선포하였다. 칙서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 이(태종 이방원)에게 칙(勅)하노라. 취(取)해 보낸 말 3천 필은 이미 계속해 도착하였다. 지금 왕에게 화은(花銀) 40개(箇), 매개(每箇)의 중량(重量)이 25냥(兩) 합계 1천 냥과 저사(紵絲) 50필(匹), 소선라(素線羅) 50필(匹), 숙견(熟絹) 1백 필(匹)을 내려 준다.” 하였다.

임금(태종 이방원)이 칙서(勅書)에 절하고 나서, 서계(西階)로 올라가 (명나라)사신 앞에 나아가서 꿇어앉았다.

황엄이 성지(聖旨)를 선유(宣諭)하기를,

“네가 조선국(朝鮮國)에 가서 국왕(國王)에게 말하여, 잘 생긴 여자(女子)가 있으면 몇 명을 간택(揀擇)해 데리고 오라.” 하였다. 임금(태종 이방원)이 고두(叩頭- 머리를 땅에 박았다는 듯)하고 말하였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이조태종실록 15권, 8년)

태종 이방원의 위 기사에서 모화루慕華樓 라는 말이 나온다. 중화(중국)를 사모하는 누각이라는 소리다. 이조선 말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서대문 지역에는 영은문迎恩門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은 주춧돌만 있는데 이 말뜻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다음은 성군이라는 세종의 기사다.

-이조선 세종의 對중국 정신세계

“예조에서 계하기를,

“지난 7월 18일에 (명나라)황제께서 승하하셨사오니, 이번 9월 초하루 소복(素服)과 흑각대(黑角帶)와 오사모(烏紗帽)로 거애(擧哀)하시고, 초4일에 성복(成服)하시고, 초7일에 복을 벗으시는 것입니다... 임금이 지신사 곽존중 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 태조 황제 의 유조(遺詔)에, ‘천하 신민은 상복을 입은 지 사흘 만에 벗으라.’ 하신 것은 그것이 주현(州縣)의 이민(吏民)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요, 조정에서는 반드시 그와 같지 아니하리라...군신(君臣)의 의리가 지극히 무거운 것인지라, 대행 황제의 상복을 나는 차마 사흘 만에 벗지 못하겠고, 또 고례(古禮)에 외정(外庭)에서는 역월(易月)의 제도를 행하였지만, 궁중에서는 삼년상을 실행하였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은 3일 만에 벗지만, 나는 3일 후에 권도(權道)로 흰옷을 입고 정사를 보다가 27일에 이르러 길복(吉服)을 입을 것이니, 근신(近臣)도 역시 마땅히 27일에 벗게 하되...끝내 27일의 제도를 실행하였다(이조세종실록, 25권, 6년).”

위 기사는 세종이 상복입는 제도가 원래 3일 만에 벗는 것이 맞다고 하는데도 명나라 황제와의 군신관계가 지극히 중요하니 더 오래 섬기기 위해서 27일간이나 상복을 입어 명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겠다고 고집부리는 내용이다. 이조선 규범에 7일만에 상복을 벗으라고 되어 있는데, 이 규범을 어기면서 까지 명나라 왕에게 충성맹세를 하겠다는 것이다. 명나라 왕은 왕이고 자기는 신하라고 분명히 스스로 말하고 있다. 위 기사는 사실성으로 정평이 나서 세계문화유산으로 까지 등재된 이조선실록 중 세종실록이다. 사실이라는 것이다.

6) 소결론

이와 같이 이조선 정권은 자신들의 공자유교의 나라 ‘이조선’을 위해서 나라와 조상을 중국에게 팔아먹었고 위대한 조상님들의 제국의 역사를 말살해 버렸으며, 중국에서 파견한 조선 총독, 기자를 혈통적으로 조상부모로 하여 성姓을 갈고 자기를 낳아주고, 먹여주고, 길러주고, 입혀준 생부모, 단군은 내쫓아 버렸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이조선 정권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명나라를 성姓으로 쓸 때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로 ‘유명조선有明朝鮮’ 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성은 ‘명’이요 이름은 ‘조선’ 이라는 뜻이다. 성이 ‘단군’이요 이름이 ‘조선’이라는 말이 아니다. 명나라라는 성을 가지고 있는 조선이라는 말이다. 그냥 ‘조선’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인 명나라에게 폐륜을 저지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명나라 뒤에 따르며 명나라가 시키는 것만 가능하지 적극적, 능동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뭘 한다는 것은 곧 명나라에 반역하는 것이다. 이는 곧 사대노예근성으로 살겠다는 것과 같다.

이조선은 더 나아가서 자국의 이름을 스스로 부르지도 못하였다. ‘동국, 동방, 해동, 동사’ 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에 대하여 감히 자기 나라 이름조차도 부르는 것을 불경스러워 했다. 감히 고개를 들어 쳐다 볼 수 없는 중국 명나라의 변방 동쪽에 있는 보잘 것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이런 자기굴종, 비하적 정신세계는 오늘날에 까지 그 잔재가 남아 있는데 우리의 어머니들은 직접 당신의 이름을 내세워 표현하지 못하고 ‘아무개 엄마, 아무개 댁’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조선 정권은 사상적으로는 공자유교의 나라를 세워, 부모 없는 민족, 뿌리 뽑힌 나라를 만들어 사대노예굴종의 역사를 5백년동안 이끌었다(6부에서 이어짐).

글: 오종홍(삼태극 http://cafe.daum.net/mookto) 대표

오종홍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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