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모두 소중화 조선이 왜곡 날조해서 내놓은것...

-명조선의 기자조선 만들기(3)-

 

(2)이조선의 삼국사기 왜곡조작

삼국사기를 보면 이러한 문장을 거의 빼다 박은 내용이 나온다. 다음과 같다.

“논하여 말하면, 현토 락랑은 본래 조선의 땅인데 기자가 책봉을 받은 곳이다. 기자는 그 백성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고 옷감을 짜고 물건을 만드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금8조를 가르쳤다(論曰玄菟樂浪本朝鮮之地箕子所封箕子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設禁八條-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위 글이 고려조 인종(재위: 1122년 ~ 1146년) 때의 학자 김부식이 기록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나온다. 위에서 ‘예의禮義’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공자유교의 대표적인 핵심 가르침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한 대목이다. 위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글은 중국의 ‘한서지리지연지漢書地理地燕地’ 편의 글과 똑같다. ‘한서 지리지 연지’편의 저 글 다음에는 ‘인현지화仁賢之化’ 라는 말이 나오는데 유교의 핵심으로 단군조선 생민들을 교화시켰다는 말이다.

▲ 왼쪽부터 개국 초기의 이성계와 정도전. 이성계는 무력을, 정도전은 이론을 제공하여 제국 고려를 멸망시키고 소중화 조선을 개국한다. 문제는 우리의 고유 정신사상으로 개국을 하지 않고 불교에 반발하여 외래 공자유교를 개국이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소중화 조선이 사라진 지금은 어떤 정신사상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을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정신사상은 여전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편의 위 글에 이어서 나오는 기록은 완전히 이조선 정권의 사대노예 세계관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말이 나온다. 글이 너무 길어 굵게 표시한 글만 읽어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파견 책봉해 준 기자의 가르침의 결과) 이리하여 이곳 (단군조선의)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대문을 닫지 않고, 부녀들이 정조와 신의를 지켜 음란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그릇을 사용하였다. 이는 어질고 현명한 사람(기자)의 교화가 미친 탓이었다. 또한 그들은 서·남·북방의 오랑캐들과는 달리 천성이 유순하였다. 이리하여 공자는 자기의 도가 중국에서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고,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고자 하였으니, 이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역의 괘가 효이(爻二)를 다예(多譽), 효사(爻四)를 다구(多懼)라 한 것은 군위(君位)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로 중국의 동북방의 한 쪽에 끼어 있었다. 북쪽 인근 지역들은 모두 천자가 관리를 보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란한 시기에는 영웅들이 나타나 참람되게도 황제의 이름과 지위를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실로 다구(多懼)의 지역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겸양하려는 생각없이, 천자의 영역을 침노하여 원수를 맺었으며, 천자의 군현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전쟁이 계속되고 화근이 맺어졌으므로 평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수·당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때 고구려는 오히려 불손하게도 중국의 조서와 명령을 거역했으며, 천자의 사신을 토방에 가두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이 고집스럽고 겁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죄를 묻는 정벌의 군사를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어떤 시기에는 기묘한 계책으로 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하였다. 고구려 전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과 신하가 화평하고 백성들이 서로 화목했을 때는, 비록 대국이라 할지라도 고구려를 빼앗지 못하였지만, 나라에 정의가 사라지고, 군주가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의 원성이 일어난 뒤에는, 나라가 붕괴되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는 "전쟁의 승리에 있어서, 시기의 이로움과 지형의 이로움이 인심의 화목함만 못하다."라고 말했으며, 좌씨는 "국가는 복으로 흥하고 화로 망한다. 나라가 흥하려면, 군주가 자기 몸에 난 상처를 보듯이 백성을 보살펴야 하나니, 이것이 복이다.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을 흙먼지 같이 여기나니 이것이 화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是以其民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 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 於海以居之, 有以也夫. 然而『易』之 "爻, 二多譽, 四多懼, 近也." <高句麗>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 其北隣, 皆天者有司, 亂世則英雄特起,  竊名位者也, 可謂居多懼之地, 而無謙巽之意, 侵其封 以讐之, 入其郡縣以居之. 是故兵連禍結, 略無寧歲. 及其東遷, 値<隋>·<唐>之一統, 而猶拒詔命以不順, 囚王人於土室. 其頑然不畏如此, 故屢致問罪之師. 雖或有時設奇以陷大軍, 而終於王降, 國滅而後止. 然觀始末, 當其上下和, 衆庶睦, 雖大國, 不能以取之, 及其不義於國, 不仁於民, 以興衆怨, 則崩潰而不自振. 故<孟子>曰: "天時·地利, 不如人和." 『左』氏曰: "國之興也, 以福; 其亡也, 以禍. 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其禍也."

이와 같은 글은 중국인 기자를 조상으로 삼고, 공자유교를 국교로하여 중국을 주인, 상전으로 모시는 것을 국시로 삼은 이조선 정권의 개국목적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어떤 사람은 김부식이 고려시대 당시 공자유교의 사대모화 유학자라서 저렇게 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려는 고구려의 뜻을 받들어 잃어버린 고토를 수복하는 북진정책을 내걸고 개국한 나라다. 그래서 고구려의 후예라는 뜻으로 ‘고려’로 나라이름을 정했다. 또한 당시 고려는 엄연히 황제국을 지칭(제왕운기 상권 ‘고려국 황제 운운’, 하권 ‘황실’)하고 있었고 연호를 쓰고 있었으며 더구나 팔관회 등을 개최하면서 황제국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고 팔관회에서도 나오듯이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하였다는 뜻으로 개성에서 하는 팔관회 외에 평양에서 해마다 음력으로 11월 14일 경에 팔관회를 개최하여 고구려의 제천행사인 ‘동맹’을 이어 고구려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다(고려사69권/지23/예11/가례잡의/중동팔관회의, 송사/외국열전/고려).

이런 황제국 고려에서 위와 같은 중국사대주의노예사관으로 물든 삼국사기가 편찬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 또한 삼국사기는 고려인종의 지시로 쓰게 된 것이라고 나온다. 삼국사기를 다 쓰고 고려인종이 모두 보았을 것인데 고구려를 계승한 황제국 고려에서 ‘고구려가 어버이 중국에 버르장머리 없이 굴다가 망한 나라’라고 기록한 것을 그냥 놔두었겠는가, 또한 삼국사기 전반에 흐르는 중국사대노예세계관에 기초한 역사기록을 그대로 하라고 놔두었겠는가,

더구나 현존하는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것이 하나도 없다. 모두 이조선 정권의 개국과 동시에 두 차례 교정, 개판된 것이다. 현존하는 삼국사기의 끝장에 보면 발문跋文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에 이조선 태조 이성계 2년에 김거두라는 이조선 고위직 관리가 이조선 정권의 명령을 받아 새로 펴냈고, 이어 이조선 중종연간에 연산군을 몰아낸 추성정난공신, 전평군 이계복李繼福이라는 자가 다시 개간改刊해 낸다. 이런 발문 기사가 없다면 삼국사기가 고려 인종 때의 김부식이 편찬한 것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명백하게 이조선 시대에 와서 두 차례나 다시 펴냈고 이계복이 펴낼 때는 중판重版도 아니요, 재판再版도 아니요, 복판復板도 아닌 명백히 개간改刊했다고 나온다. 이것은 ‘틀린 것을 바로잡아 고쳐 다시 찍어 냈다’는 소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중국 사대노예세계관에 맞게 원 삼국사기를 왜곡, 날조해 냈다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이조선은 자기기준에 맞지 않으면 음사淫祀라고 정의내린다. 이런 음사적 관점에서 고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3)이조선의 ‘삼국유사, 제왕운기’등 왜곡조작

다음으로 삼국유사이다. 이것도 앞선 언급한 이조선 중종연간의 추성정난공신, 전평군, 이계복이 개판했다고 발문에 똑 같이 써 있다. 삼국유사 역시 전편 밑바닥에는 중국 사대노예세계관이 흐르고 있다. 이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 삼국유사 서문이다. 중화세계관과 공자유교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공자유교 경전에서나 볼 수 있는 ‘성인이 예악으로 나라를 흥하게 하였다(聖人方其藝樂興邦)’든가, 인의예지 할 때의 인의로 가르침을 베풀었다(仁義設敎)든가, 공자가 금기시한 용어인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는 말이 나오는가 하면 온통 중국의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인물들을 비유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河水圖洛水書, 神母伏羲, 女登炎宰, 皇娥少昊, 簡狄契, 堯). 불교승려 일연이 썻다면 불교적 이야기로 비유를 들어 서문을 쓰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첫 서문에서 중국에 뿌리를 둔 세계관으로 가득 찬 글이 등장한다는 것은 누구도 납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이조선의 공자유교에 물든 이조 선비가 쓴 냄새가 물씬 풍긴다.

특히 삼국유사 첫장에 나오는 개국신화(이른바 단군신화)의 고조선(왕검조선)편의 마지막 부분에 중국왕조,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책봉하였다는 문구(周虎王卽位己卯封箕子於朝鮮)가 나오는데 위와 같은 여러 정황과 본 논문 아래 ‘2)기자조선 부정설- 긍정설 비판’ 항목에서 다룬 바와 같이 실증적 근거를 통해서 볼 때 중국사대주의를 표방한 이조선 정권이 추가로 집어넣은 것으로 나온다.

고려시대 이승휴라는 사람이 썼다는 이른바 ‘제왕운기’도 마찬가지다. 이조선 들어서 ‘교정敎正’ 하여 개판開版했다는 발문이 붙어 있다. 따라서 제왕운기의 후조선기에 나오는 이른바 ‘기자’관련기록은 이조선 정권에서 집어넣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기자관련 내용이 나오는 중국사서의 모든 내용을 압축 정리하여 써놓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명나라를 주인, 상전, 부모나라로 섬기는 것을 국가시책으로 한 이조선 정권은 위와 같이 고려시대의 사서를 사대노예사관 맞게 모두 왜곡조작해서 다시 펴낸다(4부에서 이어짐).

글: 오종홍('삼태극' 대표 http://cafe.daum.net/mo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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