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은 만들어진 허구인가?

기사수정: 서기2016.7.6. 13:23

 

'기자조선'이 실존했다면 왜 그 보다 1천년전에 존재한 조선(단군)의 흔적보다

턱없이 부족한가, 이 땅의 산천 산하 구석 구석엔 단군의 흔적만이 존재한다...

 

2)기자조선 긍정설

‘기자조선’ 이라는 관념은 앞서 밝혔듯이 이조선 시대를 거치며 생성, 고착화 되었다. 그것도 5백년동안 주입, 세뇌되어 왔기 때문에 그 뿌리는 깊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기자조선의 실재를 당연히 여기며 ‘왜 국사책에 빼버렸느냐’고 따지며 다시 집어넣어야 한다고 외치는 세력이 상당하다. 그럼 ‘기자조선’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무슨 근거를 내세워 기자조선의 실재를 주장하는 것일까,

첫째, 이들은 중국 문헌사료상의 기록을 근거로 기자조선의 존재를 주장한다. 중국 사서인 ‘서경書經, 상서대전尙書大傳,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한서지리지漢書地理地’ 등에 기자조선 존재의 근거와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위 사서가 나온 시대 순서대로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서경

“주나라 무왕 재위 13년인 서기전1117년 봄에...중략...상나라 즉 은나라 정치를 뒤집어엎은 후 정치는 옛날의 정치를 따르도록 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있던 기자箕子를 석방하여 주었다(惟十有三年春...一戎衣天下大定 乃反商政 政由舊 釋箕子囚.”

-상서대전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은나라 주왕의 아들인 공자무경에게 녹봉을 주어 그 아비의 대를 잇게 하였다. 그리고 갇혀 있던 기자를 석방하여 주었다. 그러나 기자는 주나라가 석방해 주는 것을 용인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으로 갔다. 무왕이 그것을 듣고 조선을 기자에게 봉지로 주었다. 기자는 이미 주나라가 봉해준 봉지를 받았으므로 할 수 없이 무왕에게 신하의 예를 표하러 주나라 조정에 들어갔다. 주나라 무왕은 그런 이유로 즉위 13년인 서기전 1115년에 기자에게 국가 경영의 홍범에 대하여 들었다(武王勝殷 繼公子祿父 釋箕子之囚 箕子不忍爲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旣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武王因其朝而聞鴻範).”

-사기 송미자세가

“기자는 은나라 주(紂)왕의 친척이다. 이때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책봉했다. 그러나 기자는 주나라 무왕의 신하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기자는 주나라 무왕에게 인사드리러 갔다(箕子者紂親戚也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其後箕子朝周).”

-한서 권28하 지리지 연지

“낙랑,현토는 한나라 무제 때에 설치한 것인데 모두 조선의 '예맥,구려,만이'들이다. 은나라의 도가 쇠하니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나라 백성에게 예와 의와 밭농사와 누에치는 것과 옷감 짜는 것과 물건 만드는 것과 낙랑조선 백성들에게 범죄를 금지하는 8조를 가르쳐 주었다. 서로 살인하면 죽임으로써 갚고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보상하고 도적질한 남자는 피해자의 집노예로 삼고 여자의 경우는 노비로 삼는다. 돈으로 갚으려면 50만냥을 내야한다. ... 결국 그 백성들은 도적질 하지 않고 문도 닫지 않으며 부녀자는 정조에 신의가 있어 음란하지 않게되었다. ... 이는 인仁자한 성현의 교화로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동이의 천성이 부드럽고 순종적이 되었고 3방의 외지와는 다르다 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 구이(동이=기자의 조선 땅)에 살고 싶어 한 것이다(玄菟、樂浪,武帝時置。皆朝鮮、濊貉、句驪蠻夷。殷道衰、箕子去之朝鮮、教其民以禮義、田蠶織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相殺以當時償殺、相傷以穀償。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女子爲婢。欲自贖者、人五十萬。雖免爲民、俗猶羞之、嫁取無所讎。是以、其民終不相盜、無門戶之閉、婦人貞信不淫辟。其田民、飲食以籩豆、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往往以杯器食。郡初取吏於遼東、吏見民無閉臧、及賈人往者、夜則爲盜、俗稍益薄。今於犯禁濅多、至六十餘條。可貴哉,仁賢之化也。然東夷天性柔順、異於三方之外。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有以也夫).

둘째, 기자조선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경과 요녕성 서쪽 사이에서 발견되는 은나라 말기와 주나라 초기의 청동기로 알려진 유물들이 대량 발굴되었는데 그 중 다리가 네 개 달린 청동방정靑銅方鼎에서 ‘기자箕子’를 뜻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자가 조선으로 온 증거라고 한다.

셋째, 기자조선 긍정설은 위와 같은 사료와 우하량 요녕성 지역에서 발견되는 청동유물을 토대로 추론을 거듭하며 다음과 같이 논리를 전개한다. 기자조선이 우하량지역에서 시작하여 나중에 중국 연나라의 침략을 받으면서 밀려난다. 그리고 이 후에 점차 동진하여 결국 현재의 한땅(한반도)의 평양에 도읍하여 전 한땅을 모두 기자조선이 차지하여 다스렸다고 한다. 아울러 기자조선 관련 내용이 새롭게 부풀려 나오는 사료와, 기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주변의 사서기록을 동원하여 더욱 추론과 상상을 거듭하여 확고하게 기자조선을 확립해 놓는다. 이러한 주장은 주로 중국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며 이것을 국내 학자들도 수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 서양인이 평양일대에 조성된 기자우물(기자정)터에 앉아 있다. 뒤로는 이 우물에 앉아 있는 서양인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조선의 생민이 서있다. 소중화 조선은 기자조선의 실체를 나타내기 위해 기자묘는 물론 기자우물까지 만들어 역사를 날조했다. 현재 중국이 기자조선을 북한 평안도 일대로 그려놓고 있는 동북공정과 같은 짓을 하였다. 율곡 이이는 '기자실기'라는 것 까지 써서 기자조선을 역사화 하였다.

2)기자조선 부정설(긍정설 비판)

긍정설을 요약하면, 중국의 주무왕이라는 자가 은나라 사람으로 알려진 기자라는 사람을 단군조선의 제후로 책봉해서 파견했거나 스스로 조선으로 와서 단군조선생민을 ‘홍범구주’와 ‘8조범금’으로 교화 계몽시켜 단군조선을 미개야만에서 해방 시켰다는 것이다.

(1) 기자조선 기록의 창작 가능성

그러나 기자관련 기사가 춘추시대인 서기전 6백년 이전에 제일 먼저 쓰여졌다고 알려진 서경에는 기자를 석방했다는 이야기만 나오지, 기자가 무왕의 책봉을 받아 조선으로 갔다거나 하는 내용이 없다.

그 뒤에 나오는 사서인 ‘서경’을 구전 받아 썼다는 ‘상서대전’이나, 사기에만 책봉받아 조선으로 갔다거나, 책봉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모르나 하여튼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이 추가되어 나온다. 사마천이 썼다는 사기의 경우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고 최초로 황제라 칭한 진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한나라 때 쓴 것이다. 서기전 약 1백 십수년으로 추정된다. 서경과는 무려 4백년이상 차이난다. 그리고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조선의 제후로 책봉한 시기는 서기전 약1120년경으로써 ‘사기’가 쓰여진 시기와 비교해 보면 무려 8~9백년 차이가 나다. 사기를 쓴 사마천이 전능하신 신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앞서 쓰여진 서경에 없는 기자관련 사실을 알고 새롭게 추가 할 수 있단 말인가! 상서대전에 나오는 기자관련 추가 기록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권위 있는 문헌인 서경에 기자가 석방되었다는 기록 외에 후대에 가서 새로운 사실이 나온다는 것은 창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타당하다.

 기자조선 기사가 후대에 와서 창작, 날조되었다는 또 하나의 근거는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한서지리지가 쓰이기 수백년전에 나온 사기나 상서대전에 없는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즉 기자가 단군조선에 와서 ‘그 나라 백성에게 예의와 밭농사와 누에치는 것과 옷 만드는 것을 가르치고 범죄를 금지하는 8조를 가르쳐 주었는데 그 결과 교화가 잘되어 지상낙원이 되었고 공자마저 와서 살고 싶어 했다‘ 는 것이다.

이렇게 자세한 통치 내용을 기자가 죽은 지 1천년이 넘은 뒤의 사람이 어떻게 알고 상세히 기록할 수 있단 말인가, 명백히 후대에 추가 날조 조작한 것으로 밖에 달리 해석이 안 된다. 명나라와 이조선은 이것을 근거로 이 후에 남긴 문헌사료에 더 많은 이야기를 또 추가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기자조선의 역대왕의 명단까지 나오고 기자사당과 기자무덤까지 등장한다.

이러한 사례는 ‘사기史記’의 ‘한사군’ 기록과 그 뒤에 나온 ‘한서漢書’의 ‘한사군’ 기록을 통해서도 비교 확인된다. 이른바 ‘한사군’이라는 것은 한나라 왕, ‘유철(이른바 한무제)'이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오늘날로 말하면 통치기구 4개를 설치해서 조선을 식민통치했다는 것이다.

이 한사군이라는 이야기가 사마천의 사기에는 그냥 4군을 설치했다는 내용만 나온다. 그 이름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없다. 그런데 이 사기보다 180년 뒤에 나온 중국인 반고가 썼다는 '한서'에는 한사군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보다 거의 2백년전에 쓴 사기에는 없는 ‘진번, 임둔, 낙랑, 현도’ 라는 4군의 명칭이 구체적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사기를 쓴 사마천이 이것을 몰라서 ‘사기’에 안 써놨을까, 그래서 한사군이라는 것이 원래 없었다는 증거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례를 통해서도 기자가 단군조선으로 와서 단군조선 생민들을 미개야만에서 문명교화 시켰다는 기자조선은 상상속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 중화패권주의 사관에 따라 기록한 기자조선 책봉

더구나 위 반고가 썼다는 ‘한서지리지’에, 중국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책봉했고 그는 이것을 받들어 조선으로 와서 ‘조선생민을 미개야만에서 문명개화시켰다’는 내용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강한 정치적 패권주의사관으로 쓰여 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분명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이다. 기자관련 기록이 나오는 서기전과 서기 후 초반기의 중국문헌을 보면 중국이 기자를 단군조선의 제후로 책봉했다는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이후 이것을 보고 쓴 중국사료들도 대부분 기자가 스스로 단군조선으로 간 것이 아닌, 중국의 책봉을 받아 이른바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갔다는 식으로 기술 하고 있다. 우리나라 이조선의 사료들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의 중공공산당 정권의 한겨레 흡수말살책동, 동북공정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 소결론

맨 먼저 쓴 서기전 6백년 이전의 ‘서경’에는 ‘기자가 석방되었다’는 내용만 나온다. 그 뒤 수백년이 지난 후에 나온 사기나, 상서대전에는 ‘조선에 책봉 받거나 조선으로 갔다’ 는 내용이 추가 되어 나온다. 마지막으로 서기 1세기에 쓴 것으로 나오는 한서지리지에는 위 내용 더하기, 기자가 어떻게 단군조선을 교화 계몽시켜 다스렸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나온다. 이것은 후대에 창작조작된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기독교 신약전서 공관복음서 중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나왔는데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나중에 나온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다른 이야기가 추가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신화, 설화, 전설도 세월이 흐르면서 후대 사람들이 내용을 풍부하게 덧붙인다는 것을 볼 때, 기자에 관한 이야기도 후대 사서에 더 풍부하게 덧붙여질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기자조선은 가공의 상상속의 이야기라고 볼 수 밖에 없다(8부에서 이어짐).

글: 오종홍(삼태극 http://cafe.daum.net/mookto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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