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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2: 기자조선과 동북공정(1)단군이래 최악의 우리역사 파괴와 왜곡, 날조의 주범은 누구인가?
오종홍 | 승인 2016.06.16 10:36

- 명조선의 '기자조선' 만들기(1)-

1.총설

우리의 오늘 됨은 지난날이 쌓인 결과다. 개인은 그 개인의 과거가 쌓여서 오늘의 그가 있는 것이며, 나라와 민족은 그 나라의 역사가 쌓여서 오늘의 그 나라와 민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가 개인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쉽게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역사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크다. 이조선 정권이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먹었기 때문에 일제강점시대가 왔으며 뒤 이어 6.25. 한국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국이 한국 전쟁 후 복구사업에 절대적인 도움을 줌으로써 미국은 우리에게 어버이의 나라,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미국의 비호아래 오늘날 친미세력이 나라를 좌지우지 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래서 사상적으로는 미제산 기독교회 목사교가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정치경제적으로는 미제산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우리는 비정규직이라는 이상한 경제계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사회적 양극화와 살인적인 생존경쟁이 더욱 치열해 지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에서 제일 많은 자살자를 양산해 내고 있는바, 하루 평균 40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1년으로 따지면 연간 2개 사단병력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자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역사는 아주 절박하게 개인의 생존을 좌우할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만약에 이조선 정권이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짓을 하지 않고 동학혁명세력과 합세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함께 나라를 이끌었다면 오늘날의 이런 비극적인 상황은 전개 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주체가 되어 서양문물을 수용하여 우리의 전통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 필요한 것을 받아들여 가장 이상적인 생민 본위의 선진국가를 탄탄하게 구축했을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이렇게 개인적인 물질적 삶에도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른 한편 역사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한다. 이조선 이전의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여성들은 ‘남귀여가男歸女家’라는 결혼풍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이 주도하는 사회로 여성적인 포용성과 다양성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풍류도'에 바탕을 둔 불교, 도교, 유교 등 다양성이 보장되어 문물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조선 들어서 공자유교의 1당독재체제만 강요하고 다른 것은 일체 허용치 않아 사상적 경직성 때문에 결국 제때에 개항을 하지 못하여 일제에게 나라가 사라지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특히 이조선 정권은 지배, 피지배라는 수직적 질서인 공자유교사상에 뿌리박은 명나라 사대주의를 국시로 하여 5백년동안 지속한 결과 우리의 무의식가운데 큰 나라는 절대로 넘볼 수 없고 우리 것은 원래 다 중국 등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라는 자학적 기회주의 사대근성을 심어 놨다.

그래서 우리가 더 잘사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국하면 감히 넘볼 수 없는 대상으로 무의식속에 각인되어 있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중국이 현재 우리의 제주도 서남단의 이어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하며 수시로 항공기와 배를 띄워 출몰하며 협박을 해도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중국의 어선이 우리의 영해에 들어와 마구잡이로 불법조업을 해도 소극적, 수세적으로 밀어내거나 마지못해 체포해도 중국 공산당 정권의 공갈 협박에 굴복하여 곧 풀어주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스스로 주권국가라고 할 수 없는 짓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 진압하는 애꿎은 우리 해경들만 희생되고 있는 실정이다.

▲ 중국어선이 이제는 우리나라 한강하구에 까지 와서 물고기를 약탈하고 있다(서기2016. 6. 13. 현재). 러시아, 아르헨티나는 자국영토를 침범하여 물고기를 약탈하던 중국 해적선을 모두 침몰시킨바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식민주의 사관에서 갖혀 자주적인 사고를 하지 못해 나포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수 년전에는 저 중국해적떼를 진압하다가 해경대원이 순직한 바있다. (그림: 조선일보).

이와 같이 역사는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나 국가, 민족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그 역사의 처음이 있듯이 우리의 역사에도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역사의 출발점이 있다. 그것도 우리 스스로 세계의 현생인류문명을 열어 이 끈 위대한 역사의 새벽이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머리와 뿌리 되는 역사는 잘려 나간 상태로 공식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모도 모르고 근본도 모르는 떠돌이 족속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머리가 없는 역사 교육은 우리가 뿌리 없는 민족이요, 부모없는 존재임을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심어주고 있는바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

개인이나 국가는 그 정체성을 먹고 살며 왜 존재하는 지 정체성속에서 근본이유를 찾는다. 그런데 지금 가르치는 우리의 역사교육은 이 정체성을 심어주는 역사의 머리를 잘라 버려 머리 없는 족속으로 만들어 버렸다. 머리가 없다는 것은 정신이 나갔다는 것이며 이는 정신병자를 말한다.

아이가 처음 엄마 뱃속에서 나와 제일 먼저 찾는 것이 엄마이며 엄마와의 깊고 따듯한 교감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그리고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서 향후 인생을 결정하는 기초를 닦는다. 그런데 이러한 엄마와의 교감을 통한 애착, 자아정체감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는 커서도 정서불안으로 시달리며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데도 스스로 주체가 되어 못하고 혼란 속에 빠지기 쉽고, 범죄성향을 보인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의 시작을 가르치지 않거나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개인적, 국가적, 민족적 차원에서 심각한 병리현상을 야기 시킨다. 오늘날의 우리 한국사회가 이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의 처음은 어디이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보통 단군왕검이 개국한 ‘조선’을 우리역사의 실체로 보고 여기서 우리의 모습을 찾는다. 수많은 학설과 주장들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조선(왕검조선)’을 근거로 우리 역사의 시작을 전개한다. 그런데 이 조선(단군)역사, 약2천년을 47명의 단군임금이 다스린 것이 아니라, 단군왕검의 조선은 약 1천년정도 진행하다가 끝났고, 이 후에는 중국세력이 단군왕검이 개국한 조선을 정복하여 미개 야만의 조선을 선진문물을 들여와 계몽, 개화시켜 문명국으로 만들었다거나, 정벌, 멸망시켜 비참하게 끝났다는 식으로 가르쳐 왔다.

이른바 ‘기자’의 조선과 ‘위만’의 조선이다. 기자조선은 이조선 5백년 동안 국가기본 시책으로 주입, 세뇌되어 왔고 위만조선은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정신활동에 지대한 악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기자조선이다. 중국에서 파견한 조선 총독, 기자가 단군조선으로 와서 약 1천년 동안 통치하며 미개야만의 우리를 문명개화시켰다고 주입, 세뇌시켜왔다. 이는 우리 무의식속에 저주받은 망령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사대노예의식에 바탕을 둔 외세굴종의식과, 피해의식, 자학적 인생관, 운명주의적 세계관으로 되살아나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기자조선’에 대하여 논하기로 한다. 기자조선의 요점은 중국에서 중국 주나라 무왕의 책봉을 받아 ‘기자箕子’라는 인물이 이른바 ‘8조범금’과 ‘홍범구주’라는 선진문화제도를 가지고와서 단군조선 생민들을 교화, 계몽시켜 미개야만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것이다. 기자조선을 긍정하고 심지어 찬양하는 세력은 ‘기자조선’에 머리를 두고 기자를 조상으로 삼은 이조선이 망한지 1백년이 넘었는데도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들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이하에서는

첫째, ‘기자조선’이 생기게 된 계기를 이조선 왕조 개국 전후를 통해서 살펴본다.

둘째, 기자조선을 긍정하는 측과 부정하는 측의 기존의 일반적 견해를 살펴본다.

셋째, 기자조선을 긍정하는 어느 특정 견해를 살펴보면서 이에 대한 반대 근거를 제시한다.

넷째, 오늘 현시점에서 왜 기자조선설이 위험한지 그 심각성을 중공의 ‘동북공정’을 통해서 살펴본다.

▲ 떼거리로 우리나라 한강하구까지 침범하여 물고기를 강탈해 가는 중국 해적들을 근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옹진군 생민들(서기2016. 6. 13.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저 해적떼를 너무나 관대하게 대하고 있다. 외교문제화 하여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북한은 수 년전 북한 영해를 불법침탈하여 조업하던 중국 해적떼를 사살한 바있다(옹진군청제공).

2. 기자조선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기자조선이 하나의 역사로써 어떻게 사실로 체계와 되었는지 실체를 확인하려면 고려 말 공자유교 신봉자들과 이성계의 위화도회군반란 그리고 당시 신흥 명나라와의 관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1) 위화도 반란의 사상적 토대

이 땅에 공자유교가 들어온 이후 고려말에 와서 본격적으로 새끼공자신도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계에 까지 진출하여 세력을 확장하며 공자의 나라를 꿈꾸기에 이른다. 고려 말 공민왕시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우리가 흔히 들어온 정도전, 정몽주, 조준 등을 중심으로 공자유교의 나라가 구체화되어 간다. 이들 중에 정도전은 정몽주와는 다르게 고려제국을 폭력으로 뒤엎고 새로운 공자유교질서를 꿈꾸며 이성계와 의기투합한다. 이민족 출신 이성계 역시 그 아비 이자춘 때부터 고려조정에 내조한 이후 고려군부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여 ‘최영崔瑩’ 다음가는 세력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공자유교에 철저히 세뇌된 이들은 이미 새끼중국인의 정신세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공자유교의 원산지 중국은 어버이 나라요, 주인으로 추앙받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당시 발흥하는 신생국 명나라에 대하여 사모하는 마음 가득했고 성지순례를 해야 하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2) 고려의 명나라 정벌군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반란

이러한 때에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명나라가 이른바 철령위사건을 일으키고 요동의 고려 땅을 침탈하여 왔다. 고려는 자주 독립국으로써 외적의 침탈을 막는 것은 당연하였고, 나아가 아직 신생독립국에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명나라를 멸망시켜 고토회복까지 덤으로 노렸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좋은 단군조선의 단궁을 이어 받은 활(최대살상거리 약300m)과 고구려의 개마기갑군단을 계승한 기마군단 2만 이상으로 무장한 최정예 군대를 편성하여 명나라 정벌 및 고토수복에 나선다.

청태조 金누르하치가 명나라를 정복하면서 한 말이 있다. “내게 팔기군 기병1만을 주면 세계를 제압할 수 있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중) 몽골이 세계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것도 기병이 절대적으로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지난 서기2011년 8월에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던 ‘최종병기 활’에서 보여주는 청나라 기병의 질주하는 모습과 전투모습을 보면 기병이 얼마나 위력이 강한지 가늠할 수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보병중심의 이조선 군대를 휩쓸어 버린다. 이러한 막강 명나라 정벌 고려군대가 당시 원나라 몽골군대와 연합하기로 했으니 신생국 명나라 멸망은 불 보듯 하였다.

아, 그런데 이를 어찌하랴! 이미 명나라를 어버이로 섬기고 주인으로 섬기는 사대노예 정신으로 물든 이성계를 명나라 정벌군 사령관으로 맡겨버린 것이다. 결국 이성계는 정벌군 요소 요소에 자기의 심복을 중간 지휘관으로 심어 놓고 이들을 이용하여 고려군을 선동하여 정벌군을 반란군으로 둔갑시키는데 성공한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생리상 현장 최고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반란에 성공할 경우 개국공신이 되고 각종 논공행상을 통하여 출세시켜 준다는 감언이설에 안 넘어갈 군관과 병사들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성계 일당은 위화도 회군반란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공자유교의 나라건설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반란은 대다수 고려생민들에게는 반역으로 비추어졌고 명분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성계 반란군 세력은 명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목적을 달성한다. 자기를 정벌하러 오는 최강 고려군대가 오다말고 갑자기 회군을 하여 그 주인을 때려잡는 것을 본 명나라는 반란군의 실체를 파악하고 본격적으로 반란군과 교류를 통하여 주인과 종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3) ‘기자조선’ 확립과 공자유교를 국시로 삼다.

결국 이성계는 자신의 사리사욕의 정권욕(이조선 개국)을 채우기 위해서 지금까지 이어온 자주독립국의 모습을 버리고 외세 굴종, 사대노예역사의 문을 활짝 열어 제친다. 모든 것을 명나라에 넘기고 명나라의 보호아래서만 존재하는 이씨조선왕조를 개창한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전통과 문화를 모두 지워버리고 전혀 다른 나라, 다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과거 지우기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과 이념과 전통을 세우는데 이조개국 초기의 국력을 모두 쏟아 붙는다. 이조태조실록과 세종실록을 보면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드러난다.

가장 먼저 이조선 정권이 날조 작업에 착수 한 것은 우리의 뿌리를, 머리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고 이는 나라이름부터 먼저 정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이조선 정권은 자신들의 주인이자 상전인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라는 이름을 내려 받는다. 이것은 ‘단군’의 조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사실상 뿌리 왕조라고 하는 주나라 무왕이 ‘단군조선’를 다스리라고 제후로 책봉해 줬다는 기자箕子의 ‘조선’을 말한다. 혈연적, 정신적으로 단군의 조선이 아니라 중국의 주나라 무왕이 조선의 제후로 책봉해 줬다는 기자箕子의 나라를 조상으로 섬긴다는 것이다.

명나라를 주인, 상전으로 섬기는 것을 국시로 정한 이조선 정권에게는 이러한 역사적인 연원이 반드시 필요했다. 명나라를 주인, 상전으로 섬기려면 반드시 역사적 이론적 근거가 있어야 했고 이 차원에서 ‘ 서기전 약 1천년전에 중국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단군조선에 제후로 책봉했다’는 이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성을 중국의 성으로 갈아 버리는 것이며, 이제까지 입고 있는 고려의 옷을 중국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뜻한다. 단군을 부모로 둔 이제까지의 삶을 버리고 중국이 임명해준 기자를 조상부모로 모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른바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한다.

이조선이 왜 중국명나라가 명명한 나라인지 그 이론적 근거를 알려주는 한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에 동방(東邦)을 돌아보시고 우리로 하여금 편안히 살도록 하셨도다. 이 때에 신의 선조(先祖)께서 삼가 명나라의 지시를 받들어 이 동토(東土)를 다스렸으니 신인(神人)의 비호하는 바가 되었도다. 황제께서 벌써 반서(班瑞) 를 하시고 아름다운 국호를 내리셨도다. 은사(殷師)의 옛 봉강(封疆)을 이에 다시 받도록 명하셨도다. 만 가지 이치를 밝게 살피니 비금(斐錦)이 세상에 행해질 수 없도다. 부모의 나라가 매우 가까우니 우로(雨露)의 은택을 고루 받았도다. 아무리 작은 것도 모두 황제가 주신 것이니, 왕기(王畿) 밖의 요전(要甸) 이 어찌 차별이 있겠는가(영조 69권, 25년(1749 기사 / 청 건륭(乾隆) 14년) 4월 10일(정해)?

여기서 ‘은사’라는 것은 은(殷)나라 태사(太師)였던 기자(箕子)를 가리킨다. 이조선은 당시 이조선의 땅이 옛날 중국 주나라 무왕이 봉토해준 그 땅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자가 중국 주나라 무왕으로부터 단군조선의 제후로 책봉을 받아 와서 다스렸는데, 이조선 때도 중국 명나라가 이조선에 이조선의 왕을 책봉하여 다스리게 한 것이 옳다는 것이고 그 은혜로 이 만큼 이조선 왕조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조선 정권은 이처럼 중국인 기자에 머리를 두고 공자유교를 국시로 삼는 것으로 이조의 국가기반을 닦는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자주적으로 우리의 삶과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관리 감독이 있을 때, 우리나라가 비로소 모습을 갖추고 제대로 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기자조선’이 어떻게 구체와 실체와 되었는지 리조선 정권을 사실상 기획하고 기초를 닦아놓은 삼봉 정도전의 삼봉집 ‘조선경국전’ 편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해동(海東=조선반도)은 그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朝鮮)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이 있었으니, 단군(檀君)ㆍ기자(箕子)ㆍ위만(衛滿)이 바로 그들이다. 박씨(朴氏)ㆍ석씨(昔氏)ㆍ김씨(金氏)가 서로 이어 신라(新羅)라고 일컬었으며, 온조(溫祚)는 앞서 백제(百濟)라고 일컫고, 견훤(甄萱)은 뒤에 후백제(後百濟)라고 일컬었다. 또 고주몽(高朱蒙)은 고구려(高句麗)라고 일컫고, 궁예(弓裔)는 후고구려(後高句麗)라고 일컬었으며, 왕씨(王氏)는 궁예를 대신하여 고려(高麗)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모두 한 지역을 (중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을 받지 않고서 스스로 명호를 세우고 서로를 침탈하였으니 비록 호칭한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무슨 취할 게 있겠는가? 단 기자만은 주무왕(周武王= 중국의 원조라고 통용됨)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朝鮮侯)에 봉해졌다.

지금 천자天子 (명나라 태조 明太祖)가,

“오직 조선(기자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다.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체받아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

라고 명하였는데, 아마 주무왕이 기자에게 명하던 것으로 전하(이성개)에게 명한 것이리니, 이름이 이미 바르고 말이 이미 순조롭게 된 것이다.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洪範)을 설명하고 홍범의 뜻을 부연하여 8조(條)의 교(敎)를 지어서 국중에 실시하니, 정치와 교화가 성하게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이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善政)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 명나라 천자의 덕도 주무왕에게 부끄러울 게 없거니와,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 학과 8조의 교가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삼봉집 제13권 조선경국전 상(朝鮮經國典 上)” (2부에서 이어짐)

글: 오종홍( '삼태극' 국사광복단 대표 http://cafe.daum.net/mookto)

오종홍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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