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가문의 실체는 무엇일까?

전주에서 기생을 두고 삼각관계를 벌인 이성계의 조상 이안사...

힘에 밀려 동해안 삼척에서 다시 함북 영흥으로 쫓겨가다...

 

 

전주이씨인 이성계가 그 먼 옛날(1335년생) 어떻게 함북 영흥이 고향이 되었나? 지금 세상으로 생각하면 남북분단이 안 되었다면 삼천리금수강산이 하루 생활권이니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 남쪽 끝의 전주가 교향인 전주이씨가 반도의 최북단인 함경북도를 고향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꿈과 같은 얘기다. 물론 전주이씨 벼슬아치가 조정에 죄를 짓거나 권력자에게 밉보여 함경도 땅으로 귀양을 가서 거기서 눌러앉아 씨를 퍼트렸다면 있을 수도 있는 얘기지만 이성계의 조상은 그렇지를 않았다.

3국 시대는 물론 고려까지도 조선과 같이 완전한 중앙집권의 왕조시대가 아니었다. 고려까지는 명목상으로는 봉건왕조 국가였으나, 실상은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감사, 목사, 군수, 현령, 현감 등)와 지방호족이 적당히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던 형태였다. 지방호족에 따라서는 자신의 신변과 재산을 지켜주는 사병(私兵)을 수백 ~ 수 천 명을 거느려,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벼슬아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오늘날로 치면 대 재벌과 같은 부와 권력을 함께 누리는 호족도 흔하던 시절이다.

 

<용비어천가>로 풀어보는 이성계 조상...

전주이씨의 시조는 하대신라시대 전주의 호족이었던 <이한>이라는 분이고 그 자손들은 대대로 전주의 호족을 상속받아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뒤에 조선건국 후 목조대왕으로 추존)까지는 호남일대에서 제일가는 전주의 대 호족이었다.

그 얘기가 용비어천가 18장에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용비어천가 18장>

驪山(여산) 役徒(역도)를 일 하샤 집으로 돌아오실 제(때) 열희(10명) 마음을 하날(하늘)이 달래시니 (앞 절)

셔불(서울-개경) 使者(사자)를 꺼리샤 바라(바다)를 건너실제 二百戶(이백호)를 어느 뉘 청하리 (뒷 절)

용비어천가의 앞 절은 중국의 고사, 뒷 절은 그와 비슷한 조선을 건국한 세종대왕의 6대조(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있었던 고사(이적)를 읊은 것이다.

 

앞 절의 “여산”은 진지황릉의 다른 이름이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재위13년 동안 자신의 능 축조에 모든 국력을 기울였으며, 그 거대한 토목공사가 최초로 천하통일을 한 진나라를 겨우 2대에서 문 닫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 진시황릉을 “여산”이라고 하며 오늘날도 그 규모가 다 파악이 안 되도록 당시는 물론 지금으로서도 상상이 미치지 않는 거대한 토목공사였다. 그러니 중국 전역에서 능 공사에 소요되는 인부들을 징발했다.

당시 마을 정장인 한고조 유방도 여산능 공사에 투입될 200명의 사람을 인솔하고 공사장으로 오도독 명을 받았다. 헌데 여산능 공사에 투입된 인부는 99.9%가 죽을 수밖에 없는 난공사였다. 또한 요행이 살았다 해도 능구조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단위공정이 끝나면 그 공사에 투입된 인원은 그 안에 가두어 생매장을 하니 거기에 동원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뜻 했다.

그러니 유방이 인솔하고 가는 200명은 얼마 지나자 모두 도망을 가고 마지막으로 10명이 남았다. 유방으로서는 남은 열 명을 인솔하고 가도 죽고 집으로 돌아와도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유방은 열 명에게 각자가 흩어져서 살길을 찾으라고 했다. 그러자 그 열 명이 “우리는 죽어도 정장님과 같이 죽고, 살아도 정장님과 같이 살 것입니다.”하면서 유방을 따를 것을 맹세한다. 여기서 유방이 그 열 명을 밑천으로 진나라에 반기를 들어 숱한 전쟁을 겪고 끝내는 진나라를 멸하고 맨 끝으로 초패왕 항우를 격파하고 중국 역사상 사실상 최조의 왕조인 400년 사직의 한나라를 개국하게 된다. 그 열 명이 번쾌, 소하와 같은 한나라의 개국공신이 된 맹장들이었다.

▲소종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소중화 조선은 공자유교의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추구하는 유학자들과 무력을 쥐고 있던 이성계가 합작하여 창업하였다.

 

뒷절이 바로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의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가 문제였다. 이안사가 전주감영의 관기(관에 소속된 기생으로 당시로서는 국유재산과 같았음)에게 반해 전주감영의 고위관리(오늘날로 치면 도청의 국장급)와 3각 관계에 빠졌다. 아무리 대 호족이라 해도 감영의 관기와의 남녀관계는 인정이 될 수 없었다.

그 죄를 이안사가 범한 것이다.  감영의 관리는 대 호족인 이안사를 전주감영자체의 힘과 병력으로서는 단죄가 불가능하여 할 수 없이 서울(개성)에 이를 직소했고, 조정에서는 이안사를 개성으로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가 전주로 급파되었다.

이 정보를 탐지한 이안사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변산반도 앞 바다에 수 십 척의 배를 대고 모든 재산과 노비와 사병들을 싣고 남해바다를 돌아 북으로 동해를 거슬러 올라갔다.

뒷절은 바로 그 얘기다.

셔불(서울-개성) 사자(금부도사)을 꺼리어 바라를 건너실제 이안사가 하도 인심을 얻어 200호가 스스로 따라 나섰다는 얘기다.

인심은 무슨 인심?

이안사가 아니면 바늘 꼽을 땅도 없는 그들은 어차피 전주에서는 살 길이 없었음으로 할 수 없이 이안사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안사 함대가 강원도 삼척에 닺을 내리고 거기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전주에서 3각 관계였던 전주감영의 관리가 승진이 되어 삼척군수로 부임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이안사는 다시 짐을 싸서 동해바다를 거슬러 올라가 원산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그 후손이 다시 영흥까지 흘러들어가서 이성계의 고향이 함북 영흥이 된 것이다.

뒤에 이성계의 조상이 살던 함북지방은 원나라의 영토가 되어 이성계의 부친(이자춘 -뒤에 환조대왕으로 추존)은 원나라의 벼슬을 살고 이성계도 원나라의 군인이 되었다가 원나라가 쇠퇴하고 고려가 다시 함경도지방을 탈환하자 다시 고려로 귀순을 하여 이성계는 최영장군과 더불어 왜구의 토벌로 숫한 공적을 올리고, 백성들로부터 그 공적을 인정받아 고려를 엎어버리고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 것이다.

뒷날 이성계는 남해바닷가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는 전투에서 용맹이 사자와 같은 왜구의 소년장수 <아기발도>라는 놈의 아가리에 100발100중의 활 솜씨로 화살을 쑤셔 밖아 토벌을 마무리 짓고 개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고조할아버지 고향인 전주에 들러 자신과 먼 친척벌이 되는 전주이씨들 모아 놓고 큰 잔치를 벌이고, 뒤에 조선을 건국하고 나서 3대 태종대왕 때 전주에 “경기전”인가 하는 태조대왕인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는 전각을 지었다고 하는데 필자는 경기전을 가본 바가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항상 여자가 문제로다.

정치인들이여!

수채 구멍을 조심하라!

그리고 물총뿌리를 조심할 지어다!

 

글: 윤재학(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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