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주원장은 우리의 단군역사의 장구함을 알고 있었다.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에 담긴 계략과 음모

“태종조(太宗朝)에 하륜(河崙)이 제사(諸祠)의 목상(木像)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여 삼성(三聖)의 목상도 또한 예(例)에 따라 파하였다 하며, 의물(儀物)의 설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1472년 2월 황해도관찰사 이예(李芮, 1419-1480)가 성종에게 상주(上奏)했다. 구월산(九月山) 삼성당(三聖堂)의 한인(桓因) 한웅(桓雄) 단군(檀君) 세 분 천왕(天王)의 목상과 위패가 있었는데 이를 부숴 없애버렸다는 사적(事跡)기록을 올린 것이다.

여말선초에는 ‘삼성당 아래 근처에는 인가가 많았으나, 평양부(平壤府)에 옮기고 치제(致祭)하지 않자 그 뒤로부터 악병(惡病)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인가가 텅 비었다’고 했다. 이예는 ‘백성의 원하는 바에 따라 평양의 단군묘(檀君廟)의 예(例)에 의하여 해마다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를 행하게 해 달라’ 소원했고, 왕명에 의해 시행되었다고 했다. ‘백성의 원하는 바에 따라’, 이는 삼성당을 옮김으로 해서 괴병(怪病)으로 인한 백성들의 불안과 원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왕명에 의해 시행’된 것은 반정에 대한 두려움 더 컸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 추정한 시기는 태종 즉위년과 15년(1415) 경으로 삼성당의 기초를를 일찍이 본 사람이 없고 상고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삼성당의 기록 자체를 말살하여 백성들의 눈을 가리고 그 자체를 인정할 수 없도록 차단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당을 부숴 없애버린 하륜(河崙 1347-1416)은 누구인가, 이방원(李芳遠)을 적극 지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승승장구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측근이 되어 국사를 전단했다. 이색(李穡)의 제자이자 정도전과 동문이다. 그는  정도전에 의해 스승 이색이 독술로 어이없이 생을 마감할 때도 방관인이었다.

▲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집해에 분명히 '단군'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식민사학계에서는 단군을 신화라고 하며, 중국사서에 '단군'이라는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을 그 증거로 삼아 왔다. 일연의 삼성기인, 삼국유사 '고조선'기는 중국의 '위서'를 인용하여 최소한 2천년 이상된 조선과 단군을 말하고 있고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태종대에 숨가쁘게 진행된 고사서의 수거와 지리지명의 변동사항은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음모의 시기였다. 1412년에는 역대 사서로 알려진 신지비사(神誌秘詞) 즉 신비집(神秘集)이 괴탄, 불경하다 하여 불태워 졌다. 이색의 문집 일부도 이 범주에 넣어 거두었는데 사라져 버렸다. 이듬해인 1413년 태종은 군현제(郡縣制)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대륙의 지역지명이 한반도로 이동되는 시기로 보여 진다. 군현제는 세종이 야심차게 만든 신찬팔도지리지와 연계성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1428년(세종 10) 우의정으로 물러난 유관(柳寬 1346-1433)이 삼성사(三聖祠)에 관한 상서(上書)를 올렸는데 다음과 같다.   ‘날이 가물 때 삼성신에게 기도하면 즉시 비를 내려준다고 합니다.’라 했고, 기자(箕子)보다도 천년이 앞선 단군 왕검의 신위를 ‘어찌 아래로 내려와 기자묘와 합치하여야 한단 말입니까?’라 하여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어 유관은 ‘단군 조선 때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이며, 신라 때에 궐산(闕山)이라고 고쳐 불렀으며 산 이름의 ‘궐’자를 느린 소리로 발음하여 구월산(九月山)이라 하였다.’고 말했다.

고구리(고구려)의 음가가 고굴이 되고, 고굴이 또 ‘궐’이 되니, 구월산의 원래 이름은 고구리산이다. 신라가 고구리를 초토화시키며, 지명을 왜곡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자는 그저 음가에 끼어 맞췄을 뿐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 유관의 상서에 대해 보류(保留)하라고 지시했다. 참으로 껄끄러운 부분을 유관이 건드려 明과의 관계가 몹시 난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나라의 역사는 어떠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주도하는가로 판가름 나기 마련이었음을 보여준 사례이다.

주원장(朱元璋)이 권근(權近)으로 하여금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를 짓게 하여 조선의 의중을 의도적으로 시험했다. 주원장의 계략에 숨겨진 무서운 음모와 술책, 삼성당이 부수어 지고 역사가 말살된 그 이면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1397년(태조 6) 3월 권근(權近 1352년~1409)이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 앞에 부복했다. 주원장은 어제시를 통해 “단군(檀君)이 떠난 지 오래이니 몇 번이나 경장하였는가?(檀君逝久幾更張)"라 하였다. 이것은 ‘단군 이후 묵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개혁한 것이 몇 번이나 되는가?’ 라고 힐책한 것이다. 이어 "하늘 끝 땅 끝까지 닿은 중화(中華)의 경계"라 하여 조선 또한 명나라의 영역임을 강조했다.

이어 주원장이 내린 협박성 교서(咨文)를 보자. “성지(聖旨)를 받들어 금후로는 사신(使臣)을 보낼 때에는 한인(漢人)의 말을 통하는 사람을 보내고, 한인의 말을 통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인의 말을 통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하여 역사의 한계를 규정짓게 하겠다는 선언이다.

다음 글귀를 또 보자. “지금 조선 국왕이 왕씨(王氏)의 수가 다하고 하늘이 장차 운수를 고치려 함을 인하여, 인사(人事)는 아래에서 만들어지고 천도(天道)는 위에서 응하여 삼한(三韓)을 차지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으니, 백성들이 저자와 시골에 안돈되어 의례(儀禮)는 본 풍속을 인습하고 법은 옛 헌장을 지키니, 나라를 가지는 도가 온전하여졌도다.”

“지금 조선에서 매년 표전(表箋)을 짓는 자가 문사(文辭)로 화를 얽으니, 우리에게 있어서는 비록 반드시 그렇게 여기지 않지마는, 산천과 위아래의 신지(神祗)가 아는 것이 있다면 화가 장차 올 날이 있어서 반드시 피하지 못할 것이다."

고려가 고구리를 지향했고 지켜왔던 역사의 맥이 절단되었음을 당연시 하고, 삼한이 한반도에서 일어났으며 고조선은 그 태두리 안에 있었다는 어깃장 난 논리를 펴 음모를 정당화했다. 또한 이를 어길시 좌시하지 않겠다는 협박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어 주원장이 내린 시제(詩題) 24편 중, 권근이 쓴 시의 내용 일부를 보자. 봉조선명지경(奉朝鮮命至京)에서 “성인 임금 용 처럼 일어나시어 만방(萬方)을 무수(撫綏)하시니, 먼 곳 사람 산 넘고 바다 건너 와서 조공합니다.” 라 했다.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라는 제목에 대하여는, “듣자하니 황막한 그 옛날, 단군(檀君)이 단목가에 강림하시어, 동쪽 나라 왕위에 오르시니”라 하고, “그 뒤에 기자(箕子)의 대(代)에도 한가지로 조선(朝鮮)이라 이름 하였소.”라 했다.

신경지리(新京地理)에 대해 “구구한 지리를 무얼 말씀하리. 길이 황은(皇恩)을 입어 태평을 즐기오리다.”라 했다. <탐라(耽羅)>란 제목에 대해서는 “말은 용의 씨를 낳아서 천한(天閑)에 들어갔다오."라 하여 ‘황제의 마굿간 제주도에서 말을 길러 그 중에서 뛰어난 말을 중국에 조공하였다(고전주석)’고 했다. 굴욕을 넘은 비굴함의 극치이다.

주원장이 <시고개벽동이주>라는 시제를 준 것은 어떠한 뜻일까? 이는 ‘상고시대를 개벽한 동이의 왕은 누구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고개벽주(始古開闢主)인 마고와 한인, 한웅의 역사를 말할 것인지 의도적 시험을 한 것이다. 답변 여하에 따라서는 생사를 가름 하는 절대 절명 위기의 순간이었을 터이다. 마고와, 삼성(三聖) 중 한인, 한웅 이성(二聖)은 피아간 금기시된 역사였다. 기자(箕子)의 대(代)로 연결 지었다. 신생 조선의 이름자는 고조선의 명맥이 아닌 환작된 기자조선의 조선임을 밝히고 있다.

명라나는 건국전인 1390년(공양왕 2) 명나라 사신, 진자성(陳子誠)을 파견, 개성 저잣거리에서 토지문서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을 질러 이전의 기록을 없앴다. 조천궁(朝天宮) 도사(道士) 서사호(徐師昊)를 시켜 백두대간에 쇠말뚝을 박아 천자(天子)의 기운을 끊는 등 사전 정비작업을 했다. 시제에 담긴 의미는 이를 재점검하고자 하는 주원장의 계략과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기화로 단군과 삼성을 기록한 고사서는 수거되어 사라지고, 구월산 삼성당은 하륜(河崙)에 의해 서서히 그리고 주도면밀하게 망가트려 졌다. 여타 시제의 답변내용과 비교, 판단하여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488년(성종 19) 명나라 사신이 평양에 있는 단군묘(檀君廟)에 배례(拜禮)한 사례를 보자. 이들이 기자(箕子)의 분묘[墳]와 사당[廟]을 배알한 후, 단군사당에 배례한다. 기자를 황제 헌원의 16세손(世孫)으로 만들어 끼워 넣음으로써 단군은 하위 개념이 되었다.

복생(伏生)이 상서대전(尙書大全)을 만들어 기자를 위대한 사상가로 탈바꿈시켰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이었다. 중국 주나라를 위하고 우리 동이족을 낮추는 틀에서 이성계 조선은 明의 협박이 두려워 구월산 삼성당(三聖堂)을 자진하여 혁파했다. 고조선을 난도질하고 단군묘를 평양에 만들어 적당한 선에서 안무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리산은 궐산(闕山)이라는 이름을 거쳐 구월산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되었다. 기준(箕準)은 바다 건너 한반도 익산(益山)에 터를 닦아 마한(馬韓)을 세웠다고 자랑했다. ‘도읍(都邑)하던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아부했다. 태평관(太平館)으로 돌아오던 명사(明使)들은 이성계조선의  ‘알아서 기는’ 그 진정어린 충정에 얼마나 감동했을까? 모골이 송연한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 아픔은 진행형이다.

주원장이 단군을 알았으며 조선왕조가 단군을 숭상했다는 단순 기록의 이면에 비친 뼈아픈 역사의 뒤 안, 그 이중적 잣대를 면밀하게 파헤쳐야 올곧은 역사가 보일 터이다.

글 : 한문수(성균관석전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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