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서기를 거부하는 사대노예근성은 소중화 조선에서 탄생하다...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대노예근성이 뼈속까지 스며들어 그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사회...소중화 조선...
3) 기자조선, 중공의 동북공정의 원조
앞서 살펴 본대로 기자조선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속의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일부사서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통치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기자조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이 기자조선을 역사로 확실하게 못 박아 놓고 있다. 그 의도는 명백하다. 우리의 상고시절부터 한국을 식민통치해 왔다는 것이고 이제 다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의 음모에 우리 스스로 동조하고 적극 지지하기를 이조선 5백년동안 해 왔다는 것이다. 지울 수 도 없는 이조선 정권의 만들어진 기자조선에 대한 수많은 기록은 중공의 동북공정사관을 확립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조선 정권이 우리역사를 어떻게 보았는지 알면 현재 중공의 동북공정의 실체를 알 수 있다.
(1) 이조선의 동북공정사관 대강
기자조선을 실재 역사로 자리 매김 해 놓은 이조선 정권은 현재도 살아남은 국내의 사대노예근성의 새끼 중국인, 이조선 잔당들을 통해 우리역사가 중국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풍토를 이어가고 있다. 그 대강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은 서기전 1천년전 부터 기자가 조선을 통치한 이래 중국의 지방정권으로써 중국의 통치를 받아 왔다. 중국 주나라가 중국인 기자를 단군의 조선에 총독으로 임명하여 ‘홍범구주’와 ‘8조범금’으로 다스린지 1천여년, 조선은 미개야만에서 문명개화될 수 있었다. 그 전에는 국가체제도 갖추어지지 않은 미개 야만의 부족국가로써 아직 원시상태였다. 기자가 세운 조선은 나중에 중국 연나라의 침략을 받아 동으로 밀려 났고 결국 현재의 한땅(한반도)평양으로 와서 기자조선을 이어갔다. 그래서 한땅은 중국인 출신의 기자의 후예들이 장악해서 다스렸다.
그리고 몇 대를 거치다가 역시 중국인 출신 위만에게 망한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은 위만에게 쫓겨 마한 쪽으로 도망하가서 잔명을 이어갔는데 그 마한은 오늘날로 말하면 전라도 쪽이다. 위만조선은 서기전 194년경에 생겼다가 서기전 108년경에 다시 중국 한나라 무왕에게 망한다. 그리고 한나라는 다시 한땅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4사군’이라는 중국 식민통치기구를 설치하여 다스린다. 이렇게 우리의 상고사는 막을 내린다.
그 뒤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삼국은 중국 당나라의 율령제도 등을 들여와 정치제도를 선진화 시키고 유교, 도교를 수용하여 중앙집권 국가를 완성한다. 그런데 이럼에도 주인, 천자의 나라 중국이 5호 16국 시대를 맞이하여 혼란해지자 삼국은 이를 틈 타 지들 멋대로 여기저기서 땅을 차지하여 난립한다. 그리고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한다. 주인이 잠시 아파서 누워있음을 기화로 종, 노예들이 주인행세를 하려던 것과 같다. 주인이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웠는데도 조선은 여전히 3국으로 찢어져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주인, 중국은 이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 이래로 중국은 조선을 통치해왔기 때문에 이에 기초하여 토벌하여 안정시킬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결국 수나라에서는 이루지 못했지만 당나라에 와서 3국을 평정하고 안정시켰다. 그리고 신라로 정리하여 제후속국으로 지난 기자조선 때의 모습을 회복했다.
그러다가 주인인 중국대륙이 다시 혼란에 빠진다. 이른바 위진남북조시대다. 이렇게 중국 천자나라가 혼란하게 되고 다시 중국 주인이 아파 눕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종, 노예 조선인들은 자기 땅의 주인행세를 하고자 후삼국시대를 열어 제멋대로 난립하기 시작한다. 다행히 당나라의 후손인 왕씨에게서 왕건이라는 인물이 나와서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라를 세운다. 이에 주인 중국은 왕건을 고려왕으로 책봉한다. 그러나 왕건은 본분을 잊고 주인 중국의 말을 그렇게 썩 잘 듣지는 않았다. 이러는 와중에 북방오랑캐 요, 금, 원나라가 중국을 침략하여 주인 중국이 정신이 없게 되자 한땅(한반도)고려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원나라 때 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다시 주인 중국은 건강을 회복하여 원나라를 몰아내는데 이것이 중국 명나라다. 제정신을 회복한 주인 중국은 그 사이 지멋대로 날뛰며 오랑캐로 변한 왕건 고려를 손봐주지 않으면 더 교만해져서 주인을 아예 몰라 볼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첫 시험으로 고려의 영토에 주인 중국 명나라의 통치기관인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해 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사이 오랑캐로 변한 고려는 주인, 중국을 몰라보고, 오히려 주인을 물어뜯으려고 고구려 개마기갑 군단을 이어받은 최정예 기병2만에다 고려군의 ‘개인화기’인 최대살상거리 300미터나 되는 당시 세계최강의 활로 무장하여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아, 그러나 하늘은 중국 천자를 버리지 않았다. 완전히 다 오랑캐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안에 1천수백년 전부터 뿌려 놓은 공자유교에 물들어 중국을 주인으로 모시는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과 이성계 등 중국천자의 공자유교 신도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중국 주인을 몰라보는 고려조정을 배은망덕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종자들로 보고 기회를 틈타 없애버리기로 한다. 결국 이성계에게 주인 명나라를 정벌하라고 고려기마군단을 맡긴 것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켜 배은망덕한 고려왕조를 멸망시켜 버린다. 주인 중국은 이들의 행동이 너무나 기특하여 예전에 중국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책봉하여 다스리게 한 예에 따라, 이성계에게 기자조선을 이은 왕조라는 뜻으로 ‘조선’이라는 이름을 내려 준다. 그리고 이에 터를 잡아 이조선왕조를 개창하도록 한다. 그리고 다시는 종,노예 조선이 주인에게 반항하여 날 뛰지 못하도록 철저히 오랑캐물을 빼내는 작업에 들어간다.
동시에 중국도 그동안 요, 금, 원나라 오랑캐 시절에 이 오랑캐국가들이 분탕질 해놓은 역사서를 대대적으로 주인 중국 중심으로 정리하여 새롭게 펴낸다. 아울러 노예 이조선왕에게도 명하여 고려오랑캐들이 역시 제멋대로 날뛰며 분탕질 해 놓은 역사서를 전부 다시 예전처럼 중국 주인을 섬기는 역사로 바꾸어 찍어내도록 한다.
이에 이조선 왕은 그리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할 거였다며 더 치밀하게 역사개조 작업에 들어간다. 먼저 3단계로 진행한다. 맨 먼저 중국이 책봉한 기자조선을 확립하고, 이 뒤를 이은 공자유교를 국시로 정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기존 고려사는 불태워 버리고, 불태우기 아까운 것은 중국 주인을 섬기는 방향으로 다시 펴낸다. 그리고 새롭게 주인 중국을 섬기는 역사서를 찍어낸다. 이조선은 이렇게 5백여년 내내 기자와 공자를 철저하게 심어놓아 감히 주인 중국에 딴 마음을 먹지 못하게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이게 또 웬일인가, 다시 북방오랑캐가 들고 일어나 주인 중국을 때려눕히고 주인 중국 땅을 차지해 버린다. 중국의 종, 이조선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영원할 것 같았던 중국 주인이 다시 맥을 못 추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주인 잃은 종은 그래도 언제 다시 주인이 살아 돌아올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북방 오랑캐, 청나라에게 대든다. 그러나 중국 주인의 명령에 따라 ‘기자, 공자’의 방식에 따라 갓 쓰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도포입고, 붓대가리나 들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자왈, 맹자왈만 외치면서 물위에 배 띄워 놓고 기생 옆에 끼고 신선놀음만 하였으니, 오랑캐의 무지막지한 무력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중국노예, 이조선은 일단 목숨부터 부지해야겠기에 눈물을 머금고 그렇게 증오하고 사람취급을 안했던 북방오랑캐, 청나라를 새 주인으로 맞아들인다('병자호란'과 남한산성과 삼전도비).
그러나 이조선은 여전히 마음 저 밑바닥에서는 중국주인에 대한 애절한 감정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 주인 청나라 몰래 중국 명나라 명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냈다(송시열의 화양동 서원과 만동묘). 그리고 다행히 기자와 공자를 모시는 행위를 청나라 오랑캐가 크게 타박하지 않아 마음 놓고 찬양, 숭배하며 중국 주인의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이렇게 해야 나중에 다시 주인 중국이 살아 돌아오면, ‘잘했다’ 칭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날을 기약하며 청나라 오랑캐가 예전에 중국 주인이 자기에게 하듯이 왕의 칭호를 내려주어도 겉으로만 쓰는 척하면서 실제는 내팽개쳐 버렸다. 처음 청나라 오랑캐가 인조에게 시호를 내려 ‘장목왕’이라고 이름 지어 주었지만 ‘알겠어요’ 라고 그 앞에서는 고개 숙이고 뒤 돌아서서는 절대로 그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후 이조선의 왕들도 그때마다 청나라 오랑캐가 이조선 왕을 책봉해주며 왕 시호를 내려 주었지만 쓰지 않았다. 이런 것을 모를리 없는 청나라 오랑캐가 가만히 있으니 중국 노예 이조선왕들은 신났다! 아니 사실은 청나라 오랑캐도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서 왕조를 세우자 주인 중국의 풍에 물들어 공자왈, 주자왈 하기 시작하여 종, 이조선에게 그토록 관대했는지도 모른다. 청나라 오랑캐 왕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칭송받고 있는 ‘강희제’는 중국 공자유교의 성리학에 깊이 빠져들어 성리학적 통치지배 질서를 확립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게 좋은데도 중국 노예 이조선은 청나라 오랑캐에게 복수를 하여 주인의 원수를 갚아야 하니 어쩌니 하며(이른바 효종때의 북벌운동) 여전히 갈팡질팡한다. 그러다가 자기가 주인 노릇해야겠다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청나라 오랑캐에게는 감히 대들 수 없는 노릇이어서 자기 백성들을 상대로 주인 노릇해야겠다는 고약한 심보가 발동한다. 백성을 다스리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주인 중국이 자신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았듯이 백성들을 종으로 보고 착취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라를 지탱하는 백성에게 ‘백골징포白骨徵布’까지 하게 되자 나라는 저절로 허물어져 간다.
이를 틈타 그동안 미개야만의 왜구라고 욕하던 왜국이 신문물로 무장하고 쳐들어온다. 이 왜국은 중국 노예, 이조선을 멸망시키고 이 땅의 주인노릇을 대신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조선 잔당들은 어차피 멸망당하는 거 돈이나 받고 넘기는 것이 후일을 도모하는데 도움이 될 것라고 믿는다. 돈이 마지막에는 자기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것이다. 돈은 국적이 없기 때문에 어디가든 재물만 있으면 일단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과 더불어 왜구가 하사는 각종 작위와 땅을 받고 왜국에게 이조선국을 팔아버린다.
그리고 수 백년을 기다려도 살아 돌아오지 않는 주인, 중국을 포기해버리고 이제까지 사람취급 안하고 ‘왜국’라고 불렀던 섬나라 왜국을 주인으로 맞아들인다. 아,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이란 말인가, 영원할 것 같았던 섬나라 왜국이 예수를 귀신으로 섬기는 서양오랑캐, 백인 미국에게 망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6.25.전쟁으로 이어 졌고 당장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로 몰아넣는다. 그런데 이런 죽음의 기로에서 서양오랑캐, 미국이 무지막지한 물질공세와 기자, 공자의 사상과 철학과 맞먹는 미제산 기독교까지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닌가, 손해 볼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서고 다시 미국을 새 주인으로 맞이한다.
이렇게 미국을 새 주인으로 모신지 60여년 그동안 죽은 줄만 알았던 주인, 중국이 살아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반 동강이 난 이 나라 북쪽에서는 ‘金조선’ 왕조가 중국과 유대인 마르크스가 만들어낸 공산주의를 핑계로 찰싹 달라붙어 형님, 아우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인 중국은 완전히 기력을 회복하여 그 사이 참지 못하고 왜구와 미국을 번갈아가며 주인으로 섬기는 이조잔당이 주도하는 대한민국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아니 복수라기보다는 예전의 주종관계 회복에 나선다. 그리하여 동북공정이라는 국가정책을 수립, 완료하고 실력행사에 들어간다. 그 첫 신호탄이 ‘이어도’영유권 주장이다.”
이렇게 이조선 정권은 우리의 역사를 시작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아 왔다고 가르쳐 동북공정의 첨병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기자조선을 확고하게 역사로 만들어 놓아 한땅(한반도)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식민지 였음을 정당화 시키고 있다. 기자조선을 인정함으로써 그 뒤에 등장하는 중국의 위만조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뒤 이어 등장하는 한나라의 한국 식민통치기관인 한사군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 까지도 국사학계를 주름잡는 일제식민사관세력이 모두 이러한 이조선의 역사관에 기초하여 국사교과서를 찍어내도록 하고 있다. 한땅(한반도) 평양을 중심으로 중국 한나라의 한국 식민지, 한사군이 존재했고 한국을 통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역사관에 따라 우리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중국이나 외국에서 들어왔다는 세계관을 정착시킨다. 오늘의 우리 모습은 스스로 한 것은 거의 없고 모두 외부에서 들여온 것으로 된 것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서낭당, 단오제, 칠월칠석, 방상씨'등의 풍습유래를 찾아보면 모두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식이다. 그러다가 간혹 그 유래를 중국에서 찾기가 정말 힘든 것은 우리 '독자적'으로 한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독자적'이라는 말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늘 중국에 종속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다. 그 와중에 기적과도 같이 '독자적'인 것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14부에서 이어짐).
글: 오종홍(삼태극 http://cafe.daum.net/mookto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