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본래 고향은 중국대륙에 있다.

기자조선 인정하면,

조선(단군)의 역사 1천년이 사라지고, 47분의 단군들도 절반이 없어진다.

 

(6) 기자가 책봉받아 간 곳은 동북방 단군조선이 아니다.

설사 기자가 중국 주나라 무왕의 책봉을 받거나 아니면 스스로 조선이라는 곳으로 갔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동방의 단군조선이 아니다. 사기 38권 송미자세가의 기자자箕子者에 대한 ‘사기색은’의 ‘주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두예가 말한다, 양국의 몽현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杜預云 梁國夢縣有箕子塚).”

이 양국 몽현이라는 곳은 현재 중국 북경 남부의 하남성 상구시 중심부 서쪽을 말한다. 기자가 동쪽, 단군조선으로 왔다는 현재의 동북방 대릉하, 요녕성 지역이 아니다. 이 하남성 상구시 지역은 주무왕 당시 기자의 모국인 은나라 영향권에 있던 곳으로 볼 수 있다. 조선에 봉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곳은 단군조선의 영향권하에 있는 단군조선의 변방지역이라고 보아야한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 또 있다. 3세기경의 중국의 지리지로 알려진 '수경주水經注'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두예가 말한다, 양국 몽현의 북쪽에 박벌성이 있는데 성안에 은나라 탕임금의 무덤이 있고 그 서쪽에는 기자의 무덤이 있다(杜預曰梁國蒙縣北有薄伐城 城內有城湯塚 其西有箕子塚(수경주 권23)."

또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현재 중국 하남성에 있는 개봉지역에 '기자대箕子臺'가 있다고 한다.

"서화는 옛 '기箕'의 땅이다. 개봉부 서쪽 구십리에 있다. 처음 기자가 송나라 기땅에 살았기 때문에 기자라고 한 것이다. 지금 읍 가운데 기자대가 있다(西華 故箕地 在開封府西九十里 初聖師 食宋箕故 稱箕子 今邑中有箕子臺-대청일통지 권172허주)."

▲ 서기1580(선조13)년에 윤두수가 지은 <기자지>에 수록된 기자상이다. 율곡 이이는 이것을 바탕으로 <기자실기>를 만들어 명나라 사신에 준 것으로 알려 졌다. 명나라 사신은 이 책을 보고 감탄하여 명나라에 가서 자세히 알리겠다고 한다.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미개한 조선을 문명개화 시켰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위에서 '서화西華'라는 지역도 하남성 개봉지역에 있는 땅이다. 이 곳이 기자가 살던 옛땅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기자'라는 말도 그 지역의 '기箕'라는 땅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자는 처음 부터 동북방으로 온 적이 없고 하남성에서 살다가 하남성에서 묻혀 기자무덤이 생긴 것이다. 아울러 기자가 살았다는  '서화西華'라는 지명의 '화華'는 중화를 나타내는 화를 뜻한다. 따라서 기자는 한국사람이 아니라 중국의 중화족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비록 기자가 어디로 왔느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기자가 단군조선을 대체하여 단군조선의 전 영역을 차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자봉지는 1백여리, 그 작위는 수위守尉... 동사강목에서 요지 태반이 모두 기자의 봉지라고 하는데 저자의 억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자가...단군왕조를 대신하였다고 하는 것은 촌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단재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외), 박기봉 옮김,비봉출판사,2008. 240쪽).

더구나 ‘한서漢書’에는 “현도군과 낙랑군은 한 무제 때 설치하였다. 대개 조선·예맥·구려 등의 야만적인 오랑캐들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주석에 “여기서 조선은 주나라가 기자를 왕에 봉한 곳과는 다르다”고 했다.(“玄菟·樂浪, 武帝時置, 皆朝鮮、濊貉、句驪蠻夷 … 師古曰史記云武王伐紂, 封箕子於朝鮮, 與此不同.” 漢書 卷 28下-김운회,新고대사: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③기자조선의 진실, 중앙선데이, 2011.1.30.)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그 조선은 동북방의 단군조선지역이 아닌 다른 단군조선 관경이었다는 말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기자가 제후로 책봉받은 곳은 어디란 말인가, 그곳은 앞서 사기에 기록된 데로 현재의 하남성 상구시가 될 것이다. 이곳도 기자 당시에는 양국이라고 불렸으나 이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라고 볼 수 있고 단군조선의 영향권내에 있기 때문에 중국의 사서들은 그냥 통 털어 ‘조선’이라고 했다. 중국사서가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을 통상적으로 ‘동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http://cafe.daum.net/alhc/51qD/526)

여기서 한 가지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기자箕子’ 라는 말은 사람이름이 아니다. ‘기箕’는 나라이름이고 ‘자子’는 ‘제후’라는 관직이름이다. 따라서 ‘기자’라는 말은 ‘자’라는 제후가 다스리는 ‘기’라는 나라를 말한다. 그럼 이제까지 ‘기자조선’이라고 하여 기자가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해 왔는데 ‘기자’라는 제후국을 다스린 제후 이름은 무엇인가, ‘서여胥餘’라고 한다. ‘기자’로 알려진 사람 이름이 ‘서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후인 서여가 기국을 다스렸고, 위 중국 사서에서 중국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거나, 갔다고 기록한 조선은 기국이라는 나라이다. 단군조선의 영향권 안에 있는 기국이라는 나라로 제후로 봉 받아 가서 다스렸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기자조선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 조선을 정복한 기자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변방에 조그마한 땅을 차지한 제후국인 ‘기’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7) 일제의 기자조선 부정문제

일제는 우리나라를 멸망시키고 일제식민통치를 이어간다. 그 목적은 조선인을 모두 일본인화 하여 영원히 흡수하여 일본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열도는 ‘내지內地’라 하고 한땅(한반도)은 ‘외지外地’라는 개념을 두고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요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일본의 역사는 아무리 길어봐야 2천년정도인데 우리의 역사는 무려 5천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열등하고 미개하고 야만적인 조선의 역사가 5천년 이상되었다는 것은 결코 ‘열등, 미개, 야만’ 하지 않다는 것이며 오히려 고도의 문명개화된 민족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이조선 5백년동안 일제가 그리도 욕하고 깔보는 ‘미개,야만,열등’의 역사가 잠시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조선의 역사대국, 문화대국을 통치하려면 폭력과 무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한 일제는 본격적으로 이른바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이것이 이른바 3.1. 독립운동 이후에 펼친 문화정치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결코 5천년 이상 역사를 가진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조선총독부의 역량을 쏟아 붓는다. 그래서 조선사편수회라는 기관까지 만들어 역사가 일본보다 짧은 민족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역사왜곡말살 작업에 들어간다. 그 대상에 명조선이 조작날조해서 오백년동안 기정사실로 확고하게 박아 놓은 서기전 1천년전에 생겼다는 이른바 ‘기자조선’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물론 단군이 개국한 그 이전의 조선에도 손을 댄 것은 당연하다.

▲ 왜구난동기때 서울 남산에 있던 국사당안의 무신도. 왜구는 이 국사당을 허물고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워서 우리의 민족혼을 완전히 말살하고자 하였다. 이 사진은 왜구난동기에 왜구, 무라야마 지준이 남긴 <조선의 귀신>편에 실려 있다. 일제가 비록 우리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우리의 귀신문화를 연구하였지만, 이들이 남겨놓은 자료를 통해서 당시 우리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조사한 기자조선이 정말 실존했다고 보기 어려운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대략적인 이들의 기자조선 부존재 근거는 중국의 서기전후에 나오는 사서들의 모순점이다. 앞서 이미 논증한 서기전의 서경과 사기 그리고 상서대전과 그 후 1백수십년 후에 등장하는 한서에서 주장하는 기자조선기록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앞서 논증한데로 틀리지 않다.

그런데 기자조선 존재를 주장하는 세력은 일본의 이와 같은 기자조선 부정설을 들이대며 일본이 우리의 상고사를 말살하기 위해서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것에 동조한다며 기자조선 부존재를 증명하는 세력을 마치 매국노인양 공격한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과 감정은 다른 것이다. 일본이 우리를 파괴하고 말살하기 위하여 연구한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다는 선입견은 옳지 않다. 일본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연구해 낸 것이 오늘날에 와서 우리에게 옳은 일이라면 수용하여 일본을 공격하거나 기타 우리를 공격하는 적을 타도하는 무기로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은 우리를 원활하게 식민통치하기 위하여 우리의 귀신문화와 무당굿놀이 문화를 당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희귀한 증거를 바탕으로 자세히 연구한 책을 발간해 냈다(‘朝鮮의鬼神’-무라야마지쥰 등).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우리의 조상님들이 어떤 정신세계와 가치관 그리고 뿌리문화를 가지고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자료다. 더구나 중공의 동북공정이 날로 거세지는 이때에 강릉단오제 같은 풍습과 유래를 이들 일본인들이 당시에 연구한 자료에서 뽑아 낼 수 있다면 이처럼 고마운 일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릉단오제는 중국이 자신의 뿌리문화중의 하나로 주장하는 단오인데, 우리가 원조라는 뜻으로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우리가 먼저 등재해놨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북공정을 원천적으로 까부수는 쾌거다.

따라서 일본이 미운 것은 미운 것이고 객관적 사실은 사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기자조선부존재를 증명하는 자료를 발굴해 냈다고 하여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중공이 기자조선존재를 내세워 우리를 다시 침략하여 흡수하려는 망동을 할 때, 일본이 연구해낸 자료를 내세워서 ‘자, 봐라 일본도 명백한 증거자료를 가지고 기자조선의 부존재를 확증하고 있지 않냐, 그러니 입 닥쳐라!’ 라고 반박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씨조선'이라는 말은 일본이 우리를 폄하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용어이니 써서는 안되고 '조선'이라고 불러야 맞다고 한다. 이것은 나라를 팔아먹은 '이조선'의 후예들이 자기 조상들의 폐악을 숨기고 미화하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일본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썼다고 하더라도  '이씨조선' , 또는 '이조선'이라는 말은 역사적인 용어로 정확하게 옳다.

만약에 '이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조선'이라고 부른다면 우리의 단군이 개국한 조선은 '단군조선'이라고 불러야 하며 이것은 마치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는 '환부역조'의 폐륜을 저지르는 것이다. 더구나 역사상 이른바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의 용어가 있고 현재는 이북의 ' 김조선'이 있다. 유독 이씨가 세운 이조선만 '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이제 더이상 '이씨조선'이라는 말이 일제의 한국인 깎아내리기 용어라고 소문을 퍼뜨리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마찬 가지로  일본이 기자조선 부존재 연구를 하였다고 하여 일본이 우리의 역사를 말살한 근거라고 ‘견강부회牽强附會’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11부에서 이어짐).

글: 오종홍(삼태극 http://cafe.daum.net/mookto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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