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정신이 사라진 정권, 망국은 정해진 운명이었다.

영세중립국 선언으로 살 수 있었음에도 국제정세를 잘 못 판단,

적에게 생존비법을 갖다 바치다...

 

(서기19세기말) 열강이 조선을 무대로 침략의 손길을 뻗치고 정부는 돌파구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 때 중립화론이 대두 되었다. 가장 가치 있던 중립화론은 서기1885년 조선에 와 있던 독일 부영사 버들러가 내놓은 영세국외 중립국론이다. 당시 독일은 조선과 국교를 맺은 지도 얼마 안 되고 기타의 이해관계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아시아 정책은 영국과 경쟁하면서 러시아의 남하정책도 꺼리고 있었다. 또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친권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묵인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청나라를 강점하도록 부채질 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조선 문제를 동정하며 공동 보호하자는 태도를 보였다. 버들러는 그의 영세국외중립론에서 청·러·일 3국이 상호조약을 맺어 조선을 영세중립국으로 보호하자고 하였다. 그는 서기1884년 김옥균 반역 직후 일본의 “정성형”이 친권대신으로 조선에 왔을 때 그에게 이 “안”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청국의 이홍장에게도 같은 제의를 하였다.

이 홍장은 이를 자세히 검토하고 천진에서 개최된 청·일 회담에 임했다. 이 협상에서 양측 공동 철병 안이 타결되었다. 버들러의 중립화론이 상당히 영향을 미친것 같다. 영국도 이 안에 호의를 보였다. 그 뒤 대한제국선포이후 정부에서는 중립국 방안을 추진하였다. 서기1900년 8월 29일 황서봉정과 동궁전하에 훈장봉정을 가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특사 조병식은 일본의 “근위독마”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그 회담의 내용은 “근위하산”이란 책자에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그 줄거리는 한국을 중립국으로 하겠으니 중립국제의를 일본이 열강들에게 대신 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일본에 있는 망명자들도 추방해 달라고 했다. 조병식의 이러한 요청에 대하여 “근위”는 한국을 중립국으로 만드는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하고 국방은 일본에 위임하고 내정 혁신에 전념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역설하였다.

같은 해 10월9일 “홍엽관”에서 두 번째 회담을 하였으나 두 사람의 주장은 서로 양보 없이 그쳤다. 조병식이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에 와 있던 러시아공사는 그에게 위협을 주었다고 한다. 다음해 10월에 일본으로 간 한국특사 박재순도 중립국문제를 들고 갔는데 러시아공사의 방해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서기1903년 9월16일 한국 밀사 현영운이 “근위독마” “이등박문” “소촌수태란” 세 사람에게 보낸 칙서를 보더라도 조병식이 주장한 중립화의 취지와 같았다. 이 중립국 제안에서, 만약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한다 하더라도 일본군대가 한국영역을 통과시키지 않도록 부탁하였다. “근위”는 글을 읽고 땅에 던지며 웃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 근위독마(고에노아쯔마로近衛篤摩). 그는 일본제국주의시대 귀족으로서 일본귀족원의장 등을 엮임했다. 신분은 공작계급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 근위문마(고에노후미마로近衛文摩)는 왜구난동기, 3번에 걸쳐 수상을 맡았다.

이와 같이 일본과 러시아와의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한국정부는 그 중립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던 일본은 러시아 함대를 급습하면서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였고 함대는 한국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 우리정부가 좀 더 국제정세에 밝았다면 영세중립국으로 독립을 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립국으로 지위를 확보하는데 필수적인 요건의 첫째는 그 국가가 스스로 중립국으로 선포하고 세계 각국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당시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를 놓고 만주를 러시아가, 한국은 일본이 분할하자고 다투었다. 일본의 제안에 대해 러시아는 부동항을 이유로 38도 이북을 러시아가 차지하고 그 남한은 일본이 점령하자 제안을 놓고 협상하고 있었다. 이 때 한국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세계 각국에 알리고 이 협상이 결렬되면 전쟁이 터지고 아시아의 평화가 깨진다는 것을 널리 공표하여야 했다. 따라서 한반도의 중립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데 그 길은 한국이 영세중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설득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자적인 선언을 하지 못하고 거꾸로 한국 침탈의 야욕을 품고 있는 일본과 러시아에게 이 같은 주장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세력균형의 국제정치이론에 입각한 외교정책을 했어야 했다. 전술한 것처럼 독일이 한국 중립화 안을 들고 나왔으면 우리가 먼저 중립화선언을 하고 독일에게 지지를 호소했어야 했다. 다음으로 영국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비록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한국을 나누어 갖자는 분위기였지만 미국에게도 지지를 호소했어야 했다.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영세중립국 선언을 했지만 시기를 놓친 뒤였다.  결국 영세중립국 선언을 통해서 그나마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길이 있었지만 당시 고종과 위정자들은 기회를 놓치고 망국의 길로 치달았다. 이 영세중립국 방안은 지금도 남북분단과 주변 강대국들의 첨예한 대립의 한 가운데 있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게도 유효하다.

글: 이달순(수원대 명예교수·hello sports.net 발행인)

출처: 수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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