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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분단은 임진왜란 왜구가 처음 획책외세에 의존한 국가운영은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공관 객원기자 | 승인 2020.08.31 20:00

 

글: 공관(북동중아시아연대 중앙위 의장 )

 

왜구 포로 조선인 염사근, 명.일의 국토분할점령 비밀 책동 막아

고니시유기나가와 심유경, ‘조선을 남북으로 분할하여 점령’밀약

염사근이 이를 명나라 황가에 전달-> 복건성 유방예->명 조정

19세기말 청일전쟁, 러일전쟁 거치며 또 남북분할 점령안 대두

미제에 의한 8.15 남북분단확정, 75년 비극의 분단역사 진행 중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 임진왜란을 일으켜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확장했다. 명나라를 치고자 조선 길을 빌리자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했다. 그가 남긴 역사적 후과는 지대하다. 임진왜란으로 우리나라에서 명나라, 일본의 외국군대가 싸웠고 이들이 남북분단을 획책했다. 비록 명 조정을 속이려고 한 것이지만 이후 전개되는 역사에 주술이라도 걸은 듯 결국 우리나라는 현재 남북으로 분단돼 비극의 역사를 겪고 있다. 풍신수길 초상의 왼쪽 팔에 오늘날 일본의 상지이자 일본 극우세력의 소굴, 자민당의 상징문양인 오동나무 잎새가 새겨져 있다(편집인 주). 자료출처: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4/Toyotomi_hideyoshi4.jpg

국가의 생존법. 정보공작의 힘 (2)

한 사람의 중요한 정보가 몇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

임진왜란기 하인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염사근이 명·일의 ‘한반도분할점령’ 비밀책동을 애국 단심으로 막았다. 그는 일본의 정유재란에 대한 정보도 명나라의 사신을 따라 일본에 건너온 조선 통신사 황신(黃愼)에게 알렸다.

나는 현재 남북이 갈라져 있는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굴레를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활로가 무엇인가? 하는 한민족생존전략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20여 년 전에 우리의 활로가 우선 남북한, 동러시아, 몽골, 중앙아시아 5개국의 연합이라고 착목했다.

그 비전을 실행해야 하는 당위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전략정보(National Strategic Information)는 우리 민족의 눈(眼)이다.

한 민족과 국가의 흥망은 그 나름대로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 나라와 민족의 지정학과 역사를 모르고는 미래를 알 수 없다. 알되 바로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나는 여긴다.

임진왜란기 명· 일 첩보전

임진왜란 초기, 명나라는 오르도스에서 몽골인 보바이(哱拜,1526~1592)를 중심으로 일어난 병변(寧夏之役)을 평정하고, 바로 그 군사들을 돌려 조선 전선에 참전시켰다.

명은 조선에 원군을 파병하면서 간첩 심유경(沈惟敬)을 함께 보내 한반도의 전장과 외교를 관리하게 했다.

일본에도 1593년 6월, 황제직속의 비밀경찰 금의위의 사세용(史世用)과 복건의 허예(許豫) 등을 무역상인으로 위장시켜 복건 월항을 통해 일본 규슈의 나고야성 군사대본영에 직파했다.

그들은 복건 순무(巡撫:총독) 허부원(許孚遠)과 연결되어 있는 사쓰마 번주의 의사 허의후(許儀後)의 안내로 일본 전역에 정보망을 구축하고, 적정의 수집과 공작을 펼쳤다.

허의후는 임진왜란 발발 44일 전에 명나라에 알린 장본인이었다.(*1:공관 페북, #■ 국가의 생존법. 정보공작의 힘 (1))

국가 운영에 있어 평시나 전시를 막론하고 정보관리체계의 활발한 작동은 중요하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중 전쟁의 주동권을 시종 장악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본토에서 반反도요토미 히데요시 공작을 비롯해 직접 일본을 공격하는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정무에 태만한, 이상한 황제 만력제(1563~1620, 제위 48년)의 친정체제 아래서도 정확한 정보와 공작에 뛰어난 인재들이 있었고, 그것을 관리하는 국가 정보기구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는 명 태조 주원장 때부터 이어져 온 금의위의 고도로 축적된 조직운영의 비결 덕분이라고 본다.

임진왜란 때 명·일, 한반도를 분할점령지배를 획책

조선을 배제한 가운데, 1593년 5월~6월, 규슈의 나고야성에서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막부와 명나라 간에 강화협정이 진행되었다.

일본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명나라에서는 심유경이 대표로 협상하였다. 그 강화안 7개 조에 ‘대명 황제의 현숙한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는다.’

‘조선을 남북으로 반분하여 서로 점령하기로 한다’ 등의 경천동지할 내용이 있었다.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는 국서를 위조하여 명나라에 제출했다.

‘명나라는 일본의 조공과 상호무역을 받아들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왕으로 책봉하는 선에서 협상이 완결된다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중화체제의 조공 책봉의 외교관례를 표방한 것이다. 그것은 양국을 기만한 것이었다.

한 사람의 중요한 정보가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염사근의 초특급 정보

역사는 우연이 만들어낸 변주곡인가.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측근인 일본 승려 장성(賊僧 長成)에게 모친과 누이동생과 함께 끌려간 조선인이 있었다.

염사근(廉士謹, 廉思謹)(*2, 2-1)이다. 그는 일본의 특급국가비밀을 수집할 수 위치에 있었다. 왜승 장성을 통해서다.

당시 나고야성은 도요토미가 전쟁지휘를 위해 성을 쌓고 주재하고 있었다. 또한 외교와 문서는 문자에 능통한 승려들이 담당했다.

사근과 황가의 우연한 만남과 강화 7개 조

그는 나고야성 부근의 시장에서 중국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邂逅). 중국의 평범한 무역 상인 황가(黄加) 일행이었다. 이 만남은 우리 민족의 명운이 걸린 만남이었다.

복건 월항에서 특급정보공작원 사세용과 한배를 타고 가고시마항에 건너갔던 그들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서 나고야성에 진입했다.

염사근은 그가 입수한 특급정보를 작성했다. 실제의 명·일간의 비밀외교교섭 ‘강화조건 7개 조’가 담긴 협상안이었다. 그것을 사세용에게 전해줄 것을 황가에게 부탁했다. 졸지에 황가는 전달책이 되었다.

하지만 특급정보원 사세용은 이미 일본을 떠나고 없었다. 황가는 이 비밀문건을 개인이 가지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직접 휴대하고 일본에서 중국 복건으로 건너가 복건 천주부에 전달했다. 이는 곧 복건 순안(巡按) 유방예(劉芳譽)에게 전달되어 명 조정에 보고되었다.

이 특급정보를 접한 유방예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상소에 “신이 염사근의 보고서를 살펴보며 머리카락이 곧두섰습니다.”라고 적었다. 중국의 유방예는 염사근을 수재(秀才)라고 불렸다. (*3)

염사근의 비밀정보는 임진왜란기 첩보전에서 최고의 정보였다고 당시 명나라 조정이 인정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특급의 정보였으며, 명나라는 기원전 200년, 한 고조 유방이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백등산 전투’ (중국 산시성 북부 대동(大同)의 참패로 굴욕적으로 맺은 평화조약과 같았다. 명나라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협상안이었다.

결국, 그 협상안은 염사근의 폭로로 결렬되었다. 염사근은 곧 일본의 재침략이 있을거란 정보도 통신사 황신에게 전달했다.

그 정보는 조선조정이 긴급히 명나라에 조정에 알렸다. (4) 이듬해 정유재란이 터졌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전세는 조명연합군의 우세로 기울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한반도를 침략할 것을 알고 방비를 철저히 했으며, 전세가 잘못되었을 때는 명 정부가 공작해 둔 일본본토의 전복 계획을 감행하는 분위가 형성되어있었다.

염사근이 심유경과 고니시의 기만외교의 실상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결과는 그가 준 정보, 협상안 7개 조가 명나라 조정에 폭로된 것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병부상서 석성은 바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었으며, 심유경은 만인이 보는 거리에서 효수되었다.

염사근이 명·일 간의 비밀협상을 폭로한 결과다. 그의 조국을 사랑하는 단심이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꿨다.

명나라 강서 길안 사람으로 1571년 일본에 붙잡혀갔던 허의후는 중국 역사에서 대단한 애국자로 칭송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인의 하인으로 붙잡혀가서, 조국을 지킨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염사근이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폄훼되고 있다(*5).

그뿐만 아니라 그의 공이 사세용에게 돌려지고 있다. 그 배경은 알 수 없다. 통탄할 일이다.

이번에 살펴보면서 알았다. 예를 들면 KBS 역사스페셜 ‘조선에 온 중국 첩보원’(*6) 을 다루었다는 것을.

그 방송에 ‘명의 간첩 사세용’이 명·일 조선분할점령 안을 좌절시킨 장본인으로 각색되었다. 그 방송을 알리는 각 언론사는 KBS의 보도자료를 기사화했다. 염사근의 불후의 공적이 온전히 사세용에게 돌아갔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조선을 배제한 ‘명·일 비밀협상안 7개 조’의 사실 입수와 폭로과정은 염사근 (최초 비밀 제보자) ⟶ 황가 ⟶ 명나라 복건순안 유방예 ⟶ 명나라 중앙정부로 이어진다. 이 부분에 관한 사세용 관련은 내가 살펴본 바론 명·조 사서 기록에는 없었다.

그리고 많은 중국의 논서나 평론에서 그 부분(명·일 비밀협상안 7개 조)에 대한 사세용 언급은 없고, 조선 포로 염사근과 황가와 유방예가 나왔다. 역사적 사료 검토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다. 잘못된 것으로 나는 본다.

사세용이 특급의 정보공작원인 것은 틀림없다. 그는 임란 직후 일본에 잠입하여 90일간 정보공작을 벌이고 복건으로 귀국했다.

귀국과정에 풍랑으로 우연히 유구의 사신을 만나 유구를 경유했다. 그가 탁출한 것은 유구(지금의 오키나와)의 지정전략적 가치를 알아보고 명이 관리할 것을 건의했던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정유재란 때 명군의 참모로 조선에 파견되어 명나라를 위해 활약했다. 선조를 만나 『왜정비람(倭情備覽)』이란 일본정보서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선조실록은 전한다.

나는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의 사견(史見)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추후 검정이 필요하리라 본다.

임진왜란이 남긴 우리의 역사와 동북아 세력전

외세에 의한 한반도 분할점령론은 임진왜란 때에 처음 시작되었다. 그 후 300여 년이 지난 격동의 19세 말, 청일전쟁 전에는 한반도중립화론이, 러일전쟁 전에는 임진왜란 때와 같이 우리를 배제하고 러·일간에 만주를 두고 한반도중립화론과 함께 남북분할점령안이 다시 거론되었다.

지금 우리는 외세에 의해 동족끼리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 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망국과 분할지배를 막은 데는 명나라의 정보전략정책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나는 판단한다.

임진왜란은 그 후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 중국 대륙에서 300년 넘게 지속된 왕조는 드물다.

명조 말기에 한반도에서 왜란이 터졌다. 우리의 고토 만주에서 여진족이 떨치고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청나라는 중국 산해관을 넘기 전에 우리를 누르기 위해 군사침략을 감행했다. 병자호란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몽골 고원을 합병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중국대륙을 차지했다.

임진왜란이 우리 민족사에 미친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재조지은(再造之恩:조선을 다시 만들어준 은혜)이란 언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우리에게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은 임진·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외골수 성리학과 함께 더욱 깊어 골수에까지 박히게 된 것이다.

그런 정신문화에 바탕을 둔 외교정책은 현실에서 펄펄 살아있는 국가인 여진의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망해 없어진 나라임에도 위패 속의 명나라만을 인정하는 배청숭명(背淸崇明)으로부터 친일, 숭미, 친중으로 무의식중에 경도되어 사회적 분위가 되었다. 우리의 주체적 사관이나 국가전략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로 취급되기 일 수다.

참고

(*1:공관 페북, #■ 국가의 생존법. 정보공작의 힘 (1))

(*2: 『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 11월 10일 임인 2번째 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긴급한 왜적의 형세에 대해 중국에 보내는 주문 朝鮮 國王, 爲緊急倭情事:))

(*2-1:大東野乘 재조번방지 4(再造藩邦志四)

(*3:『跨境人员、情报网络、封贡危机:万历朝鲜战争与16世纪末的东亚』 郑洁西 著, 上海交通大学出版社, 出版日期:2017.

http://reader.epubee.com/books/mobile/55/5593d730c3448428f53dd306826b1d21/text00006.html )

(*4: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 11월 10일 임인 2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긴급한 왜적의 형세에 대해 중국에 보내는 주문. 朝鮮國王, 爲緊急倭情事:)

(*5:大東野乘 재조번방지 4(再造藩邦志四)

(*6:KBS 역사스페셜 ‘조선에 온 중국 첩보원’ 방송:2012.07.12.10:00.

https://www.youtube.com/watch?v=kQjgA9xDvNU&t=377s

2020.08.23.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때, 인릉산 아래 누실에서. 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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