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개국과 통치바탕이 된 성리학, 조선을 망국으로 이끄는 폐쇄주의로 변질되다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탄생한 노론, 망국과 매국 소굴이 되다

병자호란 당시 지배세력의 난맥상, 오늘날도 다르지 않게 되풀이 되다

스스로 주인이기를 포기한 사대주의, 기득권 지배세력은 호의호식,

그들을 떠받치는 민생은 죽지 못해 사는 처지로 전락하다

글: 이 병 권(시민기고가)

 

이 영화는 김훈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병자호란이 발발한 1636년 12월 14일 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47일 동안 남한산성에 대피한 인조 정부 내의 치열한 노선투쟁과 처절했던 당시 모습과 무능한 정부의 부끄러운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영화입니다. 이 책을 읽었던 당시, 그 먹먹하고 암담했던 기억이 떠올라 쉽게 영화관을 찾지 못했습니다. 백성은 없고, 허공에 맴도는 말만 무성했던 그 통한의 시간을 다시 떠올려 우리네 한심했던 조상들을 다시금 도마 위에 올리는 것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남한산성의 47일은 이후 조선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변곡점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 역사에 너무도 많은 영향을 미친 까닭에 스스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객석에 앉기로 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은 무엇을 남겼는가?

흔히들 조선은 '철학의 왕국'이었다고 합니다.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다양하고 치열한 철학 논쟁과 통섭을 한 것이 아니라, 딱 한 가지 성리학 내의 주기와 주리를 둘러싼 논쟁만 존재합니다. 퇴계와 율곡에서 발화된 이 논쟁도 조선 후기에 가면 사실상 그 차이조차 불분명해 집니다.

고려 말 개혁 사상으로 도입되었던 성리학은 정도전, 권준 등을 중심으로 토지개혁과 권문세족의 혁파를 이루어낸 혁명사상이었습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 사대부들은 과거 그 어느 계층 보다 논리, 철학, 재생산구조가 탁월했지요. 항시 명분을 중시하였기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임금과 지배계층의 잘못을 질타하고 스스로가 '군자'가 되어 '덕' 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이상 국가를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사대부, 선비는 무릇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충'과 '효'로서 국가사회의 근간을 튼튼히 하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에서 발견하는 조선 성리학은 딱 거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그 진면목이 나타나고 한 시대의 사상이나 체제의 탁월성 역시 국가 위기상황에서 판가름 됩니다. 로마는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원로원 귀족들이 솔선수범 하여 ‘노블리제 오블리주’를 실천해 제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아 기마민족의 침입을 막으려 했으나, 미봉책 이었을 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시기 로마는 세계로 길을 내어 세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역사에서 개방과 포용으로 나간 민족과 국가는 대부분 성공 했으나, 닫아걸고 다양성을 부정한 독선의 길은 대부분 패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조선의 성리학은 다양성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상실한 채 독선과 아집을 선택함으로써 더 이상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추동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남한산성 북문. 병자호란 당시에도 저렇게 흰눈이 내린 한겨울이었다. 사진출처: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문화제

성리학-지배자의 교리

조선 중기가 지나면서 조선 건국 때 단행되었던 토지개혁은 물거품이 됩니다. 각종정변에 뒤이은 공신전들이 난립하면서 대거 토지 겸병과 집중이 일상화 되고, 조세와 국방의 의무에서 배제된 양반님들 덕택에 양민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게 됩니다. 양반사대부는 지배계층, 수탈의 주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성리학은 유학의 유파 중에서도 권위와 명분을 가장 강조합니다. 주자 이후 4서3경 이외의 새로운 경전은 허용 하지 않았습니다. 주자의 성리학을 완성체로 보았기에 이후 유학의 과제는 수행심화에 있었지 결코 새로운 유학의 출현에 있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도그마(교리)의 단초가 마련된 것입니다. 이는 곧 철저한 지배이념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양반들의 조세와 군역 회피를 정당화 하고 일반 양민들에게는 끝없는 충성만을 강요하는 사회질서, 그 질서의 중심이 바로 성리학 체제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상과 현실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상은 옳은데 시대가 문제이었다고 하거나 사람이 문제였다는 주장은 사실상 궤변이라고 봅니다. 사상과 철학은 바로 그 한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대정신이라는 것도 시효가 있는 것이고,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옳고 진리라고 주장되는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입니다. 의심이 필요 없는. 조선의 성리학이 그런 종교가 된 것입니다.

양반, 사대부만을 위한 종교

종교는 의심을 배척합니다. 이단으로 처단합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성리학이 그랬습니다. 충의 대상은 자신들의 종교를 창시한 중국 한족인데 당시로서는 명나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은 스스로 명나라 제후국이라 칭했으므로 중국에서 오랑캐로 칭한 모든 민족, 성리학 지배질서를 모르는 모든 국가는 모두 무지하고 문명을 모르는 금수와 같으니 천시하고 경멸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조선 성리학자들, 특히 인조반정(1623) 이후 집권한 서인들이 이후 숙종 6년(1680) 경신환국을 계기로 노론으로 중무장 하고 사유 없는 성리학, 종교로서의 성리학을 완성했습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흔히 접하는 '사문난적' 이란 용어도 조선 후기 노론세력이 자신들에 반대하는 자들을 탄압하는 전형적인 단죄의 틀입니다. 당시로서는 '학문을 더럽히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 이란 뜻이었지만, 서기21세기 한국에서는 '빨갱이'라는 말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고 보입니다.

저는 여전히 궁금합니다. 조선의 성리학이 그 시대 나라와 백성의 삶과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국난이 닥칠 때 버팀목 역할을 하였는지, 계속 질문하고 답을 찾을 것입니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다른 길

소설과 영화 <남한산성> 의 주인공은 당연히 최명길과 김상헌입니다. 영화에서 최명길(1586~1647)은 청에 대한 주화파, 김상헌(1570~1652)는 척화파를 상징합니다. 영화와 실제 모두에서 청나라와의 화친(사실상 항복)을 주장한 최명길은 철저히 소수자였습니다. 남한산성 내에서도 최명길은 자신의 화친론으로 인해 끊임없이 매국노로 탄핵되었고,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이고 어버이와 같은 명나라에 등을 돌렸다는 이유로 은혜를 모르는 자로 조선조 말 까지도 지탄받았습니다. 영화에서는 김상헌의 강경 척화파가 명분도 있고 자존심도 세우고 오히려 청나라와 강화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논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척화파는 백성이 아닌 자신들만의 명분만 중시했을 뿐, 현실인식과 국가이익 측면에서 쓸모가 없었습니다. 마치 이승만이 입으로만 북진통일을 외치다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긴 것과 유사합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마지못해 파병한 것을 두고 극진히 숭상한 서인들의 눈에 백성과 국가의 안위는 없었습니다.

병자호란 뒤 최명길과 김상헌의 길은 또한 갈립니다. 애초에 최명길은 인조반정에 적극 참여하여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이후 고속 승진하여 병자호란 당시에는 이조판서를, 병자호란 뒤에는 죄의정과 영의정을 두 차례나 지냈습니다. 인조가 가장 신임한 중신이었습니다. 그는 병자호란 이후 자청하여 청과의 어려운 외교문제들을 목숨 걸고 해결했습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규모로 공격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파병을 거듭 요구했습니다. 이에 최명길은 자청하여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심양으로 가 조선이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것과 파병은 다른 문제라고 버텼다고 합니다.(1637) 당시 청나라 황제는 화를 내고 가두었으나 곧 방면하고 최명길의 의기를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최명길은 현실주의자 였습니다. 그는 명나라가 비록 망해가지만 관계를 이어가고자 승려, 독보를 보내 명과 교섭하였는데 이것이 청에 발각되어 심양으로 압송되기도 했습니다.(1640)

그곳 심양에서 최명길은 앞서 끌려온 김상헌을 만나고 다음과 같이 시를 나누며 묵은 감정들을 씻었다고 합니다.

"이제야 서로 의 우정을

되찾으니, 문득 백년 의심이

풀리는구나 (김상헌) "

“그대의 마음은 물 같아

끝내 돌아가기 어렵지만,

내 마음은 둥근 고리 같아

때로는 돌아간다오 (최명길) "

최명길은1645년, 소현세자, 김상헌, 이경여 등과 청에서 풀려나 귀국합니다.

최명길의 고군분투

최명길은 병난 이후 청과의 외교문제 중 특히 청에 끌려간 여인들 포함 조선 포로문제를 해결하고자 각별히 진력하였습니다. 1637년 인조의 허락을 받아 은을 갖고 대규모 포로 석방을 위해 전심전력했다고 합니다. 또한 민간의 개별 상환작업도 청의 협력을 얻어 상당히 진척시켰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조선인 수천 명을 귀국시켰다고 합니다. 청에 끌려간 수만 명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에 불과하지만 당시 조정에서 최명길만큼 포로석방에 발 벗고 나선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최명길이 관심을 갖고 주창한 또 하나의 병자호란 후 수습책 중 하나가 이른바 '환향녀 속환과 이혼 불가론' 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에 끌려갔다가 속환된 여인들이 '환향녀'라고 불리며 버림 받고 심지어 이혼 당하는 병폐를 막자는 취지의 내용입니다. 당시 사대부들은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인들에게 명분과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고 전쟁책임을 물었다고 합니다. 최명길은 이러한 사대부들의 몰염치를 바로잡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은 최명길의 이러한 노력을 반대했습니다. 책임질 줄 모르는 사대부의 민낯입니다. 일제 위안부 문제와 겹쳐지는 대목입니다. 욕으로 쓰이는 '화냥년' 이란 말이 병자호란 후에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아녀자들을 부르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입니다.

최명길은 대동법도 추진했습니다. 대동법을 시행코자 했으나 이 역시 서인들의 반대로 무산 되었습니다. 대동법은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 내린 경제개혁 방안입니다. 소유한 토지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매기자는 취지의 법인데 당시 기득권자의 이익에 반했습니다. 오늘날의 공정거래법과 종합부동산세를 합친 것 보다 더 강력한 법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병자호란 때, 인조정권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에 항전하다 결국 항복했다. 송파구 삼전도에서 항복의례를 행했다. 그 때 세운 대청황제공덕비, 일명 삼전도비다. 청나라 만주글, 몽골글, 한문 3개 국어로 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쓰러져 있는 것을 일제가 바로 세운 것이다.

 대안과 책임

같은 서인이었지만 이렇게 최명길의 행보는 달랐습니다. 정치인은 정책을 제시하고, 그 실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최명길의 정책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생각저변이 다른 서인들과 달랐음은 분명합니다. 최명길은 성리학으로 출발 했으나 양명학을 두루 섭렵 했고, 기학과 무예와 병법에도 능통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에서 양명학은 같은 유학의 일파였지만 성리학에 비판적인 입장 때문에 이단시 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최명길도 독학을 하였다고 합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이후 병난의 수습과 개혁에 매진 한 책임지는 정치가 였습니다. 그는 청과 담판이 결렬되면 청에 의해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유언장과 관까지 준비해 심양으로 갔다고 합니다. 목청껏 척화를 주장하다 청에 머리 조아리기 바빴던 그 서인 노론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안동 김 씨 일문의 창시자 김상헌

1645년 청에서 풀려나 귀국한 김상헌은 1652년 작고 할 때까지 이렇다 할 정치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심양에서 귀환하기 1년 전인 1644년 하늘 같이 떠받들던 명나라 멸망하고 오랑캐의 나라 청이 대륙을 통일했으니 그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74세 되던 해에 명나라가 망하자 시를 써서 심정을 드러냈는데 그의 완고한 척화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지난 날 사신으로 입조해 빈객이 되니

바다 같은 황제 은혜 신하에게 미치었네

하늘과 땅이 뒤엎어진 오늘을 만나니

아직 죽지 않아 부끄럽게 의를 저버린 사람이 되었구나"

이 글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조국과 백성에 책임지는 정치인이 아니라 사대의 대상인 중국 명나라의 충실한 신하였습니다. 이러한 김상헌의 충실한 사대주의는 그의 제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의 핵심기치로 계승됩니다. 조선이 망할 때 까지 그의 이름은 '숭명배청'의 상징이 되었고 인조 이후 왕들은 노론에 의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상헌을 기려야 했습니다. 김상헌의 자손들은 훗날 조선을 망조로 이끈 세도정치의 상징, 안동 김 씨입니다.

김상헌의 양자였던 김광진은 세 아들, 김수종, 김수홍, 김수항을 두었습니다. 또 3남 김수항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김창섭의 장남 김재점이 세도정치의 시조인 김조순입니다. 김상헌의 자손들 모두가 노론의 핵심 세력이었고 영의정을 비롯한 조정의 주요 관직을 독차지 했습니다. 김상헌도 인조반정의 공신이었으니 노론의 시작에서 끝을 이끈 노론의 대표선수 집안이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최명길의 후손들은 소론의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나라 팔아먹은 노론

조선을 일제에 팔아먹은 노론의 마지막 영수가 이완용이었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눈여겨 볼 것은 이완용 개인이 아닌, 노론전체가 매국에 가담해 그 공로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자랑스럽게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1910년, <조선사편수회> 가 발간한 「조석귀족약력」에 따르면 작위 수여자 총 76 명의 조선인 이 있습니다. 소속 당파를 파악할 수 있는 64명 중 88%에 해당하는 56명이 노론 소속이었습니다.(이덕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221쪽 참조) 왕족과 나라의 대신들이 합심해 팔겠다는데 그 무엇인들 팔지 못하겠습니까.

이완용의 매국의 변이 아주 걸작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중국에 사대해 왔는데, 이 제와서 그 사대의 대상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앞서 김상헌이 명의 몰락을 애도하며 명 황제의 신하로 지칭한 것과 비교됩니다. 300년의 전통에 빛나는 노론 사대주의 대단하지 않습니까. 지난 5월 초까지 대한문 앞에서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를 흔들며 '박근혜 무죄'를 주장한 그들도 이렇게 강변 할지 모릅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중국에 사대했고, 일본에도 했는데, 세계 제일인 미국에 무조건 사대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

식민사학자들이 언급조차 피하고 싶어 하는 것

바로 노론입니다. 인조반정 이후 300년이나 권력을 유지한 노론 세력을 연구한 책이 얼마나 있는지 알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이주한 선생이 쓴 「노론300년 권력의 비밀」 (2012) 한 권 밖에 없습니다. 연구서로 단행본은 이것 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역사학계가 담합하여 연구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화 <남한산성>은 우리에게 이제 좁은 산성에서 나와 역사의 광장에서 더 많은 사유를 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사유하지 않거나 사유를 막고 주어진 사고의 틀만 을 고집한다면 자존도 없고 남의 생각 틀에 기대는 사대주의가 자라날 수밖에 없음을 영화<남한산성>이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화 <남한산성>은 오늘날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