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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神統이냐, 혈통血統이냐선조의 적자 영창대군, 세상에 나와 8년을 살다 비명에 가다.
오종홍 기자 | 승인 2018.03.11 23:55

 

李조선 왕조,

능력을 무시한 후계자 결정, 피를 부르다

유교 성리학 이념과 명분론에 사로잡혀,

장자세습, 적통 고집하다, 비극 왕조사 거듭 자초하다

세상에 나온 지 8년 만에 비명에 간 영창대군,

가부장 장자세습, 혈통 고집의 희생양이었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산106번지에 위치한 영창대군 묘. 영창대군은 세상에 나온 지 8년 만에 비명에 갔다. 당쟁에서 촉발된 권력투쟁의 희생양이었다는 풀이가 우세하다.

날씨가 추웠다. 아침이라서 더욱 그랬다. 서기2019.03.10. 아직 겨울 날씨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경기 안성 죽산면 매산리 산106, 영창대군 묘역이다. 그래도 대군에 맞는 대우를 해주었는지 일반 산소와는 달랐다. 묘에 둘레돌이 있었고 주변 석물들이 달랐다. 비석도 달랐다. 특히 상석과 묘 사이에 비석이 하나더 버티고 서 있었다. 무슨 사연이 더 있는 것 같았다.

더욱 특이한 것은 묘 왼쪽 오른 쪽으로 동자석상 둘이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사람은 지금까지 경험한 것을 떠 올리는 연상 작용의 명수다. 동자석상을 보고 불교 탱화나 그림에서 자주 눈에 띄는 도교 풍의 동자가 떠 올랐다. 머리 양쪽에 둥그런 상투까지 있으니 더욱 도교 풍이라고 내심 확신했다. 그런데 답사를 인도하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김병기 박사 설명을 듣고 나서 이런 상상이 산산조각 났다. 영창대군이 8살에 비명에 갔기 때문에 사후에라도 어린 영창대군과 함께 놀아줄 어린 동자신을 묘 좌우에 설치했다고 한다.

영창대군은 말이 대군이지 대군 노릇 한번 하지도 못하고 죽었다. 8살에 죽었다고 했으니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가 죽은 것은 병들어 죽은 것도 아니다. 또 자연사 한 것은 더욱 아니다. 그는 죽임을 당했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살해되었다.

이성계 조선 왕조사를 들여다보면 참 슬픈 일들이 역대 다른 왕조보다 많이 일어났다. 물론 <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기록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유난히 지금 상식으로 보면 너무나 잔인한 골육상쟁과 권력쟁탈전에 희생된 왕과 왕자들의 역사가 잊혀지지 않는다.

▲서기2018.03.10.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이조선 선조 아들, 영창대군 묘역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가 이끄는 역사답사가 이날 경기도 안성시 일대에서 있었다. 김병기 박사에 이어 이덕일 소장이 영창대군에 얽힌 당시 역사 상황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영창대군 죽음이다. 8살에 죽었으니 그에게는 세상이 온통 무한한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때였다.

그렇다면 여느 소년들처럼 멀쩡했던 그가 왜 죽임을 당한 것일까. 때는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왜군 앞에 왕조 사직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었다.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나라를 버리고자 했다. 다행히 서해 유성룡의 목숨 건 간언으로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위기를 넘겼다.

이때 만약 사태를 대비해서 조정을 나누어야 한다는 분조론이 고개를 들었다. 선조는 당시 가장 영민하고 능력이 있던 광해군을 서둘러 선조 뒤를 이을 세자로 세웠다. 이렇게 안정되게 조정이 나누어 움직였고 국제전 양상을 띤 전란이 여러 가지 국내외 변수가 작용하여 끝났다.

그런데 선조 뒤를 이을 후계자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본 부인인 정비 인목왕후에게서 왕자가 태어난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서기1606년에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14명의 자식들 가운데 유일한 적자였다. 선조는 마음이 영창대군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이미 광해군으로 세자가 세워진 상태였음에도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자꾸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선조는 영창대군이 3살 때인 서기1608년에 세상을 떠난다. 선조가 아무리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세우고 싶었다 해도, 공식절차를 거쳐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다시 세우지 않은 이상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선조가 살아 있을 때부터 영창대군을 미는 세력이 문제였다. 더구나 선조는 죽기 전에 영창대군을 잘 보아 달라는 유시까지 이들에게 했다. 유영경柳永慶을 비롯한 소북파小北派가 이들이다. 선조 사후 광해군이 왕이 되었음에도 영창대군을 밀고 있는 소북파와 광해군 편의 대북파 大北派가 대립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대북파의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한다는 역모를 만들어 냈다. 이것을 ‘7서의 옥’이라고 전한다. 이에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폐된다.

그러나 이는 언제든지 살아날 불씨여서 결국 영창대군은 살해된다. 그가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로 전한다. <광해군일기>에서는 굶겨죽였다고 한다. 또 영창대군을 방에 가두어 놓고 못 나오게 막고 아궁이에 불을 때 방안에서 쪄 죽게 했다고 한다. 반면에 <인조실록>은 음식물에 독극물을 넣어 독살 시켰다고 전한다고 한다.

이 사건과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세력이 각각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다를 것이다. 죽임 당한 과정에서 보이는 잔인성이 너무 다르다. 이는 그가 권력 희생양이었음을 보여준다. 소북파와 대북파라는 당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는 당쟁의 희생양이었다. 이조선의 당쟁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고 기간도 제일 길었다. 무려 3백년 이상 지속되었다. 나라가 망할 때 까지 이어졌다.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김병기 연구위원이 영창대군에 얽힌 전반 내용을 설명하고 이다. 그는 예전에 상석위에 사탕이 놓여 있었다고 소개했다. 죽은 영창대군이 어린나이 였기 때문에 어린애들이 좋아하는 사탕을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풀이했다.

붕당정치로 포장된 이조선 당쟁은 서기1575년(선조 8년), 관리 선발, 추천권 등을 가진 이조전랑직을 누가 차지 할 것인가를 놓고 촉발되었다. 심의겸 파와 김효원 파로 나누어 다투었다. 심의겸이 서울 서쪽에 산다하여 서인이라고 했다. 또 김효원은 서울 동쪽에서 산다하여 동인이라 불렸다. 이렇게 시작된 당쟁은 서인은 다시 노론, 소론으로, 동인은 남인, 북인 등으로 계속 핵분열을 거듭하여 나라가 망할 때 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조선 말에는 집권당인 노론이 나라를 일제에게 팔아먹고 친일매국노로 기득권을 지켰고 해방 후에도 친일부역자 청산이 무산되어 우리나라 주류세력이 되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역사학에서 특히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식민사학 후예들로 밝혀지고 있다.

영창대군 묘는 원래 현재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아래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시절인 서기1971년 현재의 경기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로 이장되었다. 신도시를 개발한다는 명분이었다. 성남시를 개발하면서 개발지역에 영창대군 묘가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 이유다. ‘잘살아보세’라는 구호아래 무자비한 개발논리에 따라 박정희 정권 당시 수많은 우리 고유, 전통문화재가 사라졌다. 영창대군 묘도 이런 당시 분위기를 알면 왜 이장되었는지 가늠이 된다.

그런데 묘라는 것은 조성될 때 장소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무렇게나 아무데나 조성하지 않는다. 특히 왕족무덤은 더욱 그렇다. 풍수지리개념이 유난히 발달한 우리나라의 경우 묘를 조성할 때 여러 가지를 따진다. 남한산성 아래 영창대군 묘를 조성한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무시하고 안성시로 옮겨 만들어 놨다. 그러니 영창대군은 죽어서도 찬밥신세다. 영창대군 묘역을 둘러보는 내내 똥과 오줌이 뒤 섞인 정화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같이 간 한 분이 이 지역은 소와 돼지 등 축사가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밀집해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아무리 정화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축시설이 하도 많기 때문에 분뇨 냄새를 막을 수가 없다고 했다. 영창대군은 이렇게 죽어서도 지옥을 해매고 있다.

▲영창대군 묘 오른쪽에 세워진 비석이다. 다른 이조선 왕족이나 유학자들 비석에서도 보이듯이 이 비석에도 처음에 유명조선有明朝鮮이 나온다. 유명조선은 중국 명나라의 소유, 조선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때를 명나라 황제 연호를 기준으로 잡고 있다. 우리 자체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중국 시간에 맞춘 것이라는 지적이다. 당시 이조선 왕조와 유학 집권세력은 명나라에 기울어져 있었다. 자주사관이 아닌 중화사대주의 사관으로 왕조를 이끌었다. 지금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일항쟁기에는 친일부역, 조선총독부사관에서 현재는 숭미사대와 중화사관이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단재 신채호 같은 자주사관을 파시즘, 국수주의, 민족주의, 사이비역사학, 유사역사학으로 매도, 낙인찍는다.

영창대군의 죽음에는 당쟁 외에 보다 뿌리 깊은 이유가 도사리고 있다. 가부장 문화가 지배하는 적통, 장자 세습풍토다. 이조선 왕조사를 보면 적통에다 장자가 왕을 이어야 한다는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장자가 아무리 허약하고 무능해도 일단 왕위를 잇게 하려는 고집이 역력하다. 또 능력을 무시하고 왕이 자신이 총애하는 왕자를 세자로 삼는 것을 본다. 능력자, 신통神統 보다는 혈통血統을 고집한 것이다.

그래서 후계자에 밀려난 능력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무리해서 왕위를 차지한다. 태종 이방원이 그랬다. 세종 둘째 아들 수양대군, 세조가 그랬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생명들이 피를 뿌렸다. 영창대군이 살해된 것도 이런 눈으로 보면 정확한 실상이 드러난다. 선조는 능력보다는 적통, 적자를 고집했다. 그래서 결국 영창대군은 자신을 가장 아끼는 아버지, 선조에게 살해된 셈이다.

이런 후계자 세습 문화는 단군조선이나 흉노, 오환선비, 돌궐족 세습 문화와 정반대라고 할 만큼 다르다. 먼저 <삼국유사> 고조선기를 보면 이른바 '단군신화'가 나온다. 단군조선이 들어서기 전에 신시 배달국 이야기가 나온다. 신시 배달국을 일으킨 이가 한웅천왕(桓雄天王)이다. 한웅천왕이 신시를 열기 전에 한국(桓國)이 있었다.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해 옛날에 한국의 한인(桓仁)에게 서자한웅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서자庶子는 이조선의 적자에 대비되는 서자, 서얼이 아니다. 여러 왕자들 중에서 신통 즉 후계를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능력자를 말한다. 서자가 적자 반대 개념이 아니라는 흔적은 중국 주나라의 <예기禮記>에서도 발견된다.

▲어린 영창대군을 위해 저승에서 친구하라고 묘 앞 양쪽에 동자석상을 세워주었다. 사진 오른 쪽에는 세월 녹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상석과 받침이 시커멓게 변해 자리하고 있다

단군 조선의 경우 <단군세기>에도 이러한 전통이 나온다. 장자, 적통 계승을 고집하지 않는다. '왕검' 계통이 아닌 다른 세력이 단군지위를 잇는 것이 보인다. 대표 사례가 양가羊加와 우가牛加다. 조선(단군)은 삼한관경체제로 다스렸는데 구성세력을 보면 오가五加 체제 속 64족이라고 했다. 4세 구을단군에 이르어 기존 혈통 계승을 뒤엎고 처음으로 양가에서 단군을 잇는다. 이렇게 혈통이 아닌 신통 중심으로 이끌어서 인지 <단군세기>는 조선(단군)이 2천년이 넘게 왕조가 이어졌다고 전한다.

또 흉노, 돌궐 등 앞서 밝힌 북방유목 왕조들도 전해오는 신화를 보면 능력자, 적합자를 후계자로 내세우고 있음이 드러난다. 특히 후계자 후보들 사이에서 활쏘기 내기를 해서 가장 잘 맞추는 자가 왕이 된다. 중국 사서에 나오는 북방 유목 민족 국가가 우리와 친연성이 아주 강한 것을 볼 때, 능력자, 곧 신통문화가 원래 우리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조선 왕조사에서 보이는 장자, 적통 계승 문화는 공자 유교가 들어선 이후에 나타나는 데 중화 풍습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金조선은 어떤가. 김조선은 사실상 왕조국가 성격을 띠고 있다. 3대 세습을 하고 있다. 또 왕조국가에서 보이는 모습 그대로다. 왕은 범접할 수 없는 하늘과 같은 존재라는 점에서 둘은 같다. 김정일 시대에 김조선 장자, 적자는 김정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김정은을 후계자로 세웠다. 그것도 첫째 부인 소생이 아닌 다른 여인이 낳은 서자 격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선택했다. 더구나 친형인 김정철도 배제되었다. 혈통이 아닌 신통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불과 수개월 전 까지만 하더라도 전쟁이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지금 남북정상회담을 넘어 북미정상회담까지 오가고 있다. 지금 김정은이 하는 것을 보면 김정일의 선택이 아주 잘 못된 것 같지는 않다. 민족사에 북풍을 넘어 '폭풍'이 몰아치는 형국이다. 6.25남침 작전명이 '폭풍'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영창대군 묘에는 다른 묘에서 잘 보이지 않는 특이한 구조가 보인다. 묘와 상석 사이에 비석을 세워놓고 있다. 이 비석은 아마도 처음 묘가 조성될 때 만들어진 것일 것이다. 비석 앞면에는 영창대군이라는이름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영창대군을 매장한 때와 비석을 세운 때가 나와 있다.

오늘날 가부장 적통, 장자문화는 대한민국을 좌우하는 재벌세습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능력자, 전문경영인보다는 내 아들, 장자에게 기업을 상속시키려는 대기업, 재벌들의 노력을 보면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하나님'의 성소이며 분신이라고 하는 미국산 교회들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풍토가 자리잡아 가고 있다. 특히 초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국가 경쟁력, 공동체 경쟁력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 능력보다는 혈통, 장자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박근혜-최순실 문제로 이재용이 감옥에 가자, 삼성전자 주식가격이 가파르게 올랐다. 이 같은 사실은 신통이냐, 혈통이냐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이날 묘역에서는 이조선 왕조사 왕위계승과 관련해서 예리한 풀이가 선보여 신선했다. 김병기 박사에 이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이 영창대군과 전후 사정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선조의 무능과 관련해 이조선 왕조를 꿰뚫고 있는 한 흐름을 상기시켰다. 선조는 당시 까지 내려오던 선대 왕의 직계가 아니었다. 방계 왕족이었다. 그러다 보니 급하게 왕위에 오르느라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 소장은 왕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한 왕들이 있는데 모두 방계 왕족이었고 이들이 왕이던 때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거나 망했다고 풀이했다. 선조, 인조, 고종이 그렇다고 했다. 날카로운 분석이었다.

▲묘와 상석사이에 세워진 원래 비석이다. 뒷면에 '천계天啓 삼년 閏윤 십월 정유丁酉일에 장사지냈다', '천계 오년 삼월 병자丙子일에 비를 세웠다'고 쓰고 있다. 천계는 명나라 희종 연호다. 재위기간은 서기1621-1627년으로되어 있다. 이 때는 이미 청나라가 들어선 상태였고 서기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집권한 시기이기도 하다. 천계 3년에 장사지냈다고 했으니 서기1624년이다 광해군이 쫓겨난 직후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 재위시에는 역적으로 몰릴까 무서워 묘조차 제대로 꾸미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답사일행이 모두 내려간 자리, 홀로 남아 묘와 상석 사이에 버티고 있는 낡은 비석 머리를 유심히 보았다. 누군가 오래전에 왔다 간 흔적이 보였다. 색이 진하게 바랜 10원짜리 동전이 비 용머리 조각 패인 곳에 놓여 있었다. 동전을 놓고 복을 빌었을까, 영창대군의 비운을 슬퍼하며 저승가는 길에 노자 돈으로 쓰라고 놓고 간 것일까. 다음 답사지 죽주竹州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서기2018.03.역사답사-역사기행1). 답사신청: 02-711-1379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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