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 허위의 집안 신민회, 서로군정서 활동,왕산 허위는 을사늑약에 이어 고종황제 강제퇴위,정미7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하는 국란이 연이어 일어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지체높은 지위를 버리고'13도 창의군' 군사장, 총대장으로 전국의 의병을 지휘하다왕산을 심문하했던 일본 주차군헌병사령관 아까시 겐지로(明石元二郞)는그의 인품과 식견에 탄복을 금치 못했고 이등박문을 척살한 의사 안중근은왕산을 일컫어 고관 중의 충신이라 기리다 생각컨대 구한말 고위관료이자 항일의병장인 왕산 허위 (旺山 許蔿)선생은
글: 공관 (북동중앙아시안연대 한국위원회 중앙위 의장) 보석 원석을 주니, 다이아몬드로 만들어 오란다. NECAS의 기록(20)관료들의 무사안일과 정부 핵심의 역사의식 부재로몽골과 한반도 1.3배가 넘는 동몽골 합작 개발 좌초 서기2005년 3월이었다. 한·몽 국교수립 15주년을 맞아 몽골 외교장관 뭉흐오르길이 방한했다.한국 외무부 장관 반기문의 초청이었다.그는 반 장관에게 '동몽골공동개발'을 제안했다. 반 장관은 DOEM안의 제안 배경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서, 몽골 정부의 DOEM 개발제안을 요구했다고 한다.우리
서기1911년 1월 엄동설한 망국 백성으로압록강을 건너는 석주 이상룡의 통곡소리,“나라는 공적재산, 권리는 목숨,그 공적 재산을 빼앗겨도 애석하게 여기지 않고목숨이 끊겨도 아프게 여기지 않으니,이러고도 나라에 백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삼천리 땅에서 살아가는 이천만 동포즐거운 낙토 우리부모의 나라를지금은 그 누가 차지해버렸는가.나의 밭과 집을 벌써 빼앗아갔고거기에다 다시 내 처자마저 넘보나니차라리 이 머리 베어지게 할지언정이 무릎 꿇어 종이 되지 않으리라.” 석주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는백성이 곧 나라의 주인인 것을 바탕으
글: 최병선(자유기고가) 김일성 주석의 춤꾼, 최승희 평가“일제의 민족문화말살책동이 우심하던 때 일본 춤이 아니라조선 춤을 추었으면 애국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유럽, 미국, 남미, 몽골 등 세계춤꾼으로 명성 날리며 전성기 만끽일본군에게 끌려 다니며 위문 공연한 것이 친일파로 낙인찍어해방공간서 월북하여 북조선에서 활동하다 남편 안막 몰락함께역사 속에서 사라진 후, 서기1969. 사망, 북 애국열사릉에 묻혀친일파 낙인에 대한 최승희의 반격,"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
경기 여주에서 동학세계화를 위한 제46차 학술대회 개최여주는 동학 2대교주 해월 최시형이 잠들어 있는 고장이항진 여주시장 여주시에 동학정신 고취시킬 것 다짐여주시의 사람중심, 행복도시 추구, 동학정신과 잘 맞아 조선개국 4352.11.08. 경기도 여주시 여주도서관에서 제46차 동학학회 추계 학술대회가 열렸다. 여주시와 여주박물관이 주최했다. 주관은 동학학회가 했다. 통상 주최는 그 행사를 실제 개최하는 단체가 하기 마련이다. 이번 동학학회 학술대회는 이 관행을 깨고 여주시가 주최자가 되어 개최하는 형식을
글: 류돈하(역사연구가) 이토오히로부미를 사살 한 뒤,조선의 식자들과 중국 등의 식자들은안의사의 의거 결행을 형가와 가섭에 비유하였고그 의기는 남송의 충신 문산 문천상에 비유하였다 1909년 10월 26일1909년 대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동양평화의 원흉 이등박문을 브라우닝 M-1900로 쏘아 사살하였다.이등박문(이토오히로부미)은 일본 죠슈번 출신으로 명치유신을 주도하여 일본의 왕정복고를 이루는데 공을 세웠다.무엇보다 박문은 일본 제실제도자료를 책임편찬하여 일본 왕가의 위치를 굳건히 정립하였다.일본 명치유신의 주역이
식민주의 역사관과 친일파 후손들이 많은충북 보은군 동학공원내에 교육기관 석천암 준공동학혁명군 마지막 항쟁지 피로 얼룩진 보은군지역민들의 역사정신함양 보은동학북접이 담당 2019년 9월 20일 보은 동학공원 내에서 석천암 복원 준공식이 있었다. 2006년 석천암은 건물과 토지의 소유주가 원만한 합의를 보지 못한 결과 해체되었었다.석천암은 경주 김씨 문중에서 자제교육을 위하여 만든 서당으로 1971년 백인말로 이전되었던 것이 다시 해체된 것이었다.김정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여럿 있다. 김씨 문중은 공부의 대상을 마을 아이들로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의 진실 2부 글: 한동상(재미동포, 미국라스베가스 거주) 조중연합군의 포위섬멸작전에 말려든 미군과 한국군장진호 죽음계속서 전멸위기 미공군 지원받아 일부탈출북한주민들, 미국과 한국군의 선동에 속아 피난길 나서배멀리로 토하는 피난민 바다에 던져죽인 참전 일본군배에 오른자, 못오른자, 고향에 남은자 이산가족 생이별 흥남철수 작전은 이렇게 진행됐다. 12월 하순의 엄동설한에 흥남 항으로 후퇴한 미군과 한국군을 흥남부두에 1백 32척의 미 해군 함정과 일본 민간선박으로 전쟁물자와 9만 1천명의 피난민들을 싣고 대규모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의 역사진실 1부 한동상(재미동포, 미국 라스베가스 거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북조선 임시수도 강계를 향해진격맥아더의 실책, 서북진출군과 동부진출군간 연계작전 거부함서기1950.11. 강계를 앞두고 장신호서 조중연합군에 포위돼조중연합군 섬멸작전으로 미군 1만 2천명 중 절반가량 사망 서기1950년 11월부터 함경남도 북단의 개마공원의 장진호에서 미군 제10군단과 중공군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전투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중공군과 인민군에 포위공격을 받아 괴멸위기에 빠졌다. 미제10군단
글: 조광성(자유기고가) 어머님이 들려주는 왜놈들의 치떨리는 만행쌀, 보리 등 농사지은 것 다 공출로 뺏아가소도 안먹는 곰팡이 썩은 깻묵 먹으라고 줘강제징용 탈출한 외조부 뒷산 숨어 지내기도일본여행가고 물건사는데, 안 당해봐서 그런 것 올해로 84세가 되신 어머님...걷기도 불편해 하시고 평생 해오신 농사일도 힘들어서 하루에 2시간 정도 밭에 나갔다 오시는 것이 전부다.1936년 3월 태어나서 해방이 되던 1945년에는 10살이었다. 당시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어른들이 일본놈의 학교에서 일본놈의 공부를 배우는 것은 도움이 되지
글: 이시종(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사무처장) 중국 해남도 삼아시 천인갱,일제가 학살한 조선인 시신 가득중국공안 한국인 단체인원 추도식 거부개인 몇 명만이 쓸슬히 원혼들 추도함일본은 120만 일본군 유해발굴사업 꾸준우리는 무관심으로 일관, 방치해온 역사이제라도 조사발굴 및 고국으로 모셔야 중국 해남도 삼아시 천인갱시골인근 마을 구석진 곳에 잡초가 무성하고, 둘러쳐진 담벼락이 무너져 내린 이곳에 일제치하 강제동원되어 학살당한 1.300여명의 조선인이 묻혀있다.1945년 4월 해남도가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조선인들을 학살한 일본군
3.1독립만세투쟁은 천도교 수백만 명의 조직으로 성사된 것북조선은 3.1운동 깎아 내리고 김씨 일가 중심으로 풀어내김구로 상징되는 임시정부는 지나치게 과대포장 된 면 많아해방정국 북조선은 이미 소련이 낙점한 김일성이 주도함남한은 탈북한 부왜매국세력 및 독립투사들의 권력투쟁 마당6.25 한국전쟁은 미국이 유인하고 스탈린이 이용한 민족사 참극 “가능하다면 다시 이곳을 떠나 일본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일본군 항공대에 자원입대하여 폭탄을 싣고 와 이 임시정부 청사를 폭파하고 싶습니다.”이게 무슨 말인가. 누가 일본전투기를 몰고 와 임시정
글: 이시종(인문학박사, 자유기고가) 일제식민통치 순응정책에 앞장선 일본제국대학 유학파해방 후 친미파로 둔갑, 강고한 그들만의 철옹성 구축식민통치 부역자들, 대를 이어 대한민국 지배세력군림 이들의 유학과 꿈과 현실은 무엇이었을까?동경과 교토제국대학 출신자만 분석했지만 그들중대다수는 식민지 조선의 관료가 되어, 민중들을 탄압하고강제동원에 앞장섰다.이들중 자신의 식민지 조선 관료 생활을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반성한 사람은 아산사람 이항령 전 홍익대 총장으로 기억된다.박영출을 비롯한 극히 일부의 사람이 민족해방과 광복에 앞장섰을 뿐이다.대
3.1기미독립선언서에 동학혁명사상 스며 있는 것 확인제국주의 식민지하 비폭력 평화투쟁은 3.1혁명이 효시중국5.4운동에 결정 역할 확실, 인도 독립투쟁에도 영향 올해는 3.1독립만세운동이 있은지 1백주년이 된다. 서기1919.03.01.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에게 나라를 강탈 당한지 9년만의 민족해방투쟁이다.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곳곳 우리민족이 있는 곳이라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국내에서는 당시 1천7백만의 조선인구 중 2백2십만여명이 봉기했다.이 전민족 해방투쟁이 서기19세기 후반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과 밀접
지난 5월 11일 정부는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지정했다. 5월 11일은 황토현에서 동학군이 관군을 이긴 날이다.이날을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하여 국가기념일로 정했다.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는 것은 동학혁명기념사업에 정부차원에서 예산을 편성하여 지원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그래서인지 동학혁명이 일어난 곳 마다 기념사업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특히 전라북도 정읍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거행되고 있다.올해는 전라북도 전주시 차원에서 큰 행사를 하나 벌였다. 전주시에 녹두공원을 조성하고 녹두관을 만들어 동
서경덕 교수와 함께하는 해외 강제징용 문화유산 탐방(3일 차) 방영 이후 유명해진 공양탑진실이 알려지자 무서워 폐쇄책임 공방도 서로 떠넘겨 3일차 일정은 오전 8시 40분에 배를 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답사팀을 태운 배가 다카시마 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 목적지는 둘째 날과 같이 다카시마 석탄박물관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곳이었다.다카시마에서 가장 높은 곳, 그러나 아무도 다니지 않는 어느 삼거리로 답사팀은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깊숙이 숲을 가로질러 길을 만들며 나아가자, 다카시마 공양탑이 답사팀을 마주하였다. 아마
서경덕 교수와 함께하는 해외 강제징용 문화유산 탐방(2일 차) 군함도에는 일제 ‘자랑스런’ 역사만 가득1939년~1946년 사이의 역사는 사라져군함도에서 헤엄쳐 탈출하던 조선인 강제징용4명 익사체해안가에 비석하나로 기념하고 있는 중 2일차 일정은 군함도 자료관 관람, “난고지묘 해난자 무연불지비”, 다카시마 석탄박물관, 군함도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사실상 본 탐방의 핵심 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답사팀은 둘째 날 첫 일정으로 후쿠오카에서 나가사키로 이동 후 군함도 자료관을 찾았다.이 역사관은 2015년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세
글: 은영지(사회운동가) 80년대 청춘시절엔 독재정권과 가열차게 싸워결혼한 뒤에는 광주 망월동 묘지에 자주 못가518광주학살이 기획된 것 새로 드러나 경악소성리 사드배치저지 투쟁도 518연장선상 1991년 신혼여행지로 광주 망월동에 참배하고 지리산 노고단에서 첫날밤을 보낼 정도로 광주는 내게 특별했다.혁명의 불덩이를 가슴에 품고 산 80년대 청춘시절엔 늘 5.18 그날이 되면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작전을 하듯 광주에 진입하는 일이 흔한 풍경이었다. 그땐 군부독
서경덕 교수와 일제강제징용흔적 답사(1일차)강제징용 유적이 근대문화유산으로 둔갑되어 전시 중유네스코에 강제징용 표기 약속도 지키지 않아윤동주 순국지는 아무 표시도 없이 놀이터로 만들어 단군기원 4352년 4월 12일부터 14일가지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와 자유여행기술연구소 ‘투리스타’가 함께 일본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였다.이번 일정은 후쿠오카와 나가사키로 이어졌다. 이 두 도시는 왜국 내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석탄 채굴량이 많아 강제징용이 많이 있었던 지역이다.이 지역 강제노동은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 주도에서 대기업이 주도하
승전 뒤 우리민족에게 돌아온 동국사많은 영화가 촬영된 히로쓰 가옥등왜정의 자취를 잘 이용할 필요 있어 둘째 날 일정은 군산행으로 시작되었다. 답사팀의 둘째 날 첫 여정은 군산근대역사박물관으로, 본대 측에서 섭외한 군산 지역 해설사와 함께하였다.해설의 시작은 근대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커다란 사진 앞에서였는데, 이 사진은 1945년 승전 직후 미군이 공군기를 띄워서 찍은 군산 시가지 사진이라고 한다.사진에서는 목포와 마찬가지로 조선인 거주지와 왜인 거주지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는데, 왜인들의 거주지는 네모반듯한 사거리가 현재까지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