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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참전 일본군, 바다에 피난민 던져죽여한국전쟁에 미군에 빌붙어 수송부대로 참전한 일본군의 만행을 알아야 한다.
한동상 | 승인 2019.09.19 16:59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의 진실 2부

 

글: 한동상(재미동포, 미국라스베가스 거주)

 

조중연합군의 포위섬멸작전에 말려든 미군과 한국군

장진호 죽음계속서 전멸위기 미공군 지원받아 일부탈출

북한주민들, 미국과 한국군의 선동에 속아 피난길 나서

배멀리로 토하는 피난민 바다에 던져죽인 참전 일본군

배에 오른자, 못오른자, 고향에 남은자 이산가족 생이별

 

▲서기1950.12. 함경남도 흥남부두에서 패퇴해 가는 유엔군 수송선에 오르려고 피난민들이 지고, 이고, 안은 가운데 줄지어 길게 늘어서 있다. 이 북한주민들은 유엔군의 선동에 속아 피난길에 오른 것으로 확인된다. 미군과 한국군은 미군이 철수하면 대규모 폭격이 있을 것이니 살수없다. 또 불리해지면 원자탄을 투하할 수 있다며 피난가라고 독촉했다. 체제선전에 이용하려는 공작이었다. 피난민들은 잠시 피난갔다 다시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고향에는 노인 등만 남겨두었다. 그러나 이것이 영원한 생 이별임을 당시는 알지 못했다.

흥남철수 작전은 이렇게 진행됐다. 12월 하순의 엄동설한에 흥남 항으로 후퇴한 미군과 한국군을 흥남부두에 1백 32척의 미 해군 함정과 일본 민간선박으로 전쟁물자와 9만 1천명의 피난민들을 싣고 대규모로 철수했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이 중공군에게 패하여 38도선으로 철수하고 있을 때,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미 제3, 제7, 제1해병사단)과 국군 제1군단 (수도, 제3사단)이 흥남에서 해상철수를 개시하였다.

12월 24일 마지막 철수부대가 승선할 때까지 20일 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대 철수작전이었다. 이것이 저 유명했던 흥남 대 철수작전이었다. 이는 미군역사상 최대의 해상 철수작전이었다.

이 철수 작전에서 미제10군단의 병력 10만 5천명과 1만 4천여 대의 차량, 연료 2만9천여드럼, 탄약 9천 톤 등 3만5천 톤의 화물과 군사장비까지 싣고 황급히 흥남부두를 떠났다.

미군수물자를 만재한 후 빈자리에 피난민들을 실고 후송하였다. 한국의 역사가들은 미군들이 장진호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하여 흥남 해상철수를 한 사실은 국민들에게 상세히 알리지 않았다. 미군의 흥남철수작전이 마치 피난민을 위한 철수작전인 것처럼 포장하였다.

‘국제시장’ 한국영화도 장진호전투는 별로 없었다. 때문에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흥남항 미군 철수작전이 마치 피난민 철수작전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후퇴 하면서 약 59만 톤의 폭약으로 모든 흥남공장들과 시내건물에 장진하여 전부 폭파하였다. 아울러 약 9만 1천명의 함흥과 흥남지방의 피난민들을 부산과 거제도 지방으로 미군함정과 일본 민간 선박을 이용해 후송했다.

이 흥남 철수작전은 도일(Doyle) 해군제독이 총지휘했다. 피난민들을 미군함정들과 민간선박에 실어 운반하는데 당시 통역관이었던 현봉학씨(필자의 중학선배)의 역할이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봉학씨는 처음엔 해병대 대령인, ‘포니’에게 통역관이 되게 해 달라고 부탁했고 이를 ‘에드워드 로우니’ 장군에게, 다시 ‘알몬드’사령관에게 보고하여 논의한 끝에 결국 그의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포니대령은 후송된 피난민의 숫자는 흥남부두에서 9만 1천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흥남 부두 가에는 며칠 씩 줄지어 기다리고 있던 피난민들의 대열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미 해군 수송선마다 미군 및 한국군 병력과 군 장비를 먼저 싣고 남은 빈칸에 피난민들을 수용했다.

이 때문에 차례를 기다리다 배에 타지 못한 사람들이 가족과 떨어졌다. 수송선이 차례로 떠날 때마다 떨어진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은 발을 동동 굴렀으며 가족들끼리 서로 이산가족이 되어 흥남부두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부모형제가 서로 떨어져 생이별을 당해야 했다. 이산가족은 이렇게도 탄생했다. 가까스로 배에 올라타긴 했으나, 부두에 남은 부모형제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어린 소년 소녀들도 많아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가수 현인 씨가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는 이 눈물의 이별장면을 노래한 것이다. 배를 타고 멀어져가는 부모형제들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아이들의 관경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만선의 배 선창가에서 배를 타려고 시도하다가 차가운 바닷물에 떨어져 죽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바닷물에는 많은 시신이 보였으며 차마 눈을 뜨고 바라볼 수없는 이별의 참상이었다.

당시 그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미군기의 폭격을 피하여 잠시 동안만 남한에 피난 갔다 오면 고향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떠났다.

그리고 한국 군인들이 ‘말하기를 앞으로 미군기들이 후퇴 후 대대적인 폭격을 할 것이고 정세가 불리하면 원자탄을 쏜다. 그 폭격을 피해 살기위해서는 잠시 동안만 남한에 피난 갔다 오라고 독촉했다. 이 말에 사람들은 폭격을 피하여 필사적으로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뜻밖의 이산가족이 되어 부모형제들의 생사, 안부조차 모른 채 세월만 무정하게 73년이 흘러갔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일반 사람들이었고 무슨 정치적이고 사상을 가진 게 아니었다.

그들이 필사의 탈출을 한 것은 그동안 미군기들의 무차별 폭격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들은 미군의 폭격에 공황상태였고 미군 철수 후에 있을 미공군기들의 대대적인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 일시적 피난한 것이다.

또 미군들이 비행기로 피난 갈 것을 권장하는 삐라를 뿌렸고 한국군도 피난 갈 것을 적극 권장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미군들이 후퇴한 후에 대규모 폭격이 있을 것이며 미군이 전세가 불리해지면 원자탄도 사용할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남한에 잠간 동안만이라도 피난 갔다 오면 된다, 살기를 원한다면 남으로 잠시 피난가라.” 라고 강력 권유했다.

이 말을 믿고 사람들은 노인들과 어린 아이들을 집에 남겨 놓고 1~2달 후엔 집에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고향을 등지고 남한으로 피난 나온 것이다. 피난민들 대부분이 이 말 때문에 내려왔다.

이는 남겨두고 온 부모형제와 어린 자식들과 뜻밖에 이산가족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원히 이별하는 것을 뜻했다.

그 당시엔 가족과의 잠시 동안 헤어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향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피난길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물론 일부 어떤 사람들은 국군이 들어 왔을 때 국군에 협력하여 인민군이 다시 들어오면 그 보복이 두려워 피난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 두려워 고향을 등지고 떠난 것이다. 그동안 북의 사람들은 미공군기들의 폭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리하여 폭격 공포증에 걸려 있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산가족이 되어 두고 온 부모 형제들과 어린자식들의 생사조차 모르고 지낸 지난 73년의 세월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아픔으로 남아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던 한이 맺혀 그들의 가슴엔 멍이 들어 소주잔을 앞에 놓고 눈물의 노래로 상처를 달랬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질 때...”

지금은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산에 한을 품고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서기2006년 대한적십자사의 통계에 의하면 이산가족 면회 신청자 수가 처음엔 12만 9천명이었는데 그동안 8~9만 명 이상 사망하여 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또 매년 더 많은 신청자들이 고령으로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 뒤에는 이제 이산가족이란 말과 단어조차 없어질 형편이다. 참으로 비극적이고 가슴 아픈 역사다. 남북한 당국자들은 인도적인 면에서 더 많은 이산가족들이 서로 상봉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당시 그 일본 어선에 타고 남으로 피난하고 있었던 당년 17세의 한 젊은 여성이 있다. 그녀 이름은 한증녀, 서기2019년 현재 86세, 현재 미국 라스베가스에 거주하고 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비참한 목격담을 필자에게 울면서 증언하였다.

“배가 강원도 근처 동해바다를 지날 때 난류와 한류가 부딪치는 곳에서 파도가 격렬하게 높아지자 많은 사람들이 배 멀미에 시달려 심하게 구토했다. 그때 미제 용병으로 6.25전쟁에 끼어든 일본선원들이 있었다. 이 일인들은 매 멀리로 토하는 피난민을 향하여 더럽다고 일본말로, “조센진, 쿠사이, 쿠사이,” 하며 이 피난민들을 산채로 바다 속으로 던져 죽였다. 이 끔직한 현장을 보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공포 속에서 떨었다.” 고 눈물을 흘리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이 얼마나 잔악한 짓인가. 그들은 아무 죄 없는 그 불상한 사람들을 바다에 처넣어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과거 식민지 시대 조선 사람들을 멸시하고 노예취급하며 살해하던 일본 놈들의 야만성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미공군기들의 폭격을 피해 살기위해 피난하는 피난민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무참히 죽이다니 참으로 분통하고 울분을 금할 수 없다.

한증녀씨는 그 잔인한 역사적 사건의 산 증인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처음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그렇게 악독한 일본 놈들과 군사협력을 맺어 외세와 야합하여 같은 동족을 공격하려는 한국의 국내친일파 왜구들이 지금까지 우리 땅에 있다면, 그들은 우리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친일파의 두목 이완용과 같은 민족반역자들이며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미국 역사학자 ‘말카산’(MalKassan)은 그의 <한국전쟁> 저서에서 “당시 미군과 한국정부 당국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북한주민들에 남한으로 피난 갈 것을 권한 것은 순수한 인도적인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북한주민의 많은 사람들이 고향 땅을 등지고 남한에 넘어 오게 함으로써 북한정권에 인적타격을 줄 목적에서였다. 또 이념투쟁에서 서방 자본 민주주의가 공산 사회민주주의 체제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전 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런 의도가 피난독촉 짓 밑바닥에 깊이 깔려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북한사람들이 남한으로 피난하기를 권장했다.” 라고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추가로 한 선생님은 피난 오기 전에 북에서 의과대학을 다녔다. 그녀는 다음 이유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하였다.

제 전자우편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긴다.

첫째, 남한 친일, 친미 괴뢰정부가 남한국민들과 전 세계에 '북한 피난민들이 북한공산치하에서 살기 싫어하고 남한사회를 동경하여 남한에 피난하여 나온 것처럼 왜곡하여 허위선전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것이 아니고, 미국의 폭격과 원자탄이 무섭고, 또 ‘한국군과 미군이 살기를 원하면 남조선에 잠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된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사람들이 늙은이와 아이들만 남기고 피난 나오게 된 이 비극적인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했다.

둘째, 미군이 장진전투에서 크게 패전하여 흥남 항에서 철수 하게 되었는데, 남조선 괴뢰정부는 국민들에게 미군의 대패한 이야기는 숨기고 그 무슨 "인도적인 피난민들의 후송 작전" 처럼 미화했기 때문이다.

셋째, 악독한 일본 놈들이 동해 해상에서 피난민을 학살한 사건을 온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 일본 놈들의 잔학상을 세상에 폭로하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일본 놈들의 이 잔학상을 그 배 선상에서 직접 목격한 유일한 산 증인 한증녀 씨가 지금 나와 함께 라스베이거스에서 살고 있다.

한동상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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