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왜곡된 것이 많다.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의 역사진실 1부

 

한동상(재미동포, 미국 라스베가스 거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북조선 임시수도 강계를 향해진격

맥아더의 실책, 서북진출군과 동부진출군간 연계작전 거부함

서기1950.11. 강계를 앞두고 장신호서 조중연합군에 포위돼

조중연합군 섬멸작전으로 미군 1만 2천명 중 절반가량 사망

▲서기1950.11.29. 장진호 인근 도로에서 미군이 패잔병이 되어 쭈그리고 길게 앉아 있다. 조중연합군에게 전멸당하게 생기자 철수 명령을내렸다. 미공군의 지원사격으로 겨우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중에 절반가량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서기1950년 11월부터 함경남도 북단의 개마공원의 장진호에서 미군 제10군단과 중공군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중공군과 인민군에 포위공격을 받아 괴멸위기에 빠졌다. 미제10군단은 미 공군의 격렬한 공중폭격 지원 하에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함흥을 거쳐 흥남으로 후퇴하였다. 미군역사상 최대의 해상철수작전을 하였다.

한국에서 이에 대한 영화 ‘국제시장’을 제작하여 한국과 미국에서 상영하였다. 첫날에 1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개봉 20일에800만 관객을 돌파하여 대 성황을 이루고 있다.

국제시장은 6.25 한국전쟁 당시 험난했던 그 시절 굳세게 살아 온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독일에 간 광부들과 간호사들, 월남파병, 이산가족 상봉에 이르기까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작품이었다. 영상에 보이는 장면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꾸며낸 한 장면일 수 있으나 전쟁을 겪은 세대들에게는 그 장면들이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필자도 관람하였는데 이산가족들의 애환과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고통과 비참한 참상을 눈물 없이 볼 수 없었으며 한반도 분단의 비극과 전쟁의 아픈 상처를 느꼈다.

사실 한국전쟁과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 한국군 월남파병과는 별로 상관이 없지만, 연출자는 관객의 흥미를 자아내기위해 넣은 듯하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흥남철수작전이 피난민 철수작전으로 잘못알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진실은 유엔군이 공산군에게 쫓겨 흥남 항에서 해상철수작전을 한 것이다.

독자들을 위해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작전의 역사 사실을 진실대로 상세히 알려 드리려고 한다.

서기1950년 11월,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 참모인 알몬드(Almond) 소장 휘하의 미 제10군단과 미제1해병사단은 함경남도 북부 산악지대인 장진호에서 한만국경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다.

그해는 유난이도 눈이 많이 내리는 혹한의 겨울이었다.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 12만 병력의 제 9군단과, 인민군 2개 군단이 합세하여 미군과 유엔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미 제1해병사단은 제2차 대전 때 태평양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진 우수한 미군 전투부대였다.

함경남도 북부 개마고원 내의 장진지방의 하가리와 고도리에서 미공군기들의 폭격지원을 받아 잘 싸웠으나, 수적 우세한 중공군과 인민군에게 포위공격을 당해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악전고투를 했다.

고투 끝에 겨우 빠져나와 퇴각을 시작하여 미국 군사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며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고 미 군사 역사가인 로이 애플맨(Roy Appleman)이 고백했다.

워커중장의 미8군이 서부전선에서 중공군 제13병단과 격전을 버리고 고전하고 있을 때 동부전선의 미 제1해병 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이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 산속에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 제9병단의 공격을 받았다.

장진호 계속에서 7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포위망을 구축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미 공군의 지원 하에 겨우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흥남철수는 장신호에서 대패를 한 미군이 2주간에 걸쳐 치룬 철수작전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서부전선은 워커중장의 미8군과 동부전선은 알몬드 소장의 10군단이 서로 작전상의 협조와 연계 없이 독자적인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작전하였다.

맥아더 사령관은 자기의 보좌관인 알몬드 소장을 10군단장으로 인명하고 그에게 독자적인 작전권을 부여하고 작전지휘와 보고도 워커중장의 8군사령관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이때 워커 8군사령관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인천상륙작전이 끝나면 10군단이 당연히 자기휘하의 미8군 소속이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워커 사령관은 얼마 넓지도 않은 한국전선에 미군 최고 지휘관이 두 명이 있어서는 작전에 문제가 있다고 맥아더사령관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맥아더사령관은 워커중장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두 전선 간에 서로 통일적이고 유기적인 작전 협조가 전혀 없었다. 그 결과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사이에 크고 넓은 간격이 벌어졌으며, 중공군은 그 텅 빈 산 지형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침투할 수 있었다.

당시 중공군은 미 제8군과 미 제10군단이 서로 연결하지 못하게 하려고 특히, 장진호 방향으로 공격의 중점을 두었다.

이 작전을 위하여 북한 인민군으로 하여금 국경으로 진출하고 있는 한국군과 미군을 혜산진과 청진 방향으로 공격하게 하여 이들을 압박하였다.

주력을 장진호 지구에 투입하여 이 지역의 미 제10군단을 압박하여 국군과 미군을 지역 내로 한데 몰아넣고 모조리 섬멸하고자 대 포위작전을 효과적으로 전개하였다.

미 해병대 대령 출신의 군사 역사가인‘애플맨’(Appleman)은 “미 제8군과 제10군단 사령부 지휘권의 분리는 중공군의 공격에 대처하는 합동작전에 큰 지장을 초래했고 작전상 실패했다.”라고 분석하였다. 맥아더는 당시 워커중장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장진호 전투에서 미제1해병사단은 혹한을 무릅쓰고 유담리에서 진흥리까지 40Km가 넘는 죽음의 협곡지대에 있었다. 겹겹이 에워싼 7개 사단규모의 중공군의 포위망을 겨우 벗어났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유엔공군의 항공 근접지원 하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하여 겨우 빠져나와 함흥을 거쳐 흥남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미제1해병사단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이때 철수하는 것이냐고 묻는 종군 기자에게 “철수는 무슨 철수, 우리는 다만 다른 방향으로 공격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역설적으로 재치 있게 대답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간이나 지연됐다. 이 덕에 동북지방으로 진격했던 유엔군과 국군부대들이 흥남으로 후퇴하여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흥남 철수작전이 가능하게 되됐다.

그 기간 중 미 제1해병사단은 1만2천 명 중 전상자 7000여명, 후송 후 사망98명, 실종 182명, 부상자 2,872명의 전투손실과 6,200여명의 민간인 비전투 손실을 입었다.

장진호 지방에 진출한 미제 10군단은 포위작전으로 덤벼드는 중공군보다 개마고원 혹한의 강추위가 더 무서웠다.

미군의 가장 무서운 적은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리는 개마고원 장진호의 강추위였다. 영하 30도 이상의 장진호의 겨울 혹한은 미군뿐만 아니라 중공군에게도 더욱 무서운 적이었다.

중공군 일부는 전에는 대만 침공을 위해 대만과 마주한 따뜻한 중국 남부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우수한 부대였다.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겨울철이 이렇게 추운 줄 몰라 대비를 허술하게 했다. 혹한으로 많은 군인들이 얼어 죽었다.

미제5연대 의무 대장이었던 체스터 레슨덴 해군소령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무서운 추위로 수혈관이 얼어 어름조각이 생겨 부상자에게 수혈할 수도 없었고 붕대도 갈지 못했다. 붕대를 갈기 위해 장갑을 벗으면 손이 바로 동상을 입었다. 부상자의 상처 부위를 살펴보기 위해 부상자의 옷을 자를 수도 없었다. 바로 몸이 얼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장점은 추위 때문에 지혈이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무기가 추위 때문에 성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수류탄은 잘 터지지 않았고, 중기관총 총열의 냉각 통에는 부동액을 채워 넣어야 했으며 경기관총은 얼어 붙는 것을 막기 위해 목표물이 있건 없건 무조건 아무데나 몇 분식 계속 발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추위는 미군뿐만 아니라 공산군에게도 똑같이 무서운 적이었다. 중국군의 동상자와 희생자는 더욱 많았을 것이다.” 라고 진술했다(제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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