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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허위의 독립투쟁, 그 집안의 수난사이제는 독립투쟁하면 3대가 자랑스럽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류돈하 객원기자 | 승인 2020.01.19 22:32

 

왕산 허위의 집안 신민회, 서로군정서 활동,

왕산 허위는 을사늑약에 이어 고종황제 강제퇴위,

정미7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하는 국란이 연이어 일어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지체높은 지위를 버리고

'13도 창의군' 군사장, 총대장으로 전국의 의병을 지휘하다

왕산을 심문하했던 일본 주차군헌병사령관 아까시 겐지로(明石元二郞)는

그의 인품과 식견에 탄복을 금치 못했고 이등박문을 척살한 의사 안중근은

왕산을 일컫어 고관 중의 충신이라 기리다

 

 

▲ 왕산 허위의 존영.

생각컨대 구한말 고위관료이자 항일의병장인 왕산 허위 (旺山 許蔿)선생은 그야말로 시대의 선비였다. 또한 그의 집안은 3대에 걸쳐 14명의 독립운동유공자를 배출한 '구국명문가'이다.

사세에 걸쳐 5공의 재상을 배출했다는 중국 한나라의 원소의 가문에 비길 바가 아니며, 숱한 대신들과 권세가들을 낳은 신안동 김씨 가문도 이 집안 앞에서는 숙연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왕산 허선생은 고조가 허박(許璞), 증조가 허돈인데 이 허돈(許暾:1753~1815)이 바로 구미 임은동 김해허씨 입향조이다. 허돈은 허운, 허임, 허좌 등의 아들을 두었다.

허운은 허조를 낳고 허조는 허훈, 허신, 허겸, 허위 네 아들을 두었으니, 방산 허훈(許薰 舫山)은 왕산 허위에게 있어 큰형 즉 백씨이다.
그는 성재 허전(許傳:1797~1886. 양천허씨로 숭록대부 병조참의 역임)과 계당 류주목(서애 류성룡의 9대손이자 낙파 류후조의 아들.)의 문인이다.

그 학통을 따지자면 한강 정구에서부터 시작하여 미수 허목을 거쳐 실학의 중조 성호 이익으로 대표되는 근기남인과 아울러 서애 류성룡의 학통에 속했으며 그 장인이 바로 성산이씨 한주 이진상 선생이다.
근기 남인과 영남학파의 학맥을 동시에 이어받은 방산은 영남유림의 거목으로 갑오왜란 이후 1896년 4월 청송에서 창의하여 진보의진을 결성하였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방산허선생은 두 아우 상산 허겸, 왕산 허위에게 전답 3천여 두락을
전달하여 의병구국활동의 군자금으로 쓰게 하였다. 방산은 아우들과 더불어 의병활동을 전개한 후에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의 장손자 허종은 방산의 아우인 성산 허겸과 함께 신민회 활동을 하였으며 서로군정서의 군자금을 모금하는데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의 집안은 우당 이회영, 석주 이상룡, 향산 이만도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온 가족이 광복운동에 헌신한 집안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끊임없이 해외 등지에서 탄압을 받아야 했고 고난스러운 삶을 이어가야 했다.
왕산의 6촌형제 허직은 대사간과 공조참의를 지낸 조정의 중신이었으며 왕산 역시 종2품 가선대부.의정부참찬에 오른 재신이었다.

대저 왕산이 누구이던가?
을사늑약에 이어 고종황제 강제퇴위, 정미7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하는 국란이 연이어 일어나자 꼴깍꼴깍 숨어넘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지체높은 지위를 버리고 '13도 창의군' 군사장, 총대장으로 전국의 의병을 지휘하였던 분이 바로 왕산이다.

왕산의 창의에 이완용 같은 매국노는 매우 당황하여 1907년 10월 15일, 순종황제에게 '나라의 체모를 욕보였다'라는 죄목으로 왕산의 삭탈관작과 체포 및 처벌을 극력 요구하였다.

이미 일본과 매국노의 수중에 장악된 대한제국 정부는 아무런 방책이 없어 그대로 허락하여 체포명령을 내리고 만다.

왕산은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이다 1908년 6월 11일 일본헌병에 의해 체포를 당해 여러 심문을 받은 끝에 9월 18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0월 21일 형이 집행되어 향년 54세로 순국하였다.

왕산을 심문하였던 일본 주차군헌병사령관 아까시 겐지로(明石元二郞)는 그의 인품과 식견에 탄복을 금치 못했고 이등박문을 척살한 의사 안중근은 왕산을 일컫어 고관 중의 충신이라 평하였다.
한때 나라의 고관을 지낸 선비를 이렇게 서둘러 그 목숨을 빼앗은 것은 그만큼 일본이 왕산 등 선비 유림들의 의병활동이 대한제국 사회에 미치는 막강한 파급력을 두려워 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왕산의 순국 후 왕산의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한마디로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왕산의 장남 허학(許壆:1887~1940)은 연해주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광복운동을 계속 벌였다.

그러다 1937년 이후 소련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로 머나먼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져 1940년 외로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왕산의 집에는 총 14분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되었다. 왕산의 아들들이 뿔뿔이 흩어져 산 까닭에 그 아들들의 자녀들은 서로 사촌의 얼굴도 오랫동안 모르며 각자 삶을 이어 나갔다.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며, 광복 구국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던가. 노무현대통령은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에게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역사를 물려줍시다. 착한사람이 이긴다는 믿음을 물려줍시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나라를 위해 아무런 댓가없이 왜적과 싸우다 죽은 독립운동가의 생애와 그 생후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정의가 승리하고 착한사람이 이긴다는 믿음은 영원히 지켜져야 할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류돈하 객원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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