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이 끊기고 재산 뺏겨도 저항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한 것이다.

 

서기1911년 1월 엄동설한 망국 백성으로

압록강을 건너는 석주 이상룡의 통곡소리,

“나라는 공적재산, 권리는 목숨,

그 공적 재산을 빼앗겨도 애석하게 여기지 않고

목숨이 끊겨도 아프게 여기지 않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백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삼천리 땅에서 살아가는 이천만 동포

즐거운 낙토 우리부모의 나라를

지금은 그 누가 차지해버렸는가.

나의 밭과 집을 벌써 빼앗아갔고

거기에다 다시 내 처자마저 넘보나니

차라리 이 머리 베어지게 할지언정

이 무릎 꿇어 종이 되지 않으리라.”

 

석주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는

백성이 곧 나라의 주인인 것을 바탕으로

국회(의회)를 통해 나랏일을 논하고

지방자치제가 이루어지는 나라

 

▲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2월 경북 안동에 있는 임청각에 들러 석주 이상룡 선생 영전에 추모했다.

 

(석주 이상룡 선생 조국에서의 마지막)

임청각을 나선 석주 이 선생은 법흥동을 벗어나서 서후 두솔원에서 하룻밤, 투숙하였다.

이 과정에서 풍산 소산의 김흥한, 동문수학한 친구 송기식 등과 만났고 1월 7일 정오 무렵, 하회마을에 도착하였다.

석주는 사형(査兄) 류천식(柳千植)을 만나 간도의 사정을 논하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류천식은 서애 류성룡의 11대손으로 북촌댁 주인 석호 류도성의 재종질로 석주의 오랜 지기이자 사돈이다.

잠깐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린 그 날, 석주는 하회마을에서 밤을 보냈다.

고향 안동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이튿날인 1월 8일, 하회마을을 떠날 때 친족 류실(안동에서는 시집간 딸들을 시집간 집의 성씨에 따라 0실이라고 부른다.)이 작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일가친척들, 제자들이 이처럼 석주를 전송할 때 눈물 보인 것을 당시 석주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석주는 류실이에게 동전 여섯 꿰미를 주며 그녀를 달래었다.

하회를 벗어난 석주 일행은 구담, 삼가를 거쳐 상주 봉대에 도착해 딸 강실이와 사위 강남호의 가족들을 만나 회포를 풀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석주의 딸 강실이 역시 눈물바탕이었다.

진정을 하지 못해 석주가 은전 2원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었다.

그 날이 1911년 1월 10일이었다.

석주는 11일 추풍령에 도착했으나 기차를 놓쳐 이튿날인 12일 새벽 2시에 경부선 직행 기차에 탑승했다.

석주로서는 기차 타는 것이 처음이었다.

기차 안에서 율시 한수를 지었다.

아침 8시무렵에 서울에 도착하여 1월 13일에 신민회 동지 우강 양기탁을 만났다.

만주등지에 망명하여 무관학교, 독립군 기지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전략을 세우는 것을 계획 한 곳이 바로 양기탁의 집이었다.

양기탁은 석주와 더불어 1907년에 조직된 정치단체 대한협회의 시말을 논하였다.

석주는 대한협회 안동지회 회장으로서 스스로 대한의 정신이 이곳에 있다고 하며, 이 단체를 통해 경륜을 펼치려 하였다.

일본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던 그 시절 석주는 국가와 국권에 대해

"국가는 국민의 공적 재산이요, 권리는 국민의 목숨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동시에 당시의 현실에 비추어 "그 공적 재산을 빼앗겨도 애석하게 여기지 않고 목숨이 끊겨도 아프게 여기지 않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백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탄식하였다.

석주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는 백성이 곧 나라의 주인인 것을 바탕으로 국회(의회)를 통해 나랏일을 논하고 지방자치제가 이루어지는 나라였다.

서울에 있던 대한협회본부는 경회(京會)라고 불리었는데 경회에서는 친일파로 인해 협회의 취지와 목적이 때로는 친일을 견지하였다가 때로는 항일을 견지하는가 하여 오락가락하였다.

그래서 대한협회라 할지라도 경회와 지회의 성격이 현저히 달랐다.

석주는 양기탁과 대화를 나누며 이에 대해 한탄하였다.

이튿날 석주는 일찍 일어나 씻은 후에 백암 박은식의 왕양명실기를 읽었다.

석주의 스승은 퇴계학파의 직전제자 서산 김흥락으로 석주의 집안 역시 대대로 퇴계학을 가학으로 삼았다.

퇴계학파에서는 퇴계 이황선생 본인부터 왕수인의 양명학을 배척하였으나, 서애 류성룡은 변증법을 통해 어느 일정부분은 수용하였다.

석주는 양명학에 대해 그 법문이 적절하고 간요하면서도 본원을 꿰뚫는 학문이라 평하였다.

1월 19일 오전 9시 마침내 석주는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최용호, 류홍렬 등 여러 사람들이 역에서 석주를 전송하였으며, 그 날 밤 신의주에 도착하여

1월 23일 압록강 가에 이르렀다.

1월 24일에는 처남 백하 김대락 가족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이튿날에 먼저 도착한 아들 동구 이준형 등 가족들과 상봉하였다.

1월 27일 석주는 발거(썰매수레)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석주는 강을 건너는 중에 고개를 돌려 고국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시 한 수를 남겼다.

 

(27일 도강)

칼끝보다도 날카로운 저 삭풍이

내 살을 인정 없이 도려내네.

살 도려지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애 끊어지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기름진 옥토로 이루어진 삼천리

삼천리 땅에서 살아가는 이천만 동포

즐거운 낙토 우리부모의 나라를

지금은 그 누가 차지해버렸는가.

나의 밭과 집을 벌써 빼앗아갔고

거기에다 다시 내 처자마저 넘보나니

차라리 이 머리 베어지게 할지언정

이 무릎 꿇어 종이 되지 않으리라.

집을 나선지 채 한 달이 못되어서

벌써 압록강을 도강하여 건너버렸네.

누구를 위해서 발길 머뭇머뭇하랴.

돌아보지 않고 호연히 나는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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