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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과 스탈린에 놀아난 6.25한국전쟁이념투쟁으로 오염된 근현대사를 바로 잡아야 미래가 있다
오종홍 기자 | 승인 2019.07.31 16:57

 

3.1독립만세투쟁은 천도교 수백만 명의 조직으로 성사된 것

북조선은 3.1운동 깎아 내리고 김씨 일가 중심으로 풀어내

김구로 상징되는 임시정부는 지나치게 과대포장 된 면 많아

해방정국 북조선은 이미 소련이 낙점한 김일성이 주도함

남한은 탈북한 부왜매국세력 및 독립투사들의 권력투쟁 마당

6.25 한국전쟁은 미국이 유인하고 스탈린이 이용한 민족사 참극

 

▲조선개국 4352.07.24. 서울 종로구 전철 3호 안국역 2번출구 맞은편 광화문 아침에서 동학민족통일회 정기시민강좌가 열렸다. 조민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이 ‘3.1운동과 한국현대사 전개과정을 보는 눈’ 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다시 이곳을 떠나 일본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일본군 항공대에 자원입대하여 폭탄을 싣고 와 이 임시정부 청사를 폭파하고 싶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누가 일본전투기를 몰고 와 임시정부청사를 폭파하겠다고 하는가. 문맥을 보니 임시정부에 소속된 사람 같다. 임시정부를 탈출하여 일본군에 ‘다시’ 들어가고 싶다고 한다.

이 말을 보면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임시정부로 합류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 사람이 유명한 장준하 선생이다. 일본군에 끌려가 총알받이로 있다가 탈출하여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들어가 대일광복전쟁을 벌였다.

그런 그가 왜 다시 일본군으로 들어가 전투기를 몰고 와 자신을 다 바친 임시정부청사를 폭격하고 싶다고 하는 것일까.

조선개국 4352.07.24. 종로구 삼일대로 457에 위치한 수운회관에서 동학민족통일회 시민강좌가 있었다. 이날 조민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이 강사로 나섰다. 강연주제는 ‘3.1운동과 한국현대사 전개과정을 보는 눈’ 이었다.

장준하의 이 같은 분노는 대일독립투쟁사 부분 강연에서 드러났다. 장준하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들어갔을 때 임시정부는 심각한 내부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색당쟁이 무색할 정도로 파벌로 찢겨진 채 자기 사람 챙기기에 광분했다. 장준하는 중국 중경임시정부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었던 심정을 이렇게 결론짓는다.

“임시정부를 독립투쟁의 주역으로 볼 수는 없고 독립투쟁전략 단위의 하나로 규정하고 평가해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임시정부모습과는 딴판이다. 우리는 독립투쟁하면 자동적으로 임시정부가 떠오르고 독립투쟁을 대표한 단체라고 여겨왔다.

해방공간에서 임시정부가 새로 수립되는 대한민국 정부가 되었어야 한다고 각인되어 있다. 장준하가 평가한 임시정부는 수많은 독립투쟁 단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날 조민 강사는 이 사건을 대표사례로 들며 임시정부는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3.1독립만세투쟁이후 대일독립투쟁의 구심점으로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서기1945.08.15. 해방될 때 까지 임시정부는 알려진 것처럼 전 민족 독립투쟁을 대표할 만큼 활약하지 못했다.

오히려 유명무실할 만큼 존재감이 없었다. 윤봉길 의사가 서기1932.04.29. 중국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왕 생일 축하식에 참석한 일본군 시라카와 대장 등 일본군 다수를 폭사시켰다.

이 의거로 당시 장개석 중국정권이 챙기면서 임시정부 명맥이 이어졌다. 장개석이 독립투쟁을 돕기 시작했다. 조민 강사는 이 사건 외에 이후 임시정부는 특별히 독립투쟁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고 보았다.

▲대일독립전쟁의 전설, 여천 홍범도 장군.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대첩의 주역으로 평가 받는다. 또 독립무장병력의 통합체인 대한독립군단 창설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홍범도 기념사업회( http://www.hongbumdo.org )

그는 청산리 대첩, 봉오동 대첩 등 무장투쟁승리 이후 이렇다 할 무장독립투쟁이 보이지 않은 점을 분석했다. 이 양대 대첩이후 무장력을 보면 3천5백 명에 달했다. 독립군 부대들은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 재편성됐다.

서기1941.06.28. 소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러시아 역내로 들어간 독립군부대는 레닌 적군의 강제해산 명령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교전이 벌어져 다수가 희생되었다. 살아남은 독립군은 소련군에 강제 편입되거나 흩어졌다.

이 참변으로 무장병력이 흩어지는 바람에 사실상 무장독립전쟁은 사라지고 만다. 이렇게 된 것은 혁명을 한지 몇 년이 안 된 소련 레닌이 파죽지세로 커나가는 일제의 압박에 굴복했기 때문이라고 조민 강사는 보았다. 나라 잃은 힘없는 독립군이 양 강대국사이의 국익에 따라 희생된 비극으로 정리된다.

조 강사는 자유시 참변으로 무장독립군세력이 사라짐에 따라 이후 2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할 수 없어 승전국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고 풀었다. 승전국 지위를 얻지 못한 결과 국토분단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참전하여 승전국 지위를 얻었다면 프랑스처럼 광복군 및 사회주의 계열 독립군이 주축이 되어 대한국토를 장악하고 독립국가정부가 탄생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물론 부왜매국노들도 프랑스처럼 철저하게 청산되었을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조 강사는 광복군을 이끈 세력과 청산리, 봉오동 대첩의 주역 및 이외 의열단 등 대일무력투쟁을 이끈 지도자들이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라고 보았다.

신흥무관학교는 우당 이회영, 석주 이상룡 등의 희생으로 세워지고 운영되었다. 10여 년 동안 존속하면서 2~3천명의 독립전사들을 배출해냈다고 한다.

이날 강연에서는 3.1만세독립투쟁(이하 3.1운동)의 성격도 밝혀졌다. 조민 강사는 3.1독립만세투쟁은 천도교 때문에 성사되었다고 잘라 말했다. 의암 손병희를 중심으로 하는 천도교의 조직과 자금이 주효했다고 보았다.

3.1운동은 이후 임시정부를 탄생시켰고, 해외 피압박민족의 민족해방투쟁에 혼을 불어 넣어 주었다. 중국 5.4운동과 인도, 이집트, 인도차이나, 필리핀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반면에 북조선은 3.1인민봉기로 부르면서 평양에서 먼저 일어나서 서울 등 전국으로 퍼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민족대표 33인을 깎아 내리면서 3.1운동의 결실인 상해임시정부를 사대매국노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세력을 독립투쟁중심으로 자리매김하려는 태도에서 나왔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독립투쟁 세력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쪼개졌다. 독립이라는 큰 틀에서는 같지만 투쟁방식이나 이념에서 달라 갈등과 분열, 반목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서기1927년 ‘신간회’ 깃발아래 모여 한목소리를 냈다. 이것도 오래 가지 못가고 주도권이 뺏긴 사회주의 세력의 이탈로 서기1931년 해체되고 만다.

그렇다면 해방정국에서는 어떠했나.

미국 소련이 국토를 38선으로 두 동강 냈다. 이날 조 강사에 따르면 소련군이 북쪽에 들어오기 전에 벌써 북조선을 통치할 인물로 김일성을 낙점했다. 북조선 인공기도 소련에서 만들어 주었다.

친일파 청산, 토지개혁 등 새 나라를 건설할 정책을 일사분란하게 진행 시켰다. 부왜 매국노들 및 일제치하 기득권 세력은 대거 탈북해 남으로 밀려들었다.

남쪽에서는 미국군이 점령했는데 북쪽처럼 조선인의 자율에 맡기지 않았다. 직접 통치 길을 택했다. 미국군 정부를 수립했다. 조 강사는 남한 해방정국을 권력투쟁 혼돈 판으로 풀었다.

미군정에 부왜매국세력은 물론 독립투쟁 지도자들도 줄을 섰다고 한다. 미국군 정부에 잘 보여야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과정에서 신탁통치문제가 나왔는데 동아일보가 실상과는 정 반대로 보도하는 바람에 독립국가건설이 좌절되는 결과를 낳았다. 원래 신탁통치 진상은 이랬다.

남북통합 임시정부를 세우고 미국과 소련은 뒤에서 후견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비록 임시라는 조건이 달려 있지만 남북한 통합정부가 세워지는 것은 확실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스트리아 사례가 말해 준다. 오스트리아는 이 과정을 거쳐 최종 독립국가가 되었다. 이날 토론자로 나온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전했다.

동아일보의 오보로 임시통합정부수립 및 미소의 후견 안이 물거품이 되고 남과 북은 각자 단독정부수립으로 치달았다. 남쪽에서는 서기1948년 8월에, 북에서는 같은 해 9월에 각각 단독정부가 들어섰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동아일보의 오보로 남북 모두 신탁통치반대로 들끓었다. 5년간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각각 통치한다는 것은 남과 북 누구도 찬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은 사실과 달랐다. 남북통합임시정부를 세우고 뒤에서 미국과 소련이 후원,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남북 각각 분단정부수립은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6.25 전면전이 발발하기 전에 38선에서는 남북간의 크고 작은 전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미군은 남한 군대를 전쟁에 대비할 정도로 무장을 시키지 않고 군사고문단만 남겨두고 나갔다. 이어 극동아시아 미국 방어선에서 남한을 제외시켰다.

이는 북의 김일성이 남침하라는 신호였다. 상황이 남침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남침유혹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날 조민 강사에 따르면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에게 남침을 하겠으니 허락해달라고 49번이나 매달렸다고 한다. 결국 중공이 참여하는 것으로 남침이 결정됐다. 전쟁물자는 스탈린이 제공하기로 했다. 김일성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스탈린이 전쟁에서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이날 조민 강사 강연에서 드러났다. 당시 동유럽에 미국의 힘이 집중되어 스탈린이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미국의 힘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대한강토에 전쟁을 일으키면 미국이 동유럽에 이전처럼 집중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개전 2달여 만에 낙동강전선까지 인민군이 밀어붙인 것을 보면 스탈린이 무장시킨 것이고 남침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김일성과 스탈린간의 전쟁계획표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런데 인민군은 좀처럼 낙동강을 넘지 못했다. 인민군 무력을 모두 쏟아 붓고 있는데도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대전방어선에서 패한 미군이 낙동강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사력을 다해 방어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미군의 우수한 화력 때문에 인민군이 도하를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 강연에 따르면 더 큰 다른 요인이 있었다. 인민군에게 도하장비와 무기증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탈린이 약속해놓고 지원을 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을 오래 끌어 미군을 이 땅에 붙들어 놓아야 했다. 약속대로 지원해 인민군이 전쟁을 금방 끝내버리면 안되었다. 스탈린의 이 같은 속셈은 이듬해 초에 진행된 휴전협상에서 드러났다.

미국, 중국, 북조선 모두 전쟁을 멈추고 싶어 했다. 그런데 소련 스탈린만 반대했다고 한다. 이후 2년이 넘게 공방전을 거듭하며 국토는 초토화 되었고 수백만명의 인명이 살상되었다.

전면전쟁이 일어난 지 며칠 후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렸다. 국제연합군 참전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소련대표가 갑자기 자리를 뜨더니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탈린이 철수하라고 했다고 한다.

안보리에서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았거나 지연됐을 것이다. 그러면 전쟁은 내전 수준에서 그치고 파죽지세로 내려갔던 인민군이 남한 전역을 장악했을 것이다. 소련대표가 갑자기 사라진 것에서도 스탈린의 속셈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6.25한국전쟁은 무엇을 남겼을까. 미국은 깊은 경제침체에서 벗어났고, 일본은 제국주의 시대 국력을 회복했다. 또 유럽경제를 살렸다. 이것이 이제까지 드러난 객관적 지표다.

3년이 넘게 지속된 전쟁에 쏟아 부은 폭탄 량이 2차 대전 때 퍼부은 량보다 더 많다는 통계가 이 전쟁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말해준다. 2차 대전으로 피폐된 제국주의 세력을 재건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국내적으로는 김일성이 미제식민지 앞잡이라며 그리도 반대한 리승만이 살아났으며, 부왜매국세력이 ‘반공’을 팔아 완전히 남한을 장악했다.

이는 민족 자주, 주체세력의 씨가 말라 버렸음을 뜻한다.  지금 진정한 정치인은 없고 정치광대들만 난무하는데 민족자주세력이 6.25를 거치면서 반공국시아래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힘을 받는다.

또 남침은 김일성이 그리도 반대하는 미국군대를 이 땅에 더욱 깊이 박아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날 강연에 대하여 토론자로 나선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조민 강사의 발표에 대하여 의문점들을 제기하고 답변을 요청하고 있다.

강연이 끝나고 토론이 있었다.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 토론자로 나섰다.

조민 강사가 김구 임시정부의 활동을 낮게 평가한 것을 증거를 들어 반박했다. 또 조민 강사가 북핵이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고 했는데, 오히려 북핵 때문에 이 땅에서 전쟁이 사라지고 종전과 평화협정이 체결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날 강좌를 이끈 손윤 동민회 상임의장대행은 역사를 바로 알아야 미래로 나갈 수 있다며 동민회강좌를 계속해 나가겠다고 마무리 발언을 했다.

이날 다양한 시민들이 강연을 들었다. 그 중에는 현직 교사도 있었다. 어떻게 오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학생들에게 바른 역사를 가르치고 싶어서 왔다.”고 분명히 밝혔다.

▲ 손윤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 대행이 강좌의 의의를 밝히고 마무리 발언을 하고 있다.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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