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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3.1독립만세혁명은 현재진행형동학, 3.1독립만세투쟁으로 이어지는 자주독립 민족해방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오종홍 기자 | 승인 2019.06.12 18:35

3.1기미독립선언서에 동학혁명사상 스며 있는 것 확인

제국주의 식민지하 비폭력 평화투쟁은 3.1혁명이 효시

중국5.4운동에 결정 역할 확실, 인도 독립투쟁에도 영향

 

▲서기1919.03.01. 서울 종로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 시민들. 간판에 '경京'자는 보이지 않지만 '경성 종로'라고 추정되는 글자가 가판 오른쪽에 세로로 쓰여져 있다. 사진: 서울시

올해는 3.1독립만세운동이 있은지 1백주년이 된다. 서기1919.03.01.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에게 나라를 강탈 당한지 9년만의 민족해방투쟁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곳곳 우리민족이 있는 곳이라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국내에서는 당시 1천7백만의 조선인구 중 2백2십만여명이 봉기했다.

이 전민족 해방투쟁이 서기19세기 후반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동학혁명세력이었는데 서기1905년 동학 3대교주 의암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지도자 33인중 15명이 동학의 천도교 인물이다. 손병희, 권동진, 최린, 오세창, 임예환, 권병덕, 이종일, 나용환,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이종훈, 홍병기, 박준승, 양한묵이다.

또 이들 중 손병희를 비롯한 총 9명이 서기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통령과 접주 등 동학군 지도자로 대일전쟁에 참여한 바 있다.

이들이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사실은 나중에 일제경찰에 잡혀 고문을 당하면서 남긴 공초문과 재판 받은 판결문에 나타난다.

“일한 병합의 결과로 조선이 독립을 잃었음을 평소부터 불만하던 천도교 성사 피고인 손병희와 동교의 유력한 자인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 피고 최린과 천도교 도사 피고 권동진 동 피고 오세창은 금회의 강화회의에서 전란의 결과를 처리하는 동시에 영구평화를 위하여 세계개조를 도모하려면...이 때가 좋은 기회라 사료하고 동년 1월 하순 손병희 주소에 여러번 회합하여 모의한 결과 조선으로서 제국의 기반을 벗어나 한 독립국을 형성하기로 기도하고, 그 수단으로서는 먼저 동지를 규합하여 조선민족 대표자로서 손병희 등의 이름으로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판결문에 ‘금회의 강화회의에서 전란의 결과를 처리하는’ 이라는 말과 ‘조선으로서 제국의 기반을 벗어나 한 독립국을 형성하기로 기도하고’ 라는 말이 나온다.

제1차세계대전 종료 결과 승전국과 패전국이 강화회의를 했던 것을 말한다. 1차세계대전 종료와 더불어 승전국,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다.

당시 일제치하 조선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해당한다고 보고 일제치하에서 벗어나고자 만세독립투쟁을 손병희 등이 도모했다는 것이다.

또 조선총독부 경성지방법원 예심조서에서도 천도교가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예심판사 영도웅장永島雄藏이 의암 손병희에게 “천도교에서는 피고가 주로 운동에 착수 했느냐”고 묻자, “그렇다, 내가 동지를 모을 때부터 기독교와 합세하여 결행했다.” 고 한다.

또 피고들은 독립운동을 이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느냐는 물음에 최린, 오세창, 권동진 등이 모여서 의논했고 자신은 힘만 있으면 언제든지 독립할 생각을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진술한다.

또 고등법원조서에는 예심판사 남상장楠常藏이 의암손병희에게 동학당과 관계한 일이 있느냐고 묻자, “천도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병오년(서기1905)부터였고 그 전에는 동학이라고 했다. 나는 동학이라고 할 때 가입하고 있었다.”고 진술한다.

이 자료는 일제가 남겨놓은 것으로써 1차사료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취조문과 재판조서를 보면 3.1만세독립운동은 의암 손병희의 천도교가 주도했고 실체가 동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학이 3.1독립만세운동으로 다시 살아났음을 의미한다. 다만 서기1894년 동학농민혁명과는 다르게 다른 종교를 규합하여 추진했고 전 민족차원의 봉기로 이끌었다.

▲서기1894년 동학혁명때 사용된 사발통문이다. 사발밑바닥 모양으로 이름을 써 누가 지도자인지 모르게 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 원형으로 적어놓아서 위아래가 없는 동학의 평등사상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이 때 내놓은 3.1독립선언서를 보면 동학정신이 들어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일제의 우리나라 강점의 부당성과 우리나라가 독립을 해야 할 필연성을 역설하고 있다.

독립과 자주를 선언하는 것은 인류공존 생존권의 정당한 발로라고 한다. 또 조선독립과 자주민 선언은 세계평화인류행복에도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가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당하였다고 외치고 있다. 서기1894 동학농민혁명 당시는 침략해 들어온 일제를 물리치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무력 전쟁을 벌였다.

3.1독립만세운동은 비폭력 평화투쟁이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본질에서 척양척왜의 동학혁명정신을 잇고 있다.

3.1독립만세운동은 서기1919.03.01.에 일어났다. 이 운동은 비폭력 평화투쟁이었다. 이 때 배포 된 3.1기미독립선언서에서 확인된다. 조선독립과 자주민 선언은 동양평화로 중요한 일부로 삼는 세계평화 인류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금일 오인의 소임은 다만 자기의 건설이 유할 뿐이오. 구원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타를 질축배척함이 아니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공약삼장 첫 번째 문장에서도 비폭력 평화투쟁을 읽을 수 있다.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고 있다.

공약삼장 마지막 문장에서도 비폭력 평화투쟁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광명정대하게하라.”고 한다.

▲인도 네루(왼쪽)와 간디(오른쪽). 영국 식민체제하에서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벌였다. 비폭력 평화 독립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네루는 간디의 이러한 투쟁을 언급하고 있고 3.1독립만세투쟁을 알고 있었고 그의 딸에게도 알려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간디가 비폭력 투쟁을 한 것이 서기1920년 이후라고 네루가 그의 책 <세계사 편력>에서 언급하고 있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같은 비폭력 평화투쟁은 당시 제국주의 침략하의 식민지 민족에게도 퍼져나가 비폭력 평화투쟁의 모범이 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 얻고 있다.

3.1독립만세운동이 있은 그해 5월 4일 중국에서 5.4운동이 일어났다. 중국 5.4운동이 3.1독립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일어났음을 추정할 수 있는 사실도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김병조가 3.1독립만세운동 경위를 해외에 알리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고 한다.

또 인도 간디의 비폭력 평화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인도의 정치가, 네루가 그의 딸에게 편지형식으로 감옥생활 중에 쓴 <세계사 편력>를 보면 인도의 대영국 평화독립투쟁이 서기1919년 이후부터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간디야말로 1920년 이래 인도 민족주의에서 확고부동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지도자였다.” 라고 한다. 이어 간디가 평화적인 투쟁을 하였고 이 때 이래 인도가 끊임없이 비무장 불복종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또 네루는 “한국의 독립투쟁 가운데 중요한 것은 1919년의 독립만세운동인데, 젊은 여대생들이 그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사실은 너에게도 흥미로울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영국식민지배하에서 감옥생활을 하던 인도 지도자, 네루가 3.1독립만세운동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다.

▲의암 손병희 일본체류시절 모습. 의암은 동학혁명이 일본군에 의해 꺾이자 후일을 도모하며 일본으로 잠입한다. 이상헌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정관계 거물들과 교류한다. 이 때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서기1905년 국내로 돌아와서 <준비시대>라는 책을 쓴다.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골자로 하고 있다. 자주독립된 나라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세계언론에서도 3.1독립만세운동사건을 크게 다루었다.

“<뉴욕 타임즈>는 3.1 운동에 대해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 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여 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한편 AP통신은 ‘독립선언문에는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천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 고 명시되어 있다’ 고 보도했다. 그 외에도 샌프란시스코의 <이그재미너>, 파리의 <앙탕트>, 런던의 <모닝 포스트>, 상해의 <민국일보>에서도 3.1 운동을 다루었다. 워싱턴 타임즈에 미국의 사업가 로버트 워드가 당시 3.1 운동 이후 일제의 학살 장면을 찍은 사진과 목격담을 제공했다.”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서기1918년에 제1차세계대전이 끝났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이었는데 패전한 제국주의 국가에게 식민지배를 당하던 국가들이 식민지해방투쟁을 벌였다.

승전국을 대표해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면서 패전국 지배하의 식민지 국가들이 희망을 갖고 독립투쟁을 벌였다.

그런데 승전국 지배하의 식민지 국가들도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자신들에게도 적용되는 줄 알고 독립투쟁에 나섰다.

대표국가 우리나라다. 일본은 당시 승전국에 속해 있었다. 3.1독립만세운동은 비폭력 평화투쟁으로써 세계에 알려졌다. 이에 일제가 잔인하게 폭력으로 진압하자 세계언론에서 일제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세계비판여론에 3.1독립만세운동이후 소위 문화통치로 식민지배 방식을 바꾼다. 3.1독립만세운동이 세계로 일제히 퍼져나갔다는 것은 식민지배하에 있던 피압박민족에게 어떠한 형태로든지 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명확하게 확인되는 것은 중국의 5.4운동이다.

이처럼 3.1독립만세운동은 우리민족 해방투쟁이면서 세계로 퍼져나가 피압박 민족의 해방투쟁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영향을 준 세계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피를 흘리는 무력투쟁과 아울러 비폭력 평화투쟁이 민족해방을 이끄는 또 하나의 수단으로 세계사에 기록되었다. 우리 현대사는 압제자로부터 해방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4.19혁명, 5.18민중항쟁 등이다. 그런데 이 투쟁은 폭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4.19혁명 자체로는 성공했다고 평가된다. 5.18민중항쟁은 실패했다.

지난 촛불민중봉기는 성공했다고 인정된다. 이 촛불봉기는 비폭력 평화투쟁이었다. 비폭력 평화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를 남겼다. 비폭력 평화투쟁인 3.1독립만세운동을 이어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종로 광화문 사거리에 위치한 기념비전에 앞에 모인 군중들. 서기1919.03.01.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러 모여 있다.

-참고문헌 및 자료

김삼웅, <의암손병희평전> 2017. 채륜

J.네루, <세계사 편력> 장명국 편역, 도서출판 석탑, 2001.

3.1기미독립선언서, 천도교중앙총부 판본

뉴스톱기사 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326

나무위키 https://namu.wiki/w/3.1%20%EC%9A%B4%EB%8F%99

교육인적자원부, <중학교 국사> 2007.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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