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서 '기자신'을 섬긴적이 없다.

한대륙의 차이나족 문화와 우리 조선(단군)문화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저들은 신을 불러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는 것이고,

우리는 신을 불러 신을 즐겁게 하고 신과 함께 어우러져 신명나게  춤추며 노래를 부른다.

차이나족은 수직적 지배질서로, 우리는 수평적 홍익인간질서로 나타난다. 

 

4. 기타 특정의 기자조선 긍정설에 대한 반대 의견

1) 고구려에서 ‘기자신’을 섬겼다구?

기자조선을 긍정하는 어느 특정 견해는 기자조선을 우리가 고구려 때도 인정하여 ‘기자신箕子神’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으니 기자조선은 사실이라고 한다.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있음을 근거로 내세운다(구당서 권199 ‘동이-고구려전’).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타당하지 않다. 위 기록은 서기 945년경 중국의 ‘후진後晉’이라는 나라에서 편찬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 이전의 같은 동이-고구려전에 속하는 사서들에는 ‘기자신’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즉, 서기209년경에 편찬된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고구려> 에는 제천행사인 ‘동맹 東盟과 ’수신隧神‘에게 제사지내는 기록만 보인다. 또한 서기432년경에 나온 <후한서 동이열전-고구려> 편에도 역시 제천행사인 ‘동맹 東盟과 ’수신隧神‘에게 제사지내는 기록만 나올 뿐이다. 역시 서기554년경에 편찬된,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의 역사서인 <위서-열전-고구려>편에도 단지 제천행사만 기록되어 나온다(김종서, 기자.위만조선연구, 한국한연구원, 2004. 153쪽).

만약에 고구려가 단군조선이 아닌 기자조선을 이었다면 개국 초기부터 다른 제천행사와 함께 ‘기자신’을 모신 기록이 나와야 상식이다. 그런데 고구려 개국과 전성기를 지나면서 나온 중국 측의 사서에는 기자신이라는 기록이 안 나온다. 그러다가 당나라 때의 사서라고 하는 <구당서> 갑자기 튀어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구당서>를 쓴 사람이 어떤 정치적 의도로 써 넣었다고 밖에 달리 설명이 안 된다.

더구나 고구려가 개국시부터 제사지내온 ‘수신隧神’은 '국동대혈國東大穴' 이라고 하여 큰 동굴 속에 신체를 모셔놓고 제를 올렸다. 이 수신은 그래서 고구려 시조모 유화부인과 관련되어 있고 유화부인은 해모수의 부인이며 해모수는 단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한단고기에 나온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의 수신은 단군과 친하다. 이러한 고구려가 단군조선을 제압하고 세웠다는 기자를 조상신으로 섬겼을 까닭이 없다. 더구나 고구려의 기상과 기자의 기상은 성격상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

또는 지금은 가설 수준으로 머물러 있지만 명나라와 이조선이 주종관계를 맺으면서 당시 양국사이에서 역사 바꿔치지를 하면서 대대적인 사료왜곡조작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삼국유사에는 분명히 중국 사서로 보이는 <위서魏書>에 기록된 것을 인용하여 당시 기준으로 약2천년전 또는 당시 위서를 쓴 사람이 볼때 2천년간 존재한 조선의 단군왕검이라는 분이 있었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하며 그것은 요堯나라 때와 같다고 한다.

그런데 현존하는 중국 측 그 어느 위서에도 이런 기록이 없다고 한다. 현존 하는 중국의 모든 문헌사료 특히 25사라고 하는 중국 사료의 판본이 모두 명나라 이전에 편찬된 원본이 아니고 모두 명나라 이후에 펴낸 것들이라면 충분히 의심할 만 하다. 더구나 명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내고 한 대륙을 장악하면서 북경근처의 고려관련 지명을 모두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조선이 개국하자마자 앞서 살펴 본대로 대대적인 사료조작을 한 사실을 볼 때, 명나라에서도 대대적인 사료왜곡조작을 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는 좌측에 신단수와 그 아래에 곰과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정확하게 일연의 삼성기(삼국유사/고조선)의 신시시대를 그리고 있다. 이 처럼 고구려는 '한국'->'배달국(신시)'->조선(단군)을 이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기자신'을 섬겼다는 기록은 중국의 당나라에서나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2) ‘예濊’나라의 하늘 굿, ‘무천’이 은나라에서 왔다구?

또 어느 특정 견해는 은나라 제도와 풍물이 우리와 너무나 닮았다는 것을 맹신한 나머지 조선의 제천행사인 ‘무천’이 은나라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그러므로 무천을 행사하던 당시의 고조선은 바로 ‘기자의 조선’이라고 한다. ‘조선’이 나오고 하늘굿(제천행사)이 ‘무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돈황문서'를 근거로 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주장하려면 먼저 ‘예’라는 나라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밝혀야 한다. 만약에 서기전 1천년 경에 생겼다는 기자조선이후에 생겨난 ‘예’라면 위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되길 바라는 자기 상상속의 욕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라는 나라는 기자조선 이전에 이미 존재한 나라임이 문헌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왕운기-전조선기>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부여,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이 다스리던 시대였다.”

위 기록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단군조선시대에 제천행사가 존재했음을 너무나 쉽게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부여의 제천행사가 ‘영고迎鼓’인데 이는 신을 맞이하면서 북을 두드린다고 풀이 할 수 있는데 공자유교와 너무나 닮은 기자의 홍범구주와는 상극이다. 공자가 괴력난신을 입에 담지 않는다는 것은 앞서 제1편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따라서 이 부여의 영고제천행사는 기자조선을 이은 흔적이 아니라 원 우리 토착문화인 단군조선의 하늘 굿 놀이를 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단군조선시대에도 당연히 하늘 굿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바로 ‘무천舞天’이라는 것이다. 이 무천이라는 글 자체에서도 중국의 ‘기자’보다는 우리의 무속, 굿 놀이가 더 진하게 남아 있음을 본다. 하늘에 추는 춤이라는 것이다. 풍물 굿에서도 연상되듯이 제천행사의 본래 중핵은 춤이다.

오늘날의 굿도 춤이 핵심이다. 이것은 기존의 규범이나 관습, 윤리, 도덕으로 짓눌려있는 인간심성을 모두 초기화 하는 작업이다. 컴퓨터로 말하면 이른바 초기화(포맷)작업이다. 이것을 오늘날 ‘뉴에이지’에서는 이른바 온갖 종류의 ‘명상’으로 흉내를 내고 있다. 한마디로, 내면에 쌓은 온갖 찌꺼기를 모두 춤으로 씻어내고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을 모시는 것이다. 무당의 굿 놀이에서는 이것을 ‘청배請拜’ 라고 한다. 이러한 하늘 굿이 우리가 먼저 있었으면 있었지,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알려진 은나라에서 먼저 생겼을 리가 없다. 한 대륙에서 발견되는 종교행사용 예기를 보면 주로 네발달린 청그릇이다.

그러나 조선(단군)의 강역에서 발견되는 예기는 청동검이다. 모두 종교행사용 예기다. 청동그릇이 뜻하는 바는 향을 피워 놓거나, 귀신이 먹을 음식을 담았다는 것이다. 이는 귀신을 대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우리 조선은 청동검을 세워놓고 신을 불러서 즐겁게 해주었다는 것을 뜻한다. 신을 불러서 춤과 노래로 신과 함께 어우러지고 신을 즐겁게 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 같은 통찰은 일찍이 단국대학교 총장을 지낸 윤내현 전 교수가 한바 있다. 제천 행사인, '무천'이라는 글자 자체에서도 하늘 굿을 하며 춤을 춘다는 의미를 충분히 도출해 낼 수 있다. 이렇게 괴력난신을 믿지 않는 다는 한대륙의 차이나족과 우리는 사유체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고구려도 이렇게 중국과 완전히 다른 우리의 뿌리 문화를 이어 왔는데, 고구려가 기자신을 섬겼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더구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명백히 나온다.

"대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조상에 보답하는 예식은 단군에서 비롯되었다. 후세의 역대 여러나라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 나라가 없었으니, 부여, 예, 맥, 마한, 신라, 고구려 등 제국은 10월로써 하고 백제는 4중월로써 하되, 도천禱天, 무천舞天, 제천祭天, 교천郊天, 영고迎鼓, 동맹東盟이라 한다. 또 이르길 "음력 10월에 제천하던 것이 만세의 풍속이 되었으니 이것이 동방특유의 성대한 제전祭典이요,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북애, 신학균역, 규권사화, 명지대학교출판부,1981.52~53쪽 - 안창범,'한웅천왕과한국고유사상의탄생',제주대학교출판부,2001. 210쪽에서 재인용)." 

위 규원사화의 기록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풍습은 단군의 조선에서 시작되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 단군의 조선을 이은 예, 맥, 마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등이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그 이름까지 상세히 나온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제천행사인 ‘무천’을 기자조선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3) '사고전서史庫全書'의 기자조선문제

기자조선의 존재를 주장하는 또 다른 근거로 사고전서에 그렇게 나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고전서는 청나라 건륭제 때 편 낸 것이고 그 성격은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이라고 하여 여기에 맞춰서 당시 존재하는 국내외 문헌을 총 망라하여 단지 분류하여 정리해서 묶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위 ‘정사’라고 하는 것에부터 시작하여 온갖 관련 문헌을 ‘경사자집’이라는 주제별로 나누어 묶어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일개 개인이 자기 생각을 쓴 것도 있고, 이조선의 중국사대노예세계관에 맞게 써낸 문헌들을 요약하여 집어넣은 것도 있다. 이른바 ‘조선사략’ 편이다. ‘기자’에 관하여는 이미 앞서 살펴본 기자관련 초기 사서기록에서 파생된 ‘류’의 기록들을 사고전서에 실어 놨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외에 기자조선 존재를 긍정하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모두 실증적 증거를 대면서 하는 것이 아닌 논리와 추론으로 일관하는 것이어서 끝없는 논리 공박만 반복될 것이라 생략하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위 여러 가지 실증적 고고학적, 문헌적 근거를 통하여 종합적으로 살펴본 결과 기자조선은 존재하지 않은 상상속의 나라다. 기자조선이 존재함으로 인해서 이익을 보는 세력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나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익을 본다는 말인가,  혈통적으로 관련이 있는 이조선왕조의 후손이거나 그 사상적 후예가 자신의 조상의 허물을 감춤으로써 이익을 볼 수 있다. 또한 중국과 이조선과 그리고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축소왜곡한데 대한 반발심으로 '기자조선' 을 통하여 우리 상고역사의 상한을 위로 끌어 올림으로써 자신의 심리적 만족을 얻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자조선을 사실화함으로써 생기는 이익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는 중공이다. 이 기자조선설 주장 핵심에 한겨레말살책동인 동북공정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자조선설을 주장하는 것은 그 본래의도가 무엇이든지간에, 자기도 모르게 중공의 한국 말살책동,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것이며 이것은 결국 '선무당이 사람잡는다.'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제12부에서 이어짐).

글: 오종홍(삼태극 http://cafe.daum.net/mookto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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