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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속살 보여주는 ‘남당 화랑세기, 정말 창작물일까남당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서라는 증거가 위서증거보다 더 많고 설득력있다
오종홍 기자 | 승인 2018.01.10 23:52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대문 <화랑세기>, 1천 3백년 만에 갑자기 우리앞에 나타나다

남당 박창화 공개한 필사본 <화랑세기>, 김대문 <화랑세기>가 아닌,  남당이 창작한 것인가

 

▲ 서기2017.10.20. 고려대 백주년기념삼성관에서 열린 남당 박창화 역사관 학술대회에서, 김정배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학술종합토론회에서 좌장을 맡았다. 김 전 위원장은 이날 남당 박창화 선생이 남긴 필사본 화랑세기는 오래전에 창작물로 결론 났으니 이제 더이상 거론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서기2017.10.20. 고려대학교 백주년기념삼성관에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소장, 박대재 고려대 교수) 주최로 ‘남당 박창화의 한국사 인식과 저술’ 학술대회가 열렸다. 열띤 토론속에서 예정 된 시간을 넘긴 18시 30경에 끝났다. 무려 6시간 반 동안 진행되었다.

이날 학술대회는 남당 박창화(이하 남당) 선생이 남긴 자료 전반을 다루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당이 필사한 화랑세기는 별도 주제발표로 다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랑세기를 김대문의 화랑세기로 보는 이종욱 전 서강대 총장, 서강대 조범환 사학과 교수, 남당 밑에서 수학한 신복룡 전 건국대 교수 등이 참석해서 인지 화랑세기를 종합토론과정에서 다루었다. 이들이 참석한 것을 고려해서 종합토론 좌장을 맡은 전 국사편찬위원장, 김정배 전 고려대 교수가 화랑세기를 언급했다. 그의 말을 먼저 싣는다.

“그동안 화랑세기가 이게 진서냐 위서냐를 가지고 너무 오랜 세월 다투어 왔다. 너무 긴 시간동안 논쟁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 여기서 발표된 것처럼 남당 선생의 개인 연구 업적으로 정리 되었다. 화랑세기는 그 당시 남당 선생의 연구업적이다. 그런데 그걸 잘 모르고 그걸 가지고 위서논쟁으로 가닥을 너무 잘못 잡고 깊이 빠지지 않았나 한다. 그래서 오늘 학술회의에서 한번쯤 짚고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제 (화랑세기는 창작물로 결론 낫으니 이는 제외하고)다음 문제를 우리가 논의를 해야 한다.”

김 전 교수는 <화랑세기>가 위서논쟁으로 가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위서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남당이 창작한 책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사료가 아니라고 한다. 역사를 기록한 사료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남당이 필사했다는 화랑세기는 창작물로 결론 났으니 그만 다루자고 한다.

이에 앞서 방청석에 있던 서강대 조범환 교수가 김 전 교수의 소개를 받아 발언하면서 화랑세기를 창작물로 취급하는 학술대회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화랑세기를 남당의 다른 저작물과 섞어서 다루지 말자고 했다. 이어 화랑세기는 남당의 다른 저작물과는 성격이 다르니 별도로 빼서 학술대회 주제로 다루자고 촉구했다. 이에 어떤 형태로든지 답변을 해야 하는 김 전교수가 강단주류사학계를 대신해서 화랑세기에 대한 입장을 위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남당이 필사했다는 화랑세기는 남당의 창작물에 지나지 않을까. 화랑세기가 세상에 알려진 후 강단사학계에서 진위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학술대회도 개최되었다. 그런데 진서라고 주장하는 측에서 제시한 근거를 보면, 위서로 주장하는 측에서 내놓은 근거 보다 설득력이 더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진서론자들이 내놓은 진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남당 필사본 화랑세기책 자체다. 이 책은 붉은색 줄로 쳐진 원고지에 필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붉은 원고지는 당시 일본정부에서만 쓰이는 종이라고 한다. 또 이책은 끈으로 제본되어 있는데 묶은 부분이 4곳이다. 책을 세로 네 군대를 뚫어서 끈으로 엮어놨다. 이런 제본 방식은 역시 당시 일본정부만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5군대를 뚫어 끈으로 묶었다고 했다.

둘째, 이 책 내용부분이다. 지금까지 모두 4개가 실증되고 있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구지溝池, 포석정으로 알려진 포석사鮑石祠, 풍랑가風浪歌라는 향가, 부군副君이다.

▲ 부산 김경자씨가 보관하고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 이 필사본은 남당 필사본 화랑세기를 발췌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경자씨 남편, 김종진씨가이 갖고 있던 것이라고 한다. 남편 김씨는 남당 박창화 선생으로 부터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김 씨 소장 화랑세기는 남당이 물려 준 것이라고 한다. 이 요약본은 서기1989.02. 공개되었다. 첫 부분에 화랑이라는 것은 '선도仙徒'라고 선언하고 있다. 선도는 선인仙人의 무리라고 풀이된다. 삼국사기에 평양을 선인왕검의 택이라고 한 것과 통한다. 선인왕검은 단군왕검을 달리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 역사가 선인이라는 고유 사상체계로 이어져 왔음을 밝혀주고 있다. 사진은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서기1999.07.10.)‘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갈무리

먼저 구지는 성 주변에 파놓은 넓고 깊은 물길을 말한다. 흔히 해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경주 월성지역에서 발굴되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사다함의 어머니 금징이 무관랑과 살았는데, 화랑들이 흉을 봤다. 그러자 무관랑이 도망치다 구지에 빠졌다" 는 말이 나온다. 구지는 남당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만 나오는 내용인데 실제 고고유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사실에 바탕을 둔 사료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적 방어시설인 해자가 신라 당시에는 구지라고 불렸다고 이종욱 전 서강대 교수가 주장한다.

다음은 포석사鮑石祠다. 경주 포석정 주변에서 서기1999.05. 포석鮑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왓장이 나왔다. 필사본 화랑세기 포석사가 실재한 것이 포석명 기왓장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를 통해서 포석정이 술마시고 노는 곳이 아니라 사祠라는 글자를 볼 때 화랑세기의 길례, 곧 결혼식을 행했던 사당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화랑세기는 '행길우포사行吉于鮑祠', '화상우포석사畵像于鮑石祠' 등으로 나온다.

다음은 풍랑가風浪歌라는 향가다. 이는 이미 관련 전문가들에 의해서 신라 당시의 향가일 수밖에 없다는 판정이 나왔다. 남당이 아무리 한학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이런 향가를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은 결코 아니었다고 전문가는 단정한다. 향가를 지을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을 하는 대표학자가 성균관대학 국문학과 김학성 교수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들어있는 풍랑가가 신라 당시에 지어진 진짜라고 확신한다. 그러니 필사본 화랑세기가 결코 남당이 창작한 것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김대문 화랑세기를 필사한 것이 맞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서기1999.07.10.)‘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제 생각으로는 도저히 그 당시 국어학 향가해독 수준으로 봐서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필사를 할 당시가 일제말기인데 이 때는 우리나라 향가 연구가 향가 작품을 겨우 억지로 읽어나가는 그런 해독수준에 불과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양주동 같은 분이 겨우 전체 작품을 해석해 냈고, 나머지 국어학자들은 그저 한 두수 내지 두세수를 겨우 읽어내는 수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읽어내기에 바빴던 그 시절에 하물며 작품을 쓴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그 당시에 이미 향찰로 표기된 것을 후대에 필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필사본 화랑세기에 들어 있는 풍랑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風浪歌-

바람이 불다 하되 님앞에 불지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님 앞에 치지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보고

아흐 님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려뇨

풍랑가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하나 김학성 교수는 송출정가送出征歌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서라는 것은 부군副君이라는 이름이 정황증거로 제시된다. 이는 경북 영일군 냉수리비에 새겨진 관직과 비교되는데, 냉수리비에서 나오는 관직의 다른 표현이 부군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노태돈 전 서울대 교수와 같이 위서라고 주장하는 측에서 제시한 근거는 무엇인가. 울산 천전리 암각화에 새겨진 화랑들 이름이다. 이것은 금석문인데 역사학계에서는 금석문을 가장 역사사실을 잘 알려주는 1차사료로 본다. 그런데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이 바위에 새겨진 화랑이름이 한 개도 안나온다고 한다. 그러니 위서라는 것이다.

권덕영 부산외대 사학과 교수가 대표인물이다. 그는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서기1999.07.10.)‘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에 출연해, 필사본 화랑세기에 천전리 암각화의 화랑이름이 나오지 않으므로 위서라고 단정했다. 그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서가 아니라면 천전리 암각화 금석문에 나오는 1백 수십명의 화랑이름이 적어도 한 두명이라도 나와야 한다"고 전제한 후, "필사본 화랑세기에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은 이 책의 화랑들이 모두 가공 인물이라고 의심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남당이 가공인물들을 창작하여 화랑세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 권덕영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가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서기1999.07.10.)‘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에 출연해 남당 화랑세기가 창작된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권 교수는 서기2017.11.21.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 시민강좌에 강사로 출연했다. 그는 강좌에서 조선총독부 사관 핵심인 타율성론을 펼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신라문화는 당나라의 선진문물이 들어와 발전하게 되었다는 식이다. 특히 신라불교문화는 승려들이 당의 선진불교를 들여와서 가능했다는 논리다. 사진은 위 역사스페셜 방송 영상 갈무리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반드시 화랑세기에 바위에 새겨진 화랑이름이 나와야 한다는 절대법칙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상당한 분량이 닳아 뜯겨져 나가서 무슨 내용인지 알길이 없다. 결손된 부분에 천전리 암각화에 나오는 화랑들 이름이 안 나올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 외에 위서론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모두 정황과 추정에 따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위서라는 직접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노태돈 전 서울대 교수가 주장하는 위서 논리를 그의 입을 통해서 직접확인해 본다. 노 전 교수는 서기1999.07.10. 한국방송 역사스페셜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조사해 본 바로는 박창화라는 분은 대단히 많은 독서를 했고 많은 저작물을 남겼습니다. 박창화의 제자였던 소설가 김팔봉씨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서기1910년대 이미 한글소설 막동이전을 두툼한 한글소설 4권이나 저술했다고 하고 또 현재 남아 있는 박창화의 유작품들을 살펴볼 때도 운문투의 시들이 남아 있다. 박창화의 여타 저술들을 조사해 봤을 때 이 사람은 비록 방향은 잘못되었지만 대단히 노력하고 상당 수준의 문필력과 창작능력을 지닌 인물로 파악됩니다."

그는 남당이 역사학 "방향을 잘못잡았다"고 낙인찍는다. 그러면서 문필력과 창작능력이 대단하고 상당하다며 이런 실력으로 <화랑세기>를 창작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창작'했다는 말은 노 전 교수가 사실상 태두로 있는 한국고대사학회의 지금까지 확인된 교수급 인사들이 하나같이 쓰는 통일된 용어로 확인된다. 의견 통일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날 학술대회 종합토론 좌장으로 나온 전 고려대 교수도 남당이 화랑세기를 '창작했다'는 말로 못 박았다.

▲ 노태돈 전 서울대 국사학과교수가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서기1999.07.10.)‘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에 출연해 화랑세기 창작론을 주장하고 있다. 노 전 교수는 서기2016년, 서기2017년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한 시민강좌에 강사로 나와 조선총독부 사관을 대변했다는 비판을 받은바 있다. 또 서기2016.10. 이화여대에서 한국고대사학회, 한국상고사학회, 한국고고학회 등 연합학술대회 종합토론회 좌장으로 참여했다. 이때 심재훈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단군을 모른다고 발언해서 시민들의 분노를 산바 있다. 특히 이날은 시민들에게 공개강좌로 해놓고 취재를 못하게 해서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샀다. 당시 여론은 '무엇이 무서워서 취재를 못하게 하느냐' 반응이었다. 사진은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서기1999.07.10.)‘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갈무리

한편 이날 학술대회에는 고려대 사학과가 심열을 기울여 개최한 것이서 그런지, 고려대 사학과 출신 전직 고위 관리들도 참석해서 눈길을 끌었다. 대표인물이 최광식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및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다(마지막 5부에서 계속).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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