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의 전신, 원화는 박창화 필사본 화랑세기로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대학교 정운용 교수,

‘화랑세기는 단순한 창작 아니다,

그러나 진위논쟁을 보면 남당이 창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자들, 화랑세기도 임나일본부설 자료로 활용하다.

▲ 서기2017.10.20. 고려대 백주년기념삼성관에서 열린 남당 박창화 선생 저술활동 학술대회에서 발표자들과 관계자들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화랑세기花郞世紀라는 문헌자료가 있다. 이 책은 남당 박창화가 세상에 내놓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 까지도 진위논쟁 중이다. 식민사학 추종세력이라고 비판받는 강단주류사학계, 특히 한국고대사학회 같은 단체는 위서, 창작물로 낙인 찍고 있다. 반면에 민족사학계와 강단비주류 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그 화랑세기 필사본이라고 확신한다. 남당 박창화(이하 남당)가 서기1933.~서기1942. 까지 일본 궁내성 서릉부에서 조선전고 조산담당 사무촉탁으로 근무하면서 그곳에 있던 화랑세기 원문을 필사해서 가져왔다고 한다.

이 책은 화랑들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데 총 32명의 화랑들이 등장한다. 이 책 성격을 정리한 서문을 보면 첫 마디가 화랑은 ‘선도仙徒’다. 선인, 신선의 무리라고 풀이된다. 또 “우리나라(신라)에서는 신궁神宮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를 지낸다”고 한다. 신을 주로 받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신라역사를 이끌어 간 재상이나 충성스런 신하 그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들이 이 화랑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니 화랑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서문을 마무리한다.

삼국사기나 다른 사료를 통해서는 신라역사 중요한 부분을 알 수 없다. 화랑세기는 신라역사 중요한 부분, 곧 잃어버린 신라역사의 한면을 자세히 알려준다. 이러한 화랑세기와 관련하여 제도권 주류강단사학 소속의 한 학자가 사실상 화랑세기를 진서로 인정하는 발언이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사실 충격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충격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 주류역사학계가 폐쇄되었다는 비판을 받기 때문이다. 

서기2017.10.20. 고려대학교 백주년 기념삼성관에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소장 박대재 고려대 교수) 주최로 '남당 박창화 한국 인식과 저술'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첫 발표자로 나선 고려대학교 문화유산융합학부 정운용 교수가 기존 강단주류사학의 화랑세기 남당 창작론에 반기를 드는 발언을 해 좌중에 찬물을 끼 얹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특히 이날 좌장으로 참석해서 정교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김정배 전 고려대 교수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정 교수의 지도교수로 보이는 김정배 전 국사편찬위원장과 견해와 맞서는 모습이었다. 

이날 정 교수는 지정 토론자로 나선 우석대 조법종 교수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드러냈다. 조 교수가 남당 화랑세기에 대해서 진서인지 위서인지 입장을 분명히 해달라고 주문했다. 이에 정 교수는 처음에는 바로 즉 답을 피했다. 자신이 화랑세기를 접한 시기와 내용을 파악하고 관련 강연과 글을 써 온 것을 먼저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전 국사편찬위장, 김정배 전 고려대 교수가 고려대 교수로 있을 때 인 서기1995년 경에 그와 함께 화랑세기를 같이 읽었다고 고백했다. 정 교수는 옆에 토론 좌장으로 앉아 있는 김 전 고려대 교수를 의식하는 것이 역력했다. 김 전교수는 화랑세기를 진위차원에서 다루지 말고 창작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이에 정 교수도 당시 그와 함께 읽을 때 자신도 창작물로 보았다고 했다.

▲ 서기2017.10.20. 고려대학교 백주년기념삼성관에서 열린 '남당 박창화의 한국사 인식과 저술' 학술대회에서 정운용 고려대 교수가 토론자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창작물로 보인다고 할때는 시종 편안하고 미소띤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 사진에 서 보는 바와 같이 남당 화랑세기가 단순히 창작물이 아니라고 말을 할 때는 앞서 웃음진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좌우의 김정배 전 교수와 박경철 강남대 교수의 표정도 동시에 굳어졌다.

그는 “89년도에 나온 것을 제가 사회자 선생님(김정배 전 교수)하고 같이 읽었다. 읽은 소감은 ‘아, 이건 신라사의 모습이라고 개인적으로 했었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 그후 이것이 진위논쟁으로 학계에서 주요 쟁점중의 하나였다. 그 때 저의 입장은 선생님과 같이 이걸 진위로 따져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는 있었다.” 라며 김정배 전 교수를 의식했다.

그러나 이어 토론자인 조법종 교수의 질문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의 진짜 생각을 드러냈다. 정 교수는 “조 선생이 (남당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나의 입장을)물으신다면 화랑세기는 내용이 방대하고 짜임새가 인적관계, 인간관계가 정교하다. ‘이것은 단순한 창작으로 보기어렵네’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때 정 교수 왼쪽에 앉아 사회를 보던 김정배 전 교수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 확연했다. 또 그 오른쪽에 앉아 있던 박경철 강남대 교수도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박경철 교수는 이날 두 번째 주제발표자로 나섰는데 남당 화랑세기를 남당이 창작한 논문으로 보았다. 정 운용 교수와 입장이 반대였다. 이날 정 교수외에 발표자, 토론자 모두 남당 화랑세기를 위서, 창작물로 의견 통일된 상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 교수의 발언은 반란에 가까웠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한국고대사학계 안에서 돌발행동이 나온 것이다. 정 교수는 이것을 의식해서 인지 바로 다시 말을 바꾸었다.

“그런데 그 진위논쟁이 벌어지는 과정을 보거나, 아까 박경철 선생님 발표하실 때 서사구조라는 용어를 쓰셨는데 그런식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아, 이건 무엇인가를 보구 필사하였다기 보다는 남당 선생이 창작을 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발표 제목도 남당 박창화의 화랑세기라고 달았다. 조법종 선생이 ‘남당본 화랑세기’라고 한 것은 남당 선생의 창작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자신 신념과 다른 말을 해야 해서 인지, 마지막 말에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을 흐렸다. 화랑세기는 정 교수 자신이 보기에 분명히 단순 창작이 아니라 진서임이 확실하다. 이게 정 교수의 솔직한 학문양심이다. 그런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그게 아니라고 하니 다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이다. 창작물로 보인다고 할때는 시종 편안하고 미소띤 얼굴이었다. 그런데 남당 화랑세기가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라고 말을 할 때는 앞서 웃음진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주위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주제발표 초반에 분명히 화랑세기를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라고 본다는 의중을 드러냈다. 그는 남당 화랑세기 진위여부를 따지지 말 것과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먼저 판단하고 자신주장을 전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분명히 못박았다. 이미 주류생각으로 강요되는 남당 화랑세기 창작론으로 보지 말것을 이렇게 둘러서 표현한 것이다.  또 주제발표 자체가 남당 화랑세기를 사료로 인정하고 화랑제도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화랑세기 연구사를 다루었다. 그래서 조법종 교수가 이것을 간파하고  정 교수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검열 차원에서 물은 것이다.

한편 이날 정 교수는 대일항쟁기 일제 조선총독부 관학자들이 화랑제도를 어떻게 연구해서 이용했는지 고발했다. 먼저 그들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화랑관련 기사를 부정했다고 한다. 또 고대에 일본이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식민지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전제로 깔고 화랑제도를 연구했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화랑 전신인 원화를 국가에서 만들었는데 실제는 창녀였다고 했다며 일제 관학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그들은 화랑이 우리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남방에서 들어온 문화라고 했다며 이러 연구는 잘못된 것이라고 분개했다. 이어 남당이 바라본 화랑 모습은 선도, 호국선이었는데 이것이 맞다고 역설했다. 그러니 남당 화랑세기를 무시하지 말고 주목하자고 호소했다(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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