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 박창화 선생이 내놓은 화랑세기 창작물로 모는 학술회의 열리다.

기사수정: 서기2018.01.05. 05:07

 

전 국사편찬위원장 김정배 전 고려대 교수,

‘화랑세기 진위논쟁 보다 박창화가 창작한 것으로 몰았어야 했다’

강남대학교 박경철 교수,

‘화랑세기는 박창화가 저술한 논변, 논증물이다,

지금으로 보면 논문 같은 것이다, 사료가 아니다’

이종욱 전 서강대 총장,

‘화랑세기가 진서라는 증거는 많다, 위서, 창작물이라는데 이게 말이 되는가’

신복룡 전 건국대 교수, ‘내가 남당 박창화 선생 밑에서 직접 수학한 사람이다’

 

▲서기2017.10.20. 고려대학교 백주년기념삼성관 국제원격회의실에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소장, 박대제 고려대교수)가 주최한 남당 박창화 한국사 인식과 저술 학술대회가 열렸다. 왼쪽에서 다섯 번째 인물이 김정배 전 국사편찬위원장이다.

한 때 사극, ‘선덕여왕’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해외에도 수출되어 한류열풍에 한 몫을 했다. 지금부터 9년전 서기2009.05.25.부터 그해 12.22.까지 문화방송에서 내보낸 이 역사극에는 기존에 들어보지 못한 용어와 인물이 상세히 등장해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특히 ‘미실’이라는 여인이 신라 진지왕을 갈아치고 진평왕을 세우는 등 실세로 등장한다. 당시 신라를 좌우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또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는 등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성이 문란하다는 평가도 받아 많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또 화랑도가 등장하는데 그 내용도 풍부해서 처음 접하는 시청자들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사극 소재가 신라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화랑세기는 그동안 삼국사기에 화랑세기花郞世記라고 언급된 것 외에는 이 책의 존재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런데 남당 박창화 라는 인물이 서기20세기에 이 책을 세상에 내놨다. 필사본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남당 박창화가 서기1933.~서기1942. 까지 일본 궁내성宮內省 '도서료圖書寮'에서 조선전고朝鮮典故 조사담당 사무촉탁으로 근무하면서 그곳에 있던 화랑세기 원문을 필사해서 가져왔다고 한다.

해방 후 박창화가 이 책을 내놨고 이후 본격적으로 알려진 서기1990년대부터 진위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강단주류사학계, 특히 우리나라 고대사를 책임지고 있다는 한국고대사학회 같은 단체는 위서를 넘어 박창화가 창작한 것으로 몰아갔다. 반면에 민족사학계나 강단비주류 사학에서는 진서로 보았다. 이 책을 진서로 보는 강단비주류 사학자 중 서강대총장을 지낸 전 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가 대표인물이다.

신라역사를 다루는 모임에서 화랑도 얘기가 나오면 박창화 필사 화랑세기도 함께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

그런데 화랑세기와 관련해서 남당 박창화 학문여정 전체를 다루는 학술회의가 있어 관련자들의 많은 관심을 끈다. 서기2017.10.20. 고려대학교 백주년기념삼성관에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가 주최한 ‘남당 박창화의 한국사 인식과 저술’ 주제로 열린 학술회의다. 학술회의 제목에서도 풍기듯이 이날 학술회의는 화랑세기만을 주제로 하지 않았다. 남당 박창화가 남긴 저작물 전체를 조명하면서 남당의 역사관을 들여다 보았다. 화랑세기라는 사료를 필사해서 남긴 박창화가 아니라 그의 역사 창작 저술활동 전체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박창화 필사본 화랑세기는 부수주제로 다루어졌다.

▲ 이날 남당 박창화 학술대회에 후원자로 참석한 박종경 남당기념사업회 이사장. 박 이사장은 향후 화랑세기를 주제로 학술토론회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학술대회는 박창화 창작저술활동 틀에 화랑세기를 가둠으로써 자연스럽게 사료가 아닌 것으로 되었고, 창작물로 낙인 찍혔다. 이날 학술회의를 주최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고려대 사학과 박대재 교수는 이런 점을 명확히 했다. “서기2천년대 이후 화랑세기 관련 논의가 대체적으로 정돈되어 가는 추세”라고 발언한 것에서 묻어난다. 화랑세기가 위서, 창작물로 의견통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남당이 일본에서 귀국한 시점조차도 1942년 혹은 1944년으로 정리되지 않았다”며 화랑세기가 박창화가 창작했다는 것에 무게를 두었다. 또 이번 학술회의에서 "남당 박창화의 공과 함께 과도 드러날 수 있다고 이 학술회의를 후원하는 남당기념사업회에 양해를 구했다"고 했다. 학술회의가 사실상 화랑세기를 박창화가 창작한 것으로 몰고가겠다는 말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남당기념사업회가 선뜻 공감했다면서 감사하다는 말로 쇄기를 박았다.

이어 박 교수는 김정배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자신의 은사라면서 학술회의 좌장을 맡게 되었다고 소개했다. 김정배 전 고려대 교수도 화랑세기를 위서,진서 논쟁차원이 아니라 박창화 개인이 창작한 문건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학술회의 종합토론회 좌장을 맡았다면 이 학술회의가 어떤 차원에서 열린 것인지 예고한 것이다.

더구나 이날 학술대회 주제발표와 토론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학술대회가 남당 박창화 선생의 역사학을 깎아내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의혹을 벗어나기 힘들다. 제1주제 발표 토론자로 나선 조법종 우석대 교수, 제2주제 발표자로 나선 박경철 강남대 교수, 제3주제 발표자로 나선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수관 등이다.

이날 정운용 고려대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가 제1주제 발표자로 나섰다. 이에 토론자로 나선 우석대 조법종 교수는 미리 제출한 토론문을 통해서 화랑세기가 창작인지 각색된 것인지 원전을 전재한 것인지 정 교수의 생각을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이 말에 앞서 그는 “화랑세기에 대한 진위 논쟁이 있었는데 한국고대사학계 논의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고 하여 조 교수 자신의 화랑세기에 대한 관점을 간접시사했다.

여기서 조 교수가 말하는 '한국고대사학회의 논의' 라는 것은 앞서 박대제 교수가 말한 '논의가 대체적으로 정돈된' 것을 말하고 이는 화랑세기 위서, 창작으로 결론 냈다는 뜻이다. 조 교수는 화랑세기를 진서로 안 본다는 것을 이렇게 드러낸 낸 셈이다.

제2주제 발표자로 나선 강남대학교 박경철 교수는 방청객 질문에 자신이 자진하여 대답하는 형식을 빌어 화랑세기가 위서급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다. 그는 화랑세기는 남당 박창화가 자기 생각을 쓴 변증서라고 분명히 못박았다. 역사저술이라는 것이다. 순수 역사소설은 아니지만, 논변, 논증수준의 개인 저술서라고 힘주어 말했다. “지금으로 치면 논문 같은 것이다” 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 전 서강대총장 이종욱 전 서강대 교수가 남당 박창화가 남긴 저작물에 찍혀 있는 '실록편수용지實錄編修用紙'라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기자가 이 저작물에 쓰인 용지가 혹시 남당 선생이 일본 궁내성 도서료에서 발행하는 용지가 아니냐고 묻자, 아닐 것이라고 했다. 이유는 당시 일본에서는 편찬이라는 말을 썼지 편수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만 고종, 순종시기에 편수라는 용어를 썼기 때문에 그것일 가능성은 있다고 답했다.

한편 제3주제 발표자로 나선 국사편찬위원회 박남수 편수관은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화랑세기가 박창화가 창작한 것이라고 직접 표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난 서기2017.09.05.부터 같은 해11.30. 까지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진행된 한국고대사학회 주최 ‘신라천년 역사와 문화’ 시민강좌에서 화랑세기는 박창화가 창작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한편 이날 종합토론회 좌장을 맡은 전 국사편찬위원장, 김정배 전 고려대 교수도 화랑세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그는 화랑세기는 진위차원에서 다루어서는 안되고 창작물로 끌고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교수로 재직할 때 ‘대학원생들과 같이 화랑세기를 읽은 적이 있다’면서 "지금 생각해 보니 화랑세기 진위 논쟁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 창작물이라는 구도로 갔어야 한다"며 아쉬워 했다. 그러면서 “창작물로 몰아갔으면 오늘날까지 이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에 대해서 종합토론회 시간에 이종욱 교수와 함께 참석한 서강대 사학과 조범환 교수는 이 학술회의가 화랑세기를 위서 심지어 창작물로 몰아가는 것을 못 마땅해 했다. 그는 화랑세기를 남담 박창화의 다른 창작물과 섞어서 다루지 말 것을 요청했다. 화랑세기를 단일 주제로 별도로 학술회의를 추진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 때 진위문제를 치열하게 다루겠다는 것이다. 이는 화랑세기가 위서가 아닌 진서로, 사료가치성을 부각시킬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또 이날 이종욱 전 서강대 총장도 참석했다. 중간에 나갔지만 쉬는 시간에 기자에게 화랑세기는 진서라고 확신했다. 기자에게 왜 화랑세기가 진서인지 구체적인 증거까지 제시했다. 세가지 핵심 증거를 보여주었다. 경북 월성에서 구지溝池가 나왔고 포석包石이라는 글자를 뜻하는 석石석이 새겨진 기왓장도 나왔다고 했다. 이는 모두 화랑세기에서만 나오는 것이고, 화랑세기가 아니면 이것이 신라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화랑세기에 실려있는 풍랑가라는 향가도 진짜임이 증명되었다고 했다.

▲ 이날 학술대회 종합토론회에 앞서 토론 좌장을 맡은 김정배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안내로 신복룡 전 건국대 교수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신 전 교수는 이날 박창화 선생 밑에서 우리역사를 배운 것을 털어 놨다. 박창화 선생이 '백제와 신라가 마지막 전투를 벌인 황산벌이 중국대륙 이었다'고 말한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고 했다.

전 건국대학교 신복룡 교수는 "어렸을 때 남당 박창화선생 밑에서 공부를 했다" 며 남당의 곧은 기풍을 전했다. 이 말 속에는 화랑세기가 결코 남당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무언의 반박이 들어 있었다. 이날 신 전 교수에 따르면 중국 한나라 식민지, 한사군 위치를 알려주는 패수도 박창화는 현재 주류강단사학과 같이 북한 평양 대동강으로 보지 않았다고 했다. 심지어 백제멸망의 결정타가 된 황산벌 전투의 황산산벌도 중원 대륙에 있었다고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민족사학계에서 지적하는 대륙백제, 대륙신라 역사를 박창화도 주장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것으로 확인된 강단주류사학계, 특히 이 학술회의 주최 및 발표 주요 인사가 소속된 한국고대사학회와는 상극이다. 그래서 이들과 정반대 사관을 갖고 있는 박창화 필사본 화랑세기도 위서, 창작물로 몰아부치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날 학술회의는 강단주류사학계에서 주최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예상되었다. 그런데 이 학술회의에 남당 기념사업회가 후원을 하고 있어 의아스러웠다. 그래서 이날 남당 기념사업회장에게 이 학술회의가 남당 역사관을 기린다고 하지만 사실은 화랑세기가 위서라는 것을 확증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전했다. 그랬더니 그 같은 점을 깨달았다며 별도로 화랑세기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추진하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서는 학술회의장 뒤편에 남당 박창화가 직접 쓴 저작물들이 전시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2부에서 계속).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