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미륵사지, <삼국유사>의 선화공주와 백제무왕이 얽힌 그 미륵사인가?

 

 

익산미륵사는 누가 처음 미륵사라고 이름 지었는가?

아무것도 밝혀진 것 없어...

그런데도 선화공주의 미륵사라고 강변하는 강단식민주류사학계...

서기2009.1.14.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이른바‘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금제사리봉안기’가 나왔다. 이제까지 이 익산미륵사는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선화공주와 서동의 무왕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봉안기는 이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백제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서 오랜 세월동안 선인을 심어 현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삼국유사>에는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가 선화공주로 나온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서동이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고, 서동은 백제의 무왕이 된다. 그 뒤에 무왕의 부인이된 선화공주와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미륵삼존이 못 속에서 나와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이에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우고 싶다’고 하자, 허락하였다. 결국 못을 메꿔서 절을 짓는다. <삼국유사> ‘기이’ 무왕편에는 이때 미륵법상 3개, 회전 탑 그리고 낭무를 각각 3개소를 창건하여 간판을 미륵사라고 하였다고 나온다.

현재 익산 미륵사는 사택적덕의 딸이 창건...

봉안기와 <삼국유사>는 현재의 익산 미륵사에 대하여 전혀 다른 주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봉안기에는 분명히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당시 백제왕후라고 되어 있다. 봉안기는 백제의 최고관직의 하나인 좌평의 벼슬을 한 사택적덕의 딸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사 창건의 주체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로 나온다. 둘 중에 하나는 분명히 틀렸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적 사실이 상반되는 경우 문헌사료보다, 현장에서 출토된 고고학 자료가 역사의 진실을 더 전하는 것으로 본다.

▲ 고려대학교, 박현숙 교수가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하는 고대사시민강좌에서 익산미륵사지석탑에서 발굴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대하여 강의를 하고 있다. 박교수는 사리봉안기에 나오는 '대왕폐하'라는 문구를 백제가 중국에 사대하면서도 독자성을 지키기 위하여 쓴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폐하'는 하늘아래 오직 하나의 주인, 천자만 존재한다는 천하관을 드러낸 것인데, 천자가 다른 천자를 섬긴다는 사대는 있을 수 없다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 박교수의 철저한 중화사대주의사관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서기2016.9.28.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고려대학교 박현숙 교수가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하는 고대사시민강좌 3강에서 이 익산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안기’를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박교수는 충남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과 부여 능산리에서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에 이어 금제사리봉안기 발굴은 백제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라고 평가하였다. 박교수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익산미륵사지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 창건한 것으로 나온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 강의 시간을 대부분 할애하였다. 현재의 익산미륵사는 탑을 세 개 가지고 있었는데 중앙의 탑, 동쪽의 탑, 서쪽의 탑이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봉안기의 기록이 다른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해석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어느 하나를 취하고 다른 것을 버리는 태도를 지양하였다. 또한 미륵사를 건립한 사상적 배경에 대하여도 주목하였다. 박교수는 <삼국유사>의 미륵사 창건을 보면 미륵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반하여, 사리봉안기에는 <법화경>의 사상이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견해를 소개하였다.

현재 익산의 미륵사와 <삼국유사>의 미륵사,

모두 우리 고유의 삼신신앙이 녹아 있어...

<삼국유사>에는 분명히 용화산 아래의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나왔다고 한다. 이는 미륵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리봉안기에는 “법왕이 세상에 나와서 근기에 따라 감응하시고 중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물속에 비치는 달과 같았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내용은 <법화경>과 상통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륵사가 창건되면서 미륵신앙에서 법화신앙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박교수는 석가불 신앙과 미륵신앙을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였다. 한편 박교수는 사리봉안기의 글자체에도 주목하면서 중국의 북조와 남조의 서체가 섞여 있는데 북조의 해서체에 더 많은 영향을 받으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사리봉안기에는 ‘대왕폐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백제가 중국에 사대하면서도 독자성을 추구한 것으로 보았다.

▲ 서울 올림픽공원내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매국식민사학이라고 비판 받는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하는 하반기 고대사 식민강좌가 매주 수요일에 열리고 있다. 우리역사에 목말라하는 시민들이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민강좌가 철저히 일제식민사관과 중화사대주의 동북공정사관을 옹호, 동조하고 있다는데 심각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날 강좌에는 180여명이 참석하였다. 대부분 60대 이상의 노인들이 었고, 그 다음 50대 후반이 차지하였다. 젊은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거의 없었다. 한편 민족사학계에서는 이 시민강좌에 맞불을 놓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서울교육대학교에서 민족사관에 따라 '바른역사 아카데미'를 열고 있다. 서울교육대학교,종합문화관(교대역13번출구)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진행한다. 연락처: 02-333-8150 (http://cafe.daum.net/mookto)

박교수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따랐다.

첫째, 현재의 익산미륵사지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그 미륵사인가의 문제다. 문헌에 나오는 기록을 가지고 추정하는 정도다. 백제 무녕왕릉처럼 명문이 새겨진 지석 같은 것이 나와서 미륵사임이 확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사리봉안기에는 분명히 전혀 다른 사람이 창건한 주체로 나온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륵사가, 현재 미륵사라고 알려진 익산의 그 절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교수는 문헌상의 미륵사가 현재의 익산 미륵사라는 믿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였다. 그럼 누가 현재의 익산의 그 절터를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선화공주가 창건한 미륵사라고 이름 지었을까?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역사체계가 왜구난동기, 일제가 만들어준 것임을 감안 할 때, 일본 식민사학이 명명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둘째, 박교수는 사리봉안기의 서체가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당연히 전제하고 있다. 남조와 북조의 영향을 받았으나 북조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는 무의식속의 중화사대주의 사관의 작동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재 익산의 미륵사를 '미륵사'로 명명한 주체, 일제식민사학 가능성...

셋째, 박교수는 사리봉안기에 ‘대왕폐하’라는 문구에 주목하면서도 백제가 중국에 사대한 나라임을 당연히 전제하고 있다. 이는 박교수가 중국 측의 사료나 중화사대주의 사관으로 써진 우리 사료를 기준으로 우리역사를 바라보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속속들이 발굴되는 고고학의 금석문 등에서는 백제가 결코 중국에 사대하는 나라가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백제 무녕왕릉에서 발굴된 자료는 무녕왕이 중국의 황제와 같은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무령왕이 죽은 것을 ‘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황제가 죽을 때나 사용하는 용어다. 또한 사리봉안기에도 백제왕을 ‘폐하’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도 중국의 황제에게나 붙이는 절대 용어다. 황제는 하늘아래 하나의 주인만 있다는 천하관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박교수의 주장은 오직 하나인 천자, 주인이 다른 주인을 섬기는 사대도 한다는 말과 같다. 박교수의 역사관이 얼마나 무의식 가운데 중화사대주의사관에 물들어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이번 고대사시민강좌를 한국고대사학회와 함께 개설한 한성백제박물관 이인숙 관장이 강의를 진지하게 지켜 보고 있다(오른쪽에서 세번째). 이인숙 관장은 이날 끝까지 강의를 방청하였다.

한편 이날 시민강좌에는 지난번 보다 방청객이 현저하게 줄어 있었다. 아마도 ‘바른역사 아카데미’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열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가지고 간 비평문이 남은 것을 가지고 추정해 볼 때 70명이 넘게 줄어든 것으로 나왔다. 비평문을 받아본 방청객 중에는 별도로 시간을 내어 비평문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진지하게 설명을 해 주기도 하였다. 또한 한 방청객은 지난번 비평자료를 얻을 수 없느냐 아쉬움을 표하였다.

이날 한성백제박물관장, 이인숙씨는 예전과 다르게 객석 맨 뒤에 앉아 끝까지 강의를 들었다. 백제역사를 알리는 강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이 모임을 주최하는 경희대학교 조인성교수는 ‘거기(바른역사 아카데미)에는 가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였다. 다음 강좌는 10월 5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