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도 울고 갈 일제식민사관 도대체 어디까지 번져있나...

 

광개토태왕이 요서를 공격만 했지 차지하지는 못했다고 하는 임기환 교수...

 

서기2016.09.21.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의 주최로 고대사시민강좌가 열렸다. 지난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 2번째 시민강좌다.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임기환 교수가 두 번째 강사로 나섰다. 임 교수의 강의주제는 ‘5세기 고구려사로 들어가는 열쇠-광개토왕비’였다. 임교수는 먼저 광개토대왕비를 세운 뜻을 소개하였다. 광개토대왕이 많은 땅을 개척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잘살고 부강하게 만든 것을 칭송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어 비의 제원을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특히 비의 돌이 비가 세워져 있는 곳의 집안 것이 아닌, 멀리 떨어진 운봉, 양민지역에서 나는 돌을 집안까지 운반해 와서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비의 네면에 글을 새긴 것과 글자의 총수가 1775자라고 하였다. 임교수는 광개토왕비가 충주고구려비와 같은 형식을 하고 있다며 충주고구려비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선돌로 숭배 받았음을 상기시키면서 광개토왕비도 이런 성격을 함께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면서 광개토왕비는 고구려인의 당시 눈길로 바라봐야 함을 강조하였다. 지금 우리들이 갖고 있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의 눈으로 볼 경우 오해와 왜곡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 만주 집안에 있는 광개토태왕비는 일제에 의해 일제침략의 이론적 근거인 '식민주의사관'을 구축하는 중요한 물건으로 이용되었다. 일제는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북한 평양에 있다고 하기 위하여 봉니, 와당, 동종 등 수많은 유물을 조작하여 내놓았다.  이 선상에서 일제가 광개토태왕비문까지 변조할수 있다는 추측도 충분히 가능하다.  

임교수는 <용비어천가>, 성현의 詩구절, 서기1595년 후금의 누르하치를 방문한 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 등을 들어 비가 발견되는 과정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 때 까지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비가 아닌, 금나라 황제비로 알려져 있었다고 하였다.

‘비변조’부분에서는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씨의 변조설을 소개하였다. 변조설은 다음과 같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비를 변조하였다. 일본육군참모본부는 서기1880년 가을 육군참모본부 사카오 중위를 만주일대에 보냈고 서기1883년 4~7월 사이에 집안으로 들어가 현지인을 고용해서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비문의 ‘신묘년’ 조의 기사 등 25자를 일본에 유리하도록 변조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조된 상태의 비문을 탁본으로 만들고 이를 책으로 발간하였다. 이는 한땅(한반도)남부를 고대에 일본이 식민통치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된다. 일본육군참모본부는 비변조를 숨기기 위해서 서기1889년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변조된 비위에 석회를 발랐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후에 탁본된 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 이진희씨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 임기환 교수는 '임나가라'의 위치를 우리나라 남부의 '고령'이나 '김해'로 설정한 견해만 적시했는데, 이는 임교수도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자기는 그곳 전공이 아니라서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대하여 비난이 쏟아 질까봐 회피하는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임교수는 서기1981 중국인 왕건군이 비를 연구한 <호태왕비연구>를 소개하여 비가 변조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언급하였다. 이어 변조논란이 되는 비의 신묘년조에 대한 여러 해석을 소개하였다.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가야 그리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보는 일본의 해석과 주어를 왜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해석하는 견해로 크게 나누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신묘년 조의 기사에만 매달려 해석할 것이 아니라 비문 전체의 내용을 보면서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임교수는 변조된 부분을 가지고 일본이 일제식민주의사관의 주요한 근거로 삼고 있다면서 식민주의사관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임교수는 광개토대왕비문 전반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를 무색케 하는 주장을 이어나갔다. 비문의 영락10년조에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임나가라’의 위치에 대하여 ‘고령설’,‘김해설’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식민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이다. 고대판 조선총독부,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은 임나이다. 임나가 어디에 있었느냐가 관건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임나는 한땅에 존재할 수 없다. 현재의 대마도나 구주지역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임나를 한땅 남부로 보고 이곳을 일본이 식민통치했다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이다.

또한 임교수는 비문의 영락6년조에 백제의 57개성과 700촌을 고구려가 공격하여 차지했다는 부분에서 이 지역이 한강이북지역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57개성이라고 나온다. 한강이북지역이라고 하면 경기북부인데 ‘이 지역에 57개나 되는 성이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상식적인 질문을 해보면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은 자연스럽다.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서기2012년 7월에 중국은 만주 집안일대에서 발견하였다는 집안고구려비를 내놓았다. 이 비석은 가짜라는 유력한 주장들이 쏟아져 나온바 있다. 내용도 우리에게 너무나 불리하고, 비석 자체가 너무 작고, 또한 광개토대왕비나 충주고구려비 등 고구려의 정사면체의 전형적인 비와 너무나 이질적이라는 점이 주요 근거다. 그런데 임기환 교수는 이 비석이 진짜라고 하였다.

한편 임교수는 서기2012년 7월에 중국이 만주 집안에서 발견하였다는 ‘집안고구려비’가 가짜라는 설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교수 자신은 진짜로 본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집안고구려비 탁본도 못 봤다고 하였다. 탁본도 못 보았으면서 누리망(인터넷)에 나오는 보도자료 사진만 보고 어떻게 진짜라고 믿을 수 있냐는 비판이다.

강의가 끝나고 질문을 받았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민족의식이 있었느냐’는 질문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임교수는 지금처럼 민족의식이 없었다고 하였다. 한민족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민족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각 나라가 천하관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삼국이 언어가 같았냐는 질문에도 같을 수도 있고 달랐을 수도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조선의 유민들로 이루어졌다는 것, 고구려 각저총의 신단수와 그 아래 곰과 범이 그려져 있는 것,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상기해 볼 때, 임교수의 이 같은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따른다.

▲ 누리망에 돌아다니는 고구려와 백제의 최대 강역도. 임교수는 이 지도를 띄워놓고 부정적으로 설명을 하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힌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백성들에게 얼마나 실질적으로 도움되었냐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고구려는 농경국가로써 농사짓는 범위가 고구려 강역이라고 하면서 한반도, 남만주, 그리고 요동지방이 고구려의 강역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 교수 자신이 광개토대왕이 숙신까지 정복했다고 주장하였다. 숙신은 오늘날 흑룡강성까지 미친다. 흑룡강성은 농사짓기에 부적합 한 곳이 많다. 임교수의 주장이 서로 모순된다. 식민사관의 기준에 맞추어 설명하려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한편 이번강좌에서도 지난 강좌에 대한 비평문을 나누어 주었다. 상반기처럼 호응이 좋았다. 어떤 중년부인은 더 달라고 하며 아직 안온 친구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다. 어떤 분은 비평문을 줄을 그어가면서 읽었다. 또 어떤 분은 비평문에 자기 견해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도움이 되느냐’고 하니 “아, 그럼요. 정말 중요한 것을 지적하고 있네요.” 라고 하였다. 그분에게는 비평문이 천금 같은 것으로 다가오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비평문 말미에는 바른 역사에 목말라하는 시민들에게 민족사학계에서 강단식민주류사학에 맞서 개설한 ‘바른역사 아카데미’를 소개하였다. 비평문을 나눠주는데 바로 반응이 쏟아졌다. ‘바로 강좌에 가면 되느냐’, ‘참여하려는데 연락은 어떻게 하느냐’는 등 문의를 해왔다. ‘바른역사 아카데미’는 서기2016.9.28.부터 서울교육대학교,종합문화관(교대역13번출구)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진행한다.

연락처: 02-333-8150 (http://cafe.daum.net/mo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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