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학회 하반기 고대사시민강좌 시작...

 

김영하 교수, 주변소국을 통합하면서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하여,

서기전에 개국한 삼국의 개국년도 사실상 부정...

일제가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그대로 답습...

일제식민사학자임이 드러나...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이강래)는 서기2016.9.7. 하반기 고대사시민강좌를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개시하였다. 한국고대사학회가 동북아역사재단을 등에 업고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한사군이 북한이라고 하고 독도를 고의로 제거한 동북아역사지도집을 발간하려다 발각된바 있다. 이러한 이유로 매국식민사학이라고 비판받는 가운데 하반기 고대사시민강좌가 개최되었다. 한국고대사학회는 제1강의 강사로 성균관대 김영하 교수를 세웠다. 김교수는 ‘고대의 영토의식과 진흥대왕순수비’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의에 나섰다. 김교수는 고대 국가의 영토개념은 오늘날과 다르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영토는 국민의 주권이 미치는 공간인데 고대에는 군주의 주권이 미치는 공간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고대국가가 영토를 얻는 방법은 주로 전쟁을 통해서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반농반목국가이고 백제와 신라는 농경국가라고 하였다. 또한 고구려는 수렵과 주변국과의 전쟁을 통해서 얻은 전리품으로 국가를 운영하였다고 하였다. 고구려는 전쟁경제로 사회를 움직였다고 하면서, ‘태조왕’이 동해안의 동옥저까지 복속시킨 것과, ‘미천왕’이 낙랑군과 그 아래의 대방군을 ‘축출’하고 대동강유역의 농경지대를 확보한 것을 예로 들었다.

한편 신라와 백제는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농경으로 삶을 이어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삼국은 주변의 소국을 복속키면서 국가 모양이 갖추어졌고, 대왕이 출현하는 때를 상정하여 이 단계에 와서야 토지와 인민을 포괄하는 영토의식이 생겼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라는 국가모양이 고구려보다 150년 정도 늦었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전에는 아직 전쟁을 통해 주변 소국을 복속시킬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파사왕대(서기80~112)까지도 아직 국가가 아니었다고 하였다. 또한 법흥왕 때 불교가 들어오고 율령을 반포한 것을 강조하여 이때서야 사실상 제대로 된 국가가 되었음을 암시하였다.

김교수는 이어 신라의 진흥대왕순수비들을 통해서 신라의 영토개념을 만들어갔다. 진흥대왕 순수비에는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가 있는데, 이 순수비가 진흥대왕 때의 신라의 영토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일제의 만선사관을 언급하면서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의 진흥대왕순수비에 대한 위작설, 이치설을 소개하였다. 이러한 학설을 통해 일제식민사학자들은 신라의 영토가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져 있는 함경북도까지 확장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김영하 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김 교수는 시종일관, 청중에게 '어디서 사냐', '거기가 집인사람 있느냐'며, 강연을 재미있게 이끌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반도역사만을 확인시켜주는 계산된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김교수의 강의에 대해서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철저히 반도식민사관을 바탕에 깔고 한 것임이 드러났다. 

첫째, 중국의 영토임을 나타내는 중국의 행정기관인 낙랑군, 대방군을 북한 평양일대로 상정하고 있다. 김교수는 이 낙랑군과 대방군이 <삼국지>의 위나라가 설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미천태왕이 이 중국의 식민통치기관을 서기313년에 축출하였다고 하였다. 결국 서기313년까지 중국 조조의 위나라가 북한 황해도까지 차지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즉 북한 지역이 서기313년 까지 중국 위나라 땅이었다는 얘기다. 이것은 일제식민주의사학자들이 만들어낸 한사군 재평양설이고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  김교수는 백제와 신라가 소국들을 병합하기 전에는 국가를 만들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라는 서기112년 까지 아직 국가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는 서기전18년, 57년에 각각 개국했음이 <삼국사기>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신라의 경우 탈해이사금(서기67년)때 이미 주州, 군郡을 설치하여 운용하고 있다. 또한 파사이사금(서기84년)때에 현縣까지 설치된 것이 보인다. 신라는 서기1세기경에 이미 군현제를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현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것은 중앙집권국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까지 국가가 성립하지 않았다고 김교수는 말하고 있다. 정확하게 일제식민주의사관이 만들어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른 주장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주장이다.

셋째, 고구려의 태조태왕이 동옥저를 복속시킨 것은 말하면서 서기55년에 현재의 중국 하북성, 요서지방에 10개의 성을 쌓고 한나라 병사에 대비했다는 명백한 역사는 말하지 않는다. 철저히 반도식민사관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교수는 진흥태왕순수비를 말할 때 마다 각 순수비가 설치된 지역과 관련된 지명을 상기시키면서 방청객에게 ‘거기서 사는 사람 있느냐, 고향인 사람이 있느냐’고 강의 내내 물었다. 그러면서 청중들의 웃음을 유도하였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신라가 반도에서만 존재했다는 것을 각인 시키고자 하는 고도로 계산된 강의기법으로 보였다.

▲ 김교수는 진흥왕순수비를 여러개 소개하면서 신라의 영토를 정했다. 일제의 만선사관학자들이 진흥왕 순수비를 위작으로 보거나, 이치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여, 김교수 자신은 식민주의사관을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식민사관의 핵심인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북한 평양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만선사관비판을 무색케 하였다.

이날 하반기 1회 고대사시민강좌는 지난번 상반기 첫 회 강좌보다는 방청객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그러나 좌석을 거의 채웠다. 그리고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으로 보였다. 하반기 시민강좌도 미리 참여 신청을 받아서 진행되었는데 신청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강의진행에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하였다. 고성이 오가고 욕설이 오갔다. ‘왜 책자를 안주고, 강의 장으로 못 들어가게 하느냐’는 것이다. 어떤 노인은 박물관 밖으로 나와 주최 측을 향하여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면서 분에 못이겨 하였다. 자신은 지방대 교수인데 사전에 신청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하여 크게 기분이 상하였다는 것이다. 주최 측의 윤통성 없는 행동을 이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주최 측은 한성백제박물관 직원들을 동원하여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질서유지보다는 시민강좌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통제할 목적이 역력했다. 사전에 주최 측인 한국고대사학회와 모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질문시간에 김 교수가 추가질문을 하라고 해서 질문하였고, 문답식으로 주고받고 있는데, 뒤에서 직원(권순철, 지방학예연구관)이 간섭을 하며 '그렇게 질문을 하면 되겠느냐'며 따졌다. 어처구니없는 사태로 질문이 중단되었고 그것으로 강좌가 종료되었다. 이번에도 ‘동북공정과 식민사관’이라는 비평문을 300장 가져가서 입구에서 방청객에게 나누어 주었다. 거부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주최 측인 조인성 경희대 교수, 이 모임 간사 등이 스스로 먼저 달라고 하였다. 또한 박대제 고려대 교수도 잘 받았다. 한성백제박물관 직원만이 거부하였다. 다음 강의는 추석 때문에 한주 쉬고 9월 21일에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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