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통치 흔적 고스란히 남아있는 군산금광동 동국사, 일제침략 선봉대로 포교활동 나서신흥동 일본인 히로시 일본가옥, 일본지주의 조선인 수탈 상징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펄펄 끓던 여름이 갔다. 세월은 어김없이 입추立秋를 넘어 벌써 완연한 가을을 알리는 백로白露를 지나고 있다. 나이 들면 세월이 더 빨리 간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 아마도 삶의 주름이 늘어남에 따라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이리라. 그 만큼 있는 그대로 삶은 멀어진다.올해도 4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 이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 인생도 흘러간다. 인간 삶이라는 것이 죽기 전에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 “한국은 불안정한 의붓자식”김종필,“재일동포 지위와 문화재 반환 등도 얘기했지만이들은 사소한 문제다”“‘보상금’ 명목이 아니라도 좋다 돈 만 달라”일본은 ‘독립축하금’으로 박정희 정권에게 돈 줌중국 명나라와 이조선과 사대주의 주종관계,미국과 대한민국 사이에서 되풀이 되는 현대사 3. 한일 관계정상화를 위한 미국의 개입과 압력3) 박정희 정부 시기 (1961~1965년)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자, 미국은 그가 해방 전에는 친일 활동을 하고 해방 후에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 학과 교수) 서기1953년에도 일본은 이랬다"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한일수교 거부이는 이승만의 뿌리깊은 반일감정 때문그러나 말년에 가서는 미국요구에 굴복그 후 허정과도내각, 장면정권은 미국요구를 수용,한일수교에 적극 나서 3. 한일 수교를 위한 미국의 개입과 압력한국과 일본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구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반공 정책에 따라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한일협정은 미국이 1947년부터
박정희 새마을 운동 이전에이미 동학농민봉기시절부터 민간주도 농촌계몽운동존재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박정희 이전 장면정권에서 수립추진 박정희 516군사반란, 장면정권서 확정된 미국자본지원 무산시킴오늘날 경제번영은 국민 희생과 뛰어난 기업가들 때문박정희는 오히려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아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박정희 우상, 박물관, 기념관 등을 수천억원 들여 세웠다. 또 박정희 덕분에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는 교육도 강조되었다. 그래서 박근혜는 탄핵되기 전 까지 국사교과서를 국정화로 바꾸어 박정희 공을 높였다.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정희-박근혜 부전여전인가박정희 한일굴욕협정 뒤에 미국제국주의 자들이 압박박근혜 한미일 삼각동맹에 따른 매국 한일군사정보협정에도배후에 미제가 존재 "당시 남조선 당국은 일제시기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03만 2000여 명에 대해 1인당생존자는 200달러, 사망자는 1650달러라는너무도 보잘 것 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1. 연재를 시작하며지난 6월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적대 관계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다. 눈에 띄게 큰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의혹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당시 주한미국대사,‘인구비율로 따지면 미국보다 한국이 2~3배 많은 병력 투입’ 주장하며한국군 파병 반대베트남 투입된 한국군, 미국에게 돈 받고 파병된 미국 용병 부인 못해베트남 전쟁은 미 제국주의 전쟁에 뛰어든 사실상 제2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의 민낯1960년대 베트남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격렬한 반대와 저항을 받았던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었다. 미국이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까지 저지른 범죄행위였다.첫째, 이러한 침략전쟁에 남한은 처음엔 미국에 간청하다시피 해서 적극적으로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번엔 남의 나라까지 가서 서로 죽인 남북한북조선의 서기1960년대 후반 폭발적인 남한 도발은박정희가 베트남전쟁에 파병한 것이 원인북조선, 프에블로호 나포이후에도 미군 정찰기 격추,미군 직승기 격추, 미군 살해이에 미국이 북조선을 공격하지 않고거꾸로 북조선에 거듭 사과베트남전쟁에 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 5. 북한의 필사적 대응과 파병1965년 3월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시작된 제2차 베트남전쟁은 제2의 한국전쟁이기도 했다. 미국과 남베트남 편에서 가장 대대적으로 싸운 나라는 남한이었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정희,처음 미국요구도 없는데 ‘전투병 보내겠다’제안비전투병도 미국 요구보다 ‘두 배 더 보내겠다’ 앞서감성급한 불평등 한일수교도 미국의 입김이 작용해비율로 따지면 전쟁 일으킨 미국보다 2~3배 많은 병력 투입5만명이 넘는 한국군 파병되다 4. 미국의 무리한 파병 요구와 남한의 지속적 파병1964년 9월 남한의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지고, 1964년 10월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제는 미국이 먼저 공식적으로 한국의 파병을 요청했다.1964년 12월 브라운 (Winthrop Br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과 박정희의 추악한 베트남 전쟁 거래,박정희는 정통성 없는 5.16군사반란 정권 생존이 필요했고,미국은 명분없는 베트남 전쟁 비난을 피하고자 '황색인종' 전투부대가 필요했다 남한에서는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잡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미국의 신임이나 지지를 받는 게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남한이 1980년대 말부터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룰 때까지는 위정자들이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미국의 지지를 얻는 게 정권을 잡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1940년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제국주의 동서열전, 베트남에서 다시 재현박정희 정권, 베트남 전쟁에 우리 청년 총알받이로 보내겠다고 먼저 제안5.16반란 세력은 박정희를 비롯 모두 친일부역, 일본군 출신들식민지치하, 일제 대동아공영권전쟁에학도병, 지원병 명목으로 총알받이로 보낸 것과 흡사미국에게 5.16 반란 불법정권 보호받기 위함 2. 1950~60년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베트남 침략미국은 1950년 소련과 중국이 동맹조약을 체결하자 동아시아 정책을 크게 바꾸었다. 1949년 중국에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소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남한과 북한 다시 서로 적이 되어 싸우다북한, 베트남에 전투기 조종사 파병하여 응전하다베트남 다낭 호치민 박물관에 거대 태극기 앞세운 한국군대 사진,북조선 지도자들의 베트콩 응원 편지 나란히 전시 하다 1. 연재를 시작하며2018년 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65주년 기념일이다. 한국전쟁을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멈추고 있는 상태가 두 세대 이상이나 흘렀다는 말이다. 다행히 4월 27일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올해 안에 전쟁 종식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은 서기1964년에도 헬기로 비무장지대 침범했다가,북한군에 의해 격추된 바있다이에 북한에 사과했으나 얼마 후에 다시 정보수집함정으로북한 영해 도발에 나섰다가 다시 나포되고 결국 사과한다세계제국 미국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5. 미국의 꼼수와 굴욕 미국은 북한과 판문점에서 거의 1년이나 지루하게 실랑이를 벌이다 속임수 한 가지를 생각해냈다. 북한이 만들어준 사과문에 대각선으로 승무원들을 돌려받는다는 문장을 집어넣고 바로 그 밑에 서명하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이 주장하는 영해 침범과 불법
글: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미국, 나포된 푸에블로호 북한한테 돌려받고자,북한에 직접 못하고 소련수상, 영국 수상에게 애걸하다일본수상에게도 부탁하다유엔사무총장에게도 중재요청하다소련수상이 미국에게 던진 말,“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침범했기에 억류된 것 아닌가그런 터에 미국이 핵 항공모함과 구축함 등을북한 쪽으로 보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북한의 주권과 독립성을 인정해라북한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문제를 복잡하게 할 뿐이다" 3. 미국의 전방위 외교1968년 1월 23일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자 미국 국무부는 그날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
글: 박용규(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일제는 일본어를 국어, 조선어를 지방어로 만들었고,조선어를 줄이면서 동시에 일본어로 채워나갔다말기에 가서는 조선어 과목을 폐지시켰다이에 맞서 주시경은 조선어 독립투쟁을 전개했고이를 위해 대종교로 종교를 바꾼다‘국가흥망성쇠는 국어흥망성쇠와 직결된다,국어 잃어버리는 것 민족 멸망을 뜻한다’ 왜정치하는 우리의 말과 글인 조선어와 한글이 침략자에게 국어와 국문의 지위를 빼앗긴 시기였다. 그 결과 대한제국기의 국어였던 조선어는 이 시기에 방언 또는 지방어로 전락하였다.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며 일본어
글: 이재봉(원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정희 대한민국 군대 베트남 전쟁에 투입되다이에 맞서 김일성도 조선민주주의이민공화국 군대 투입시도하다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는 미 베트남전 전력 분산 노림수였다 2.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는 베트남을 돕기 위한 전략1968년 1월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될 무렵 미국에겐 온갖 악재가 겹쳐 터지고 위기가 잇따르고 있었다. 이틀 전인 1월 21일엔 앞에 소개한 북한 무장침투조의 '청와대 습격'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 군대의 '케산 (Khe Sanh) 공습'이 시작됐다.
동학농민전쟁은 李조선왕조와 지배세력의 5백년 탐학과 부패에 대한 징벌동학농민전쟁은 간단한 역사가 아니다지금도 이 전쟁은 유효하다 서기19세기 조선 땅은 민란시대를 넘어 판을 갈아 엎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남겨진 기록과 아직도 각 지역마다 전해오는 이야기가 당시 상황을 가늠케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사실은 당시 상황 전체를 그리지는 못한다. 잊혀져간 더 한 역사가 수면 아래 빙산처럼 파묻혀 있을 것이다.사실 서기1811년에 발발한 서북한 지역의 홍경래 봉기부터 시작하면 거의 1세기동안 이 땅은 전쟁상황이었다. 우리 역사 물 줄기를
글: 박용규(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독립투사들이 분단국가 만들려고 독립투쟁하지 않았다국어학자들의 국어독립투쟁있어 언어가 분단되지 않았다역사학자, 국어학자들이 목숨걸고 싸워 지킨 것이 국학이다 말과 글이 말하는 한국 정체성올해는 분단 73주년이 되는 해이다. 73년 전 우리민족은 일제와 싸워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자력으로만 광복을 쟁취하지 못해 분단되었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들은 분단국가를 수립하자고 목숨을 바치지 않았다. 민족통일이 되었을 때, 독립운동이 완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현재 우리 민족의 경우 남북으로 국
해방 후 이승만은 자신과 이시영에게만 독립투쟁 공로포상했다이시영이 포상 자가 된 것은 구색 맞추기였다조선어학회에서 배출한 국어독립투사 덕에 오늘날 남과 북이 한글 언어생활을 하게 되었다이극로, 최현배, 신영철, 신명균, 이중화, 이윤재 등국어독립투쟁 애국지사들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한글, 세종대왕이 창제했다고 하나,조선 지배층 누가 한글로 시 한편, 책 한권 낸 적이 있는가조선5백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조선 지식인 누구도한글을 쓰지 않았다 일제침략기간 우리가 아는 것은 주로 정치무장투쟁사다. 생각나는 것은 상해임시정부, 김구주석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지에서는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이재봉 교수가 기고하는 현대사 관련 글을 연재합니다(편집인 말).미국은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엄숙히 사죄하며',앞으로는 북한 영해에 침입하지 않겠다고 '확고히 담보하는' 문서에 서명하다 연재를 시작하며서기2018년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푸에블로호와 북미협상에 관해 연재를 시작한다. 지난 4월 '한반도 문제와 미국의 개입'을 주제로 연재하
박정희가 5.16군사반란에 성공하자,일본에 있던 그의 만주 군관학교 시절 선생들이 보인 반응은?“저게 누군가, 다카끼마사오(박정희) 군 아닌가,이제 곧 조선에 다시 갈수 있겠군.” 우리 현대사는 통상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말한다. 이 역사를 돌이켜 보면 자연스럽지 못하다. 일정한 틀 속에 가두어 버린 인상을 받는다. 이념 감옥 속에 가두어 놓고 사육된 역사임을 지울 수 없다. 미국 욕심에 따라 이 땅은 미국이 바라는 역사로 만들어져 갔다.미국은 우리 땅을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다. 남쪽 역사는 미국이 만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