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정권유지와 공산주의자 전력 무마 및 경제개발위해 베트남 파병 꺼내들었다.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과 박정희의 추악한 베트남 전쟁 거래,

박정희는 정통성 없는 5.16군사반란 정권 생존이 필요했고,

미국은 명분없는 베트남 전쟁 비난을 피하고자 '황색인종' 전투부대가 필요했다

 

▲박정희는 5.16군사반란 직후인 서기1961.11. 당시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가 먼저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을 적극 제안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결국 파병에 성공한다. 배경없고 힘없는 대부분의 가난한 병사들이 죽음의 전쟁터로 내 몰린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고관의 아들, 잘사는 집안, 권력있는 집안, 신분이 조금이라도 높은 집안 자식들은 모두 빠져 나갔다. 일제 식민지 조선의 징용병 총알받이 상황의 재현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편집인 주).

남한에서는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잡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미국의 신임이나 지지를 받는 게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남한이 1980년대 말부터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룰 때까지는 위정자들이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미국의 지지를 얻는 게 정권을 잡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1940년대 말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박정희가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가장 먼저 반공을 내세운 것은 미국에 보내는 신호였다. 냉전 시대 미국 대외정책의 가장 큰 목표는 반공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밖으로 미국의 신임을 받기 위해 반공을 내세웠다면, 안으로는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제성장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그는 1961년 11월 워싱턴을 방문해 케네디를 만나기에 앞서 러스크 (Dean Rusk) 국무부장관을 만나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공산주의 위협에 비추어보아 한국은 60만 병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중략) 60만 병력의 가장 확고한 반공국가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날 때까지 될수록 많은 경제 원조를 얻는 게 필요하다."

박정희는 자신의 공산주의 이력에서 벗어나면서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반공을 앞세우는 한편, 경제성장을 위한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던 것이다.

케네디는 베트남에 군사침략을 감행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1961년 4월엔 쿠바의 카스트로 (Fidel Castro)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쿠바 남부의 피그스만 (Bay of Pigs)을 침공했다가 1000명 이상이 죽거나 생포 당한 참담한 패배를 겪은 터였다.

그 무렵 미국이 남한에 가장 원했던 것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였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1950년대 중반부터 재정적자가 심각해졌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방비와 대외원조를 감축해야 했다. 국방비를 줄이려면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규모 및 대외 군사원조를 축소해야 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완강하게 반대하자 그를 달래기 위해 1958년부터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원조를 가장 많이 받던 나라 가운데 하나인 남한에 대한 경제지원을 줄이려면 남한과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미국 대신 남한에 경제 원조를 할 수 있고 나아가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반공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이승만은 군비감축 뿐만 아니라 한일수교도 반대했기 때문에 4월 혁명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을 받고 물러났지만, 박정희는 일본과의 협상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환심을 사야 했던 박정희 정권은 반공을 앞세우면서 베트남 파병을 적극 제안했고, 베트남에 대한 군사침략을 준비하지 않고 있던 케네디 정부는 남한의 베트남 파병이 한일수교 협상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부정적으로 검토했다.

1963년 11월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들어선 존슨 정부가 베트남 정책을 서서히 바꾸기 시작한 가운데, 12월엔 박정희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1963년 12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직접 공격하겠다고 의결했다. 미국은 1964년 3월부터 베트남 문제에 동맹국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구상하고, 4월부터 베트남에 '될수록 많은 국기를 꼽는 운동 (More Flag Campaign)'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존슨 정부는 1964년 5월 한국을 포함한 25개 우방국들에게 북베트남의 공산정권을 패배시키기 위해 병력이나 물자 또는 다른 형태의 지원을 제공해달라고 호소했다. 한국 정부엔 야전병원 1개 부대를 요청함으로써 1964년 6월 한국이 130명의 야전병원 부대와 10명의 태권도교관을 보내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이 왜 베트남에 아직 군사침략을 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전투부대를 보내고 싶어 했다. 존슨 정부는 남베트남이 전투부대를 아직 요청하지 않은 데다 게릴라전쟁의 특성상 특히 제3국으로부터의 지상군 운용이 부적절하다며 거부했다.

1964년 7월부터는 미국이 북베트남 통킹만 연안에서 정찰 활동을 펼치면서 8월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9월 130명의 야전병원 부대와 10명의 태권도교관들을 베트남으로 보냈다.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군 최초의 해외 파병이었다. 

한편, 1964년 3월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동맹국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구상할 때부터 1964년 9월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국의 정치 상황은 몹시 혼란스럽고 위태로웠다. 1964년 3월부터 서울에서 한일협상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나는 가운데 군부 내의 쿠데타 움직임도 있었다.  

주한미군은 권력투쟁엔 중립을 지키되 친미 군부가 박정희 정부를 전복시킨다면 지원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민주공화당 내분도 한일협정에 앞장서고 있던 김종필 의장의 권세 때문에 꽤 심각했다. 

이에 미국은 박정희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을 박정희의 '밀사 (eminance grise)' 또는 러시아 황제의 신임을 얻어 권세를 휘두르다 암살당한 '라스푸틴 (Rasputin)'으로 간주하며, 박정희에게 김종필을 제거하고 공화당을 재건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미국은 한국에 수십 억 달러를 퍼부어도 박정희 정부가 '혼란스러운 독재 (messy fief)'에 머물러있다며 한국을 '커다란 실패작 가운데 하나 (one of our great failures)'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4년 6월 한일협정 반대시위가 격렬해지자 서울대학교 총장은 박정희에게 65명의 대학생들과 많은 교수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정보를 제공하고, 박정희는 이를 빌미로 6월 3일 서울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6.3사태'다.  

하워즈 (Hamilton Howze) 주한미군사령관과 버거 대사는 박정희에게 '미국의 승인이나 동의 (approval or agreement)'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말라는 조건을 붙여, 한국군 2개 사단을 작전통제권에서 풀어주었다. 미국이 박정희와 공화당에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사이에 민간인 1344명과 학생 523명이 체포되고, 학생 191명이 수배되었다. 박정희는 미국의 요구대로 김종필을 미국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1964년 9월 한국의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진 직후에도 미국은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공산주의자들이나 반미주의자들에 의한 쿠데타나 봉기가 일어나면 박정희 정부를 지지하지만, 내부의 권력투쟁엔 중립을 지킨다는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계엄령으로 반대세력을 제압하며,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의 신임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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