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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명분없는 전쟁에 박정희가 정권이익을 위해 뛰어든 것이다.
이재봉 | 승인 2018.08.11 23:48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당시 주한미국대사,

‘인구비율로 따지면 미국보다 한국이 2~3배 많은 병력 투입’ 주장하며

한국군 파병 반대

베트남 투입된 한국군, 미국에게 돈 받고 파병된 미국 용병 부인 못해

베트남 전쟁은 미 제국주의 전쟁에 뛰어든 사실상 제2 한국전쟁

 

▲베트남에 파병되는 백마부대 환송식. 베트남에 파병된 장병들 중에는 고위층 집안, 군 고위직 집안, 재력있는 집안 자식들은 다 빠져 나갔다. 힘없고 배경없는 집안 자식, 가난에 지쳐 목돈 마련하려는 병사들이 죽음의 땅에 던져졌다. 파병된 병사들은 한마디로 원하지 않는 전장터에 끌려간 셈이다. 이것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한국군의 진실에 가깝다. 일제침략기 일제에 의해 지원병, 징병으로 끌려간 조선인 청년들을 연상케 한다. 청년들을 베트남 전쟁터에 몬 자가 일본군 출신 박정희로서 독립군을 학살하던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 처음에는 박정희 반란정권이 먼저 청하여 정권 유지수단으로 파병되었으나 나중에는 미국제국주의 군대의 직간접적인 강압 및 돈을 주고 파병되는 용병형태로 바뀐다. 저 환송식에는 힘 없고 돈 없는 집안의 아들과 딸들이 말없이 숙연하다. 박정희에게 동원되어 환송나온 여학생들과 전장터로 나가는 병사들 알 수없는 슬픔이 진하게 어른 거린다(편집자 말).

베트남 전쟁의 민낯

1960년대 베트남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격렬한 반대와 저항을 받았던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었다. 미국이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까지 저지른 범죄행위였다.

첫째, 이러한 침략전쟁에 남한은 처음엔 미국에 간청하다시피 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한편으로는 미국의 신임을 통한 지지를 받기 위해서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 경제성장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나중엔 미국의 줄기찬 요구와 은근한 압력에 따라 베트남에 파병했다. 미국이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미국의 파병 요청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는 남한 밖에 없었다. 남한의 베트남 파병이 남한의 제안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또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는지 정확하게 경계선을 긋기가 쉽지는 않다. 두 가지 성격을 다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한국 정부의 집요한 파병 요청을 미국 정부가 수용한" 측면이 크다면, 나중엔 "미국의 압력이나 강요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1966년 남한의 추가 파병을 위한 미국의 압력이 거세지자 주한미국대사조차 인구비율로 따지면 남한이 미국보다 2~3배 더 많은 병력을 보냈다고 항의할 정도였다.

둘째,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들은 미국 정부로부터 수당을 받은 용병이었다. 남한 정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받긴 했지만 분명히 미국 정부의 돈이었다. 남한의 베트남 파병이 제국주의 침략을 돕기 위한 것이었든 공산주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었든, 미국 정부가 인정하듯 한국군들은 미국의 용병이었다.

셋째, 베트남전쟁은 제2의 한국전쟁이나 다름없었다. 남한의 육군과 해병대는 남베트남 편에서 그리고 북한의 공군은 북베트남 편에서 싸웠다. 북한은 북베트남을 도우며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막기 위해 비무장지대 남쪽으로 끊임없이 무력침투를 했다. 1968년 1월 북한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비롯한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다양하고 빈번한 공격 행위나 도발은 미군의 발목을 붙잡으며 남한의 베트남 추가 파병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남한의 베트남 파병 효과나 영향을 얘기할 때 미국과의 공조로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는 주장은 재고해보는 게 바람직하다. 온 세계가 비난한 침략전쟁에 미국 이외엔 실질적으로 유일하게 용병으로 참전함으로써 오히려 미국의 '괴뢰나 하인'으로 간주된 측면이 크다. 특히 남한 전투부대가 1966년 8~10월 유엔의 깃발을 들고 베트남에 상륙한 것은 침략전쟁과 무관한 '유엔의 권위를 남용'한 것으로 남한의 시각이나 인식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보여주었다.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따른 미국의 군사 지원으로 안보를 튼튼히 다졌다는 주장 역시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남한의 베트남 추가 파병이 북한의 지속적인 무력침투를 불러와 오히려 전쟁의 가능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특히 1968년 1월 북한의 청와대 기습공격에 미국의 억제가 없었다면 남한의 보복에 의한 남북 사이의 전면전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베트남에 파병된 우리 청년들은 베트남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전장터에서는 살아 남아야 겠기에 잔인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은 인간 이성을 마비시킨다. 억눌린 무의식 속의 잔인함이 폭발한다. 미국제국주의자들과 박정희는 정치탐욕을 위해 한국 및 베트남 청년들을 제물로 삼았다(편집자 말).

연재를 마치며

'베트남 파병: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을 연재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를 받았다. 반세기나 지났지만 이제라도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베트남 파병에 대한 남한 사회의 무지와 왜곡 그리고 억지는 사라지기 어려울 것 같다.

지난달 7월 24일 국회에서 '정전협정 65주년,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구축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가했다. 방청석에 질문 기회가 주어지자 베트남 파병 군인 출신이라는 어르신이 난동을 부리다시피했다. 한반도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으로 남한이 베트남 '패망'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주장 같았다.

1965년부터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등 전투부대가 베트남에 파병되자 초등학생이던 나는 난생 처음 위문편지를 써야 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파월 장병 아저씨께" 자유를 지키느라 얼마나 수고 많으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는 파병 찬가를 불러야 했다.

언제부턴가 내가 사는 익산을 포함해 여기저기 '베트남 참전 유공자 기념비'가 세워졌다. "조국의 명예를 걸고 베트남전에 참가해 조국의 위상을 드높인 참전 유공자들의 명예를 선양하기" 위한 것이다. 베트남엔 한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 위령비가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는데.

베트남에 참전했던 소설가 황석영은 1975년 <무기의 그늘>이란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암시장에 초점을 맞추어 미국의 제국주의적 경제침략을 보여주는 내용 때문에 정부의 탄압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초 다시 시작하다 또 중단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1985년에야 2권짜리 책으로 출판할 수 있었다. 남한의 독재정권들은 베트남전쟁과 관련해 소설에서조차 미국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막았던 것이다.

1995년 이른바 김영삼 문민정부 때도 달라지지 않았다. 김숙희 교육부장관이 "베트남전 파병은 용병을 보낸 것"이란 취지의 강연을 했다가 군부와 여론의 반발에 해임되었다.

▲미국제국주의자들의 명분없는 침략전쟁에 본토, 미국에서 부터 전쟁반대운동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6.25전쟁이후 미국은 군수경제체제를 유지하려고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는 의심을 받는다. 전쟁물자는 계속 생산되고 있고 이를 처리해야 미국 경제가 돌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소비처로 베트남을 택했다는 주장이다(편집자 말).

1998년 드디어 김대중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베트남을 방문해 호찌민 묘소를 참배하고 두 나라 사이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 마저도 야당과 보수 언론의 반발을 불렀다. 2001년엔 서울을 방문한 베트남 주석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해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고 사과 비슷하게 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역시 베트남을 방문해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했다. 사과가 아닌 유감 표명 정도다.

우리는 일본의 한반도 강점 또는 식민통치와 관련해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며 사과하지 않는다고 분노한다. 그런 우리는 미국의 용병으로 베트남을 침략해 양민 학살을 저지른 것에 대해 언제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억지와 역사 왜곡을 중단하고 베트남에 진정한 사과를 할 수 있을까?

베트남은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1986년부터 '도이모이 (Doi Moi)'라 불리는 개혁개방 정책을 성공적으로 전개해왔다.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는 연평균 6~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에 이어 김정은 위원장도 베트남식 개혁개방에 관심 갖는 배경일 것이다.

한편, 미국은 1965~73년 8년 동안 베트남과 전쟁하고 22년이 흐른 1995년 적대관계를 끊고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북한과는 1950~53년 3년간 전쟁하고 65년이 흐르도록 종전 선언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재봉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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