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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 속 왕족상여가 살아남은 까닭은서기19세기 동학농민전쟁에 불 댕긴 시대상황은 생각보다 처참했다.
오종홍 기자 | 승인 2018.06.24 23:58

 

동학농민전쟁은 李조선왕조와 지배세력의 5백년 탐학과 부패에 대한 징벌

동학농민전쟁은 간단한 역사가 아니다

지금도 이 전쟁은 유효하다

 

▲ 이용직 시신을 옮긴 상여. 이용직은 구한말 이조선 왕족으로서 백성 수탈, 탐학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충북 영동군 용산면 신항리 503-1번지에 위치해 있다. 충북 민속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날 함께한 손윤 의암손병희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어렸을 때 이 상여집에 들어가 보곤 했다고 한다. 나중에 어른으로 부터 거기 들어가면 귀신 나온다고 하여 그 후 부터는 안 들어가 갔다고 했다.

서기19세기 조선 땅은 민란시대를 넘어 판을 갈아 엎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남겨진 기록과 아직도 각 지역마다 전해오는 이야기가 당시 상황을 가늠케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사실은 당시 상황 전체를 그리지는 못한다. 잊혀져간 더 한 역사가 수면 아래 빙산처럼 파묻혀 있을 것이다.

사실 서기1811년에 발발한 서북한 지역의 홍경래 봉기부터 시작하면 거의 1세기동안 이 땅은 전쟁상황이었다. 우리 역사 물 줄기를 바꾼 동학농민봉기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지배층의 타락과 학정으로 이미 이조선은 서기19세기 들어서면서 파국을 맞고 있었다.

이조선을 떠 받치는 제도와 구조가 허물어져 있었다. 과거제도 붕괴가 대표사례다. 국가를 이끌어갈 인재를 뽑는 제도인데 이것이 유명무실해졌으니 이조선 왕조 수명이 다했음을 보여준다.

이조선이라는 집을 허물지 않고는 새 세상을 열수 없었다. 지배세력은 끝없는 탐욕으로 기득권을 떠 받치는 이조선 왕조 자체를 허물어 버렸다. 하기사 이들은 자신들의 왕은 명나라 황제요, 조정도 명나라 조정이라고까지 서슴없이 말할 정도였다. 어쩌면 이조선 왕조는 자신들 기득권 충족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서기2018.06.22. 충북 영동군 난계국악기체험전수관에서 동학학회 2018 춘계 전국순회학술대회가 열렸다.

서기19세기 상황을 가장 잘 알려주는 역사줄기는 동학과 이에 터잡은 농민군들의 봉기다. 동학이라는 대하大河와 전국에 걸친 농민봉기라는 대규모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우리나라 전역 군과 마을 단위에는 당시 처절한 역사를 알려주는 유적과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잠든 역사를 깨워 다시 서기19세기 상황으로 이끄는 대회가 있어 화제다. 최민자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학회장으로 있고, 손윤 의암손병희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지원하는 동학학회 지방순회 학술대회다.

서기2018.06.22.~23. 충북 영동군 난계국악기체험전수관에서 열렸다. 영동군이 지원하는 가운데 열린 학술대회는 22일 학술대회와 23일 동학농민군 전적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학술대회에는 학회장, 최민자 교수, 이이화 역사학자, 이상면 전 서울대학교 교수, 김한석 국방대학교 교수 등 20여명의 교수급 학자들이 대거 참여해 동학이 우리 근현대사에 갖는 의의를 밝혔다.

▲동학학술대회 행사장 2층에는 항토민속자료관이 있어 향토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된 맷돌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1만년을 상회하는 곡물을 가는 도구가 우리나라에서 발달되었는데 맷돌이 당시 첨단 곡물가공기구였다. 곡물이 흐르도록 파인 길이 난 저런 맷돌은 우리민족에게서 주로 보인다. 가장 진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 대륙 백제인들이 살았던 백제향에도 이런 형식 맷돌이 발견된다. 전라북도 전주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이날은 충북 영동군 지역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들을 조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동학전적지를 찾아 지방순회학술대회가 말해주듯이 현지에서 벌어진 동학지도부와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을 집중 알리는 자리였다.

이번 학술대회는 동학을 세계화(Globalization), 지역화(Localization)하는 일환으로 열렸다. 그래서 올해 춘계학술대회를 충북 영동이라는 지역에서 개최하게 되었다고 최민자 회장이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은 전적지와 활동현장 방문으로 살아있는 역사로 다가온다. 23일 동학농민군 전적지 현장방문은 여러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 이용직이 살던 영동군 수석리 집이었다. 이곳에 와서 살던 이용직 일화를 보면 당시 민초들 삶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는 구한말 고종의 6촌형으로 알려 졌으며, 일찍이 경상 감사를 지냈다.

▲구한말 탐관오리 전형, 용강 이용직이 탐학으로 삭탈관직당하고 유배와서 살았던 집. 충북 영동군 황간면 수석리에 위치해 있다.

그는 백성에 대한 수탈과 탐학이 심하여 파직되어 유배된다. 처음에는 경상도 칠곡에서 유배살이했다. 나중에는 충북 영동 밀골로 유배지를 옮겼다. 그리고 이날 방문환 충북 영동군 수석리, 그가 머문 집이 마지막 유배지다.

이날 현장 방문 해설을 맡은 명지전문대 채길순 교수는 그가 이곳에 유배와 있으면서도 반성하지 않고 어떻게 이 곳 백성을 학대하고 수탈했는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의 집은 바로 뒤에 동산이 있고 앞에는 큰 길과 너른 논이 펼쳐져 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젊은 여자가 자기 집 앞 길을 지나가면 잡아다가 욕정을 채웠다고 한다. 이런 일이 일상이었다고 한다. 또 동학농민봉기를 전후해서 이 지역 동학도로 부터 여러차례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탐학과 포악성이 어떠했는지 말해준다.

이렇게 죄인의 몸으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갖은 수탈과 행패를 부리던 그는 죽어서도 왕 대접을 받았다. 그가 죽자 왕은 그에게 왕족이 타는 상여를 내려 보냈다. 물론 유명한 풍수관이 그를 위해 명당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용강 이용직 시신을 태우고 갔던 상여가 있는 상여집. 답사일행이 상여집 안내판에 모여있다. 안내판에는 상여와 상여집에 대한 내력이 나와 있었다. 그러나 실상과는 다르게 미화되어 있었다.

그 명당 터는 유배 온 충북 영동을 넘어 경북 김천으로 나왔다. 그래서 상여행렬은 추풍령을 넘어 김천으로 향했다. 왕족상여 행렬이라 장중하고 규모도 컸다.

그런데 상여는 더 이상 추풍령을 넘지 못했다. 김천 백성들이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의 탐학을 김천 백성들도 알고 탐관오리를 김천 땅에 들일 수 없다며 내쳤다. 그가 김천 땅에 묻히면 김천도 부패한 관리들의 탐학 땅으로 주술이 걸릴지 모르기에 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리라.

하는 수 없이 상여행렬은 되돌아 그가 유배 온 영동 용산면으로 되돌아 왔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이용직 밑에서 갖은 학대와 고통을 당한 종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통상 왕과 왕족이 탄 상여는 부속물과 함께 매장지에서 불태우는 것이 상례라고 이날 길잡이를 맡은 최길순 교수가 전했다.

그런데 종들이 이용직이 탄 상여를 빼앗아가 가 버렸다고 한다. 그 덕에 좀처럼 보기 어려운 왕족상여가 살아남아 오늘날 까지 전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용직 시신을 묻을 때의 일화도 전해진다.

최 교수가 일화를 전했다. 되돌아온 상여행렬은 다시 명당자리로 정해진 그의 유배지 집 뒤에 묻혔다. 그런데 관을 안치하려고 땅을 파내려가니 바위가 나왔다. 이에 그대로 묻을 것이냐, 바위를 깨고 묻을 것이냐 다투다가 바위를 어느 정도 깨서 묻자고 결정되었다.

그런데 한참 인부들을 시켜 바위를 깨는데 학 한 마리가 날아가더라고 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바위를 깼다. 그런데 이번에는 학 한 마리가 또 날아갔는데 학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이용직은 명당자리 받아 놓고도 이를 내쳤다고 한다. 이용직을 태우고 갔던 상여는 현재 충북 영동군 용산면 신항리에 충북 민속문화재로 보존되어있다.

▲이날 동학농민전쟁 현장 답사 길잡이 안내는 채길순 명지전문대 교수가 맡았다. 최 교수가 동학농민전쟁 당시 영동군수였던 오형근 선정비 앞에서 내막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영동군 용산면 용산 장터 입구에 세워진 비석하나에 현장답사 일행 발길이 멈췄다. 이 비석 옆에 다른 비석들도 나란히 서 있었다. 맨 끝에 가장 오래된 세월 녹이 서려 있는 비석이 동학농민전쟁에 얽힌 사연을 담고 있었다.

비문에는 ‘...오복형근애민선정비吳僕衡根愛民善政碑’라고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백성을 사랑하여 선정을 베푼 백성의 종, 오형근 비’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오형근은 당시 어떻게 선정을 베풀었다는 것일까.

당시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여 이에 가담한 이 지역 백성들이 죽게 생겼다. 이 지역을 관할하는 영동군수로 있던 오형근이 이 백성들을 구해주었다고 한다. 보은 관아에 정부군이 내려와 백성들을 처형하려고 하자, 오형근이 한겨울임에도 밤낮으로 관아 마당에 엎드려 간청했다.

“끌려온 영동 고을 동학교도를 살려 달라.”고 했다. 턱수염에 고드름이 맺히도록 빌어 결국 구해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서기1994년 당시 90세였던 정태선 옹이 그가 어렸을 때 전해 들었던 얘기라고 한다. 이날 길잡이 한 최길순 교수가 서기1994년에 취재한 것을 전했다.

일행이 다음 답사지로 가기위해 비석에서 벗어나자 비석글자를 확인하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사진을 몇 장 찍고 있는데 아낙네용 햇볕 가리개 모자를 쓴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다가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왜, 그렇게 이 비석을 빤히 봐유, 뭐 있슈?”

그래서 이유를 설명하고 물었다.

“아줌니, 혹시 여기서 얼마나 사셨슈?”

“난 이 동네 사람이 원래 아뉴, 여기로 시집왔슈, 18살 때유”

“그럼, 시집왔을 때도 이 비석 여기에 있었슈?”

“예, 그 때도 있었슈”

이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도 있었다고 하니, 최소한 60년 이상 된 비석이 확실했다. 비석 머리 갓이 시커멓게 닳아 있었다. 한 쪽이 떨어져 나갔는지 시멘트로 바른 흔적이 보였다.

▲ 답사일행이 오형근 선정비에 관심을 보인 후 기자가 자세히 살펴보자, 다가와 호기심을 나타낸 이 동네 한 할머니. 사진찍게 비석 옆에 서 계셔 달라고 했더니 기꺼이 응해주셨다. 건너 마을에서 이곳으로 시집오셨다고 했다. 꽃가마를 타고 오셨다고 하셨다.

그런데 길잡이 최 교수는 동학교도를 구했다하여 선정을 배풀었다고 하는 비석 내용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관리들이 탐학을 하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는 것이 이유다. 당시 이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당시 오형근은 관아창고에 수탈한 곡식과 재물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동학농민군에게 모두 뺏겼다고 한다. 선정비는 후대에 이를 덮고자 지어낸 내용이 아닌가 하는 의혹눈초리를 보냈다.

이날 현장 답사는 이외에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가는 곳 마다 동학농민전쟁의 흔적이 역력했다. 한 마을은 아예 동학농민군 때문에 마을이 생긴 것으로 전하고 있었다. 영동군 황간면 마포실 마을인데 마을 입구에 마을이 생긴 유래를 독특하게 만든 비문에 적어 놓고 있었다.

‘마포실’이라는 글을 새긴 돌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암맷돌이었다. 마을 유래 글을 새긴 검은 비 위에 맷돌을 올려 놓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활동하던 지역인 마포실 마을앞에 세워진 마을유래 비석. 이 마을은 갑오년 동학농민군이 머물면서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동학학회 다음 순회학술대회는 올해 가을에 강원도 원주에서 갖는다. 이 때도 1박 2일에 걸쳐 진행된다고 한다.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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