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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남접은 허구, 체제 판갈이 나선 동학혁명의백학교 의암 백범 정신으로 세상 바꾸는 정치학교 선언하다.
오종홍 기자 | 승인 2018.11.15 23:55

 

손윤 의백학교 이사장,

동학남접은 동학이간질 시키려는 식민사관 불과

북접만 존재 북접의 북은 중국대륙까지 아우름

이덕일 의백학교 교장,

수운 최제우 체제변혁 강조, 왕조타도는 비주장

해월 최시형 체제전복으로 나가다.

화백회의 열어 평등세상 인내천 사인여천 시범

 

▲손윤 의백학교 이사장이 동학혁명공원에서 동학혁명요약 안내판을 가리키며 잘못 기재된 부분을 바로잡고 있다. 그는 북접이 본래 동학본산이며 남접은 후대에 만들어낸 허구라고 잘라 말했다. 동학혁명 역량을 분산, 이간질 시키려는 식민사관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또 동학지도부가 처음 총기포한 날짜도 틀렸다고 바로잡았다.

광화문 촛불봉기 이후 세상이 바뀌길 바랐다. 촛불정부라고 스스로 부르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지 1년하고도 6개월이 지나고 있다. 문 정부가 지금까지 해온 것은 국민들 눈높이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

망국으로 치닫는 부패비리는 여전히 상상을 뛰어 넘고 적폐세력은 다시 반격을 가해 오고 있다. 남북관계만 조금 변했을 뿐이다. 민생은 여전히 도탄 속에 내 던져진 상태다. 살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물에 빠져 죽고 불에 타죽는 것은 촛불봉기 이전이나 이후나 달라진 게 없다.

양극화, 부의 편중으로 소득 상위 10%는 별천지에서 살고 대다수 민생은 물가고와 의식주 해결에 매달려 있는 실정이다. 지금부터 124년 전 지배층의 학정으로 발발한 동학농민전쟁의 민생들과 별로 다른 게 없다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당시 상황이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비록 외세개입으로 실패했으나 그들이 남긴 투쟁정신은 아직 살아있다. 당시 전쟁을 주도한 동학혁명세력의 정신으로 다시 이 시대 문제를 풀어 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동학혁명정신을 이 시대에 적용하고자 하는 시민사회단체들만 해도 부지기수다. 최근에는 3.1민회니, 동학실천시민행동이니, 동학학회니 하는 단체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 새로운 단체들이 다양한 형태로 생겨나고 있다.

▲동학농민군 동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 설치된 기록물. 수구기득권 양반유림들의 민보군이 남긴 동학농민군 학살 일지다.

지난 10월에는 의백학교가 탄생했다. 동학의 의암 손병희, 백범 김구 사상과 철학을 이어받아 이 시대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자는 뜻으로 출범했다. 서기2018.11.10. 에는 충북 보은 장내리 일대에서 동학혁명북접기념사업회 발기인 대회도 열렸다.

민회 회원과 의백학교 학생 및 시민들이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날 행사는 동학혁명 의미를 되새기는 학술발표가 먼저 진행되었다. 앞서 속리산초등학교 마당에서 고천제를 지냈다. 고천제를 마치고 ‘속리산유스타운’으로 이동해 본 행사를 개최했다.

학술발표회는 첫 번째 발제자로 손윤 의암경영연구소 손윤 이사장이 맡았다. 동학혁명을 고찰을 주제로 삼았는데 보은민회와 북접 정체성을 밝혔다. 그는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동학혁명 역사를 바로잡는데 초점을 맞췄다. 동학혁명하면 떠오르는 것이 전봉준이고 전라도다. 이제까지 배운 역사는 전라도가 동학혁명의 중심이고 전봉준이 주도했다고 한다.

이날 손 이사장은 이러한 관념을 깼다. 충북 보은 장내리 일대가 동학혁명 중심지고 해월 최시형이 주도했다고 보았다. 본격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공주, 삼례 집회가 있었다. 이 집회도 보은의 북접 동학 대도소에서 지휘한 것이라고 밝혔다.

동학농민군도 동원령도 여기서 이루어졌고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부대 등 전라도 지역 농민군도 보은 동학사령부의 지휘 하에 있었다는 것이다.

근거로 백범일지를 댔다.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 싸우자’ 하시니 선생의 이 말이 곧 동원령이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진 가운데 파랑 두루마기 입은 손윤 이사장이 발제를 하고 있다.

또 관군과 일본군과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며 당시 북접과 남접이 갈등을 일으켰다고 했는데 역사사실이 아니라고 분명히 했다. 동학혁명에서 남접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중에 일제치하 그것도 서기1940년에 나온 오지영의 <동학사>에서나 남접이라는 말이 나올 뿐이라고 강조했다.

동학혁명을 북접, 남접 구도로 엮은 것은 일제식민주의 사관이라고 보았다. 일제의 음모가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전봉준도 남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뒤 이어 발표한 이덕일 의백학교 교장도 남접존재를 부인했다.

일제치하 대일독립투쟁이 활발하게 일고 있었는데 동학혁명 본 모습이 알려지면 독립투쟁을 더 가열차게 할 것이기 때문에 동학이 내부에서 분열을 일삼았다고 퍼뜨린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는 남접이라는 명칭이나 구호는 동학과 관계없는 것으로써 동학지도부에 혼선과 분열을 야기하려는 당시 일본군이 임의로 만들어낸 용어로 보았다. 손 이사장은 이날 보은에 오기전에 다른 동학관련 단체와 인사들에게 남접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설득했다고 밝혔다.

이어 보은에서 동학인들이 펼친 세 가지 정책을 오늘날에도 펼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세 가지는 재전財戰, 언전言戰, 도전道戰이다. 이 세가지 정책은 상생경제공동체로 양극화를 극복하고 대외정책을 자주적으로 이어가며 동학의 민회로 직접민주주의 실현으로 민이 주인 되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해월 최시형, 의암 손병희, 백범 김구로 이어지는 정신이다. 이 세 인물은 모두 부패 기득권 세력에게 희생되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손 이사장은 이 세분들이 못 이룬 꿈을 우리가 이루고자 이 자리에 온 것이라며 함께 하자고 역설했다.

▲이덕일 의백학교 교장이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

이어 이덕일 의백학교 교장이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사상과 동학혁명사상과의 관계를 풀었다. 그는 먼저 수운 사상을 조명했다. 수운 사상을 동학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비되는 용어가 서학이다. 당시 서학은 천주교다.

그는 서울일대에서 노론 집권당과 양반과 중인 중심이 되어 믿었던 것이 천주교라고 보았다. 또 천주교를 믿는 교도들은 리조선 왕조체제 부당성을 주장하는 정도였지 체제변혁으로 까지 나가지 않았다고 보았다.

반면에 동학은 평민과 몰락한 양반 및 서자들이 중심이 되어 믿었고 지역도 지방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동학은 우리 도는 서학하고는 다르다고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그는 <삼국사기> 최치원 난랑비서문에 나오는 풍류라는 말에 주목했다.

수운이 밝힌 동학과 닮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나라에 현묘한 도가  풍류라고 했는데 왜 하필 바람 풍 자를 썼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남녀 간에 배신을 한 것을 바람났다고 하는데 여기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바람은 가둘 수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만큼 열려있다며 수운도 이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우리 도는 유도 선도 불도 아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이 말이 풍류와 상통하며 사람마다 같으나 다르다는 것으로 풀이했다. 또 수운이 “각자 자기 몸에 도가 있지 못함을 깨닫지 못한다” 고 한 말과 ‘무형은 하늘이고 유형은 사람’이라고 한말을 들며 풍류와 같은 말로 보았다.

▲ 속리산유스타운에서 본 행사에 앞서 보은민회 동지들이 축하공연으로 노래를 하고 있다.

그는 이는 수운의 동학이론에서 가장 특징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당시 수운은 신분제에 반감이 강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이 하늘이다’ 정도 선에서 그친다고 풀었다. 아직 성리학적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동학이 혁명사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해월 최시형 때부터라고 강조했다. 봉건제를 타파하겠다는 주장이 최시형 때 와서 보인다는 게 이유다. 혁명적인 신분제 사상 많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수운은 동학에 대비되는 서학에 맞선 사상과 논리체계를 구축했다. 반면에 해월은 조선내부문제, 신분제, 왕조문제 여러 정치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이덕일 교장은 리조선왕조체제를 뒤흔드는 신분제 타파를 내세우는 것에서 동학혁명사상을 끄집어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주장은 차등이 없다는 것이고 평등사상이다. 이는 수직적 신분제가 지배하는 리조선 성리학질서를 거부하는 것이다.

특히 해월 최시형이 어린아이에게서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야한다는 말에서 동학의 신분제 타파, 평등사상을 찾았다.

그는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보은에서 해월 최시형이 지휘하는 가운데 동학혁명전쟁이 전개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제까지 알려지니 바와 같이 소위 북접과 남접이 갈등구조 속에서 남접이 동학지도부 명령을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해월 최시형의 보은 지도부가 총 지휘하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보다 격렬하게 진행된 곳이 호남지방이었다고 강조했다.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기치를 내걸고 전쟁을 한 것이라고 보았다.

▲공식일정을 마치고 서울에 내려온 의백학교 학생과 시민 및 보은민회 동지들이 모두 한데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토론시간에는 채길순 명지대 교수가 토론문을 통해 손윤 이사장의 발표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보은 취회라는 말이 이미 당시부터 동학혁명군이 쓴 역사적 용어인데 굳이 다시 민회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뭐냐고 따졌다.민회라는 용어를 쓰면 의미가 달라지기라도 하느냐는 것이다.

또 북접이라는 말도 당시 한시적으로 쓴 것인데 북접을 지금에 와서 강조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쏘아붙였다. 그러면서 손 이사장이 보은 동학 순혈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냐며 의혹을 보냈다.

또 백범 김구는 동학과 크게 상관없는 것 같은데 굳이 백범을 끌어들이는 이유가 뭐냐고 따졌다.

이에 손 이사장이 반박에 나섰다. 민회라는 용어를 별도로 쓰는 것은 먼저 당시 선무사로 내려온 어윤중이 조정에 보내는 글에 민회라는 말을 쓴다고 했다. 민회는 민주주의 관점에서도 직접민주주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반박했다.

충북 보은 동학혁명중심지 강조에 대해서도 당시 역사사실이 북점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보은을 강조하는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다고 해명했다. 이어 보은동학북접 순혈주의라는 딱지 붙이기는 옳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백학교 학생들이 반 별로 모여 주제를 설정해 분임토의를 하고 있다.

백범을 동학에 끌어들인다는 것에 대해서도 손 이사장은 동학활동을 한 백범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라고 일갈했다. 천도교 창건사나 동학을 배반하고 친일부역으로 변절한 시천교에서 나온 문헌에 백범활동이 나오지 않는 사례를 들었다.

당시 황해도 해주에 동학접주 15명을 보냈는데 시천교에서는 자신들 관련자 6명만 기록하고 있지 백범 김구는 나오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런 것을 볼 때 토론자가 식민사관으로 백범의 동학활동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이외에 김호성 전 서울교육대학교 총장과 김학광 동학학회 전 후원회장이 토론자로 나섰다. 김 전 총장은 토론 비판보다는 역사는 무엇인가에 대해 뜻을 새롭게 부여했다. 역사를 영어로는 ‘히스토리’라고 하는데 이는 ‘그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으로 지배자 중심, 승자중심의 이야기라고 풀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우리의 이야기로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의 이야기로 역사가 될 때 모두에게 참된 역사가 되는 것이고 민족으로 확대 될 때도 바른 길로 안내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사진 왼쪽 부터 김학광 전 후원회장, 이계웅 박사, 손윤 이사장, 이덕일 교장, 김호성 전 서울교육대학교 총장.

김학광 전 후원회장도 발제자 발표는 흠잡을 곳이 없다고 토론비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수운 최제우의 사상을 조명해 주었다. 흔히들 동학하면 싸우고 투쟁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운 대신사는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러니 어떻게 서로 싸울 수 있는가.” 라며 동학의 본래 뜻을 전했다.

이어 “수운 대신사는 시천주해야 한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모시듯이 모셔야 한다. 사람만 하늘님으로 모셔야 하느냐, 아니다. 만유는 다 하늘님의 영기로 지어졌다. 하늘님이 모셔져 있다.” 라며 동학이 투쟁사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강조했다.

학술발표회가 끝나고 동학혁명북접기념사업회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최현철 보은민회 위원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조정미 발기인 사무국장이 동학혁명북접기념사업회 출범하기까지 경과보고를 했다.

▲조정미 동학혁명북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이어 홍승면 발기인 위원이 동학혁명북접기념사업회 설립 취지문을 낭독했다. 그는 낭독에 앞서 동학혁명정신을 생활현장에서 어떻게 구현해 나갈 것인가 고민하자고 제안했다. 이어 의백학교 분임토의가 이어졌고 각 반에서 대표가 나와 토의한 사안을 발표했다.

한편 이날 밤에는 화백회의가 황선진 민회 대표가 이끄는 가운데 3시간가량 진행되었다. 주제안건을 상정하고 참가자 한 사람도 반대가 없는 전원일치 의안을 도출해내는 것이 목표다. 서로 임금님이라고 부르면서 동학의 만인평등사상,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실천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날 오전에는 같은 장소에서 전날 도출해낸 결과 보고회의를 가졌다. 1박 2일간 주제를 설정하고 과제를 해결하는 시간이었다. 잘한 점과 개선할 점을 찾아 함께 나누었다. 공식일정을 마치고 동학혁명기념공원으로 향했다.

▲홍승면 북접기념사업회 위원이 동학혁명북접기념사업회 설립 취지를 낭독에 앞서 설명하고 있다.

손윤 이사장이 동학혁명연표 앞에서 잘못 기재된 내용을 바로잡아 주었다. 조정미 사무국장의 안내로 공원을 둘러보았다. 공원 맨 꼭대기에 조성된 동학농민동상에 간소하게 술과 제물을 바치고 원혼들을 위로했다. 시천주 주문을 다 같이 불렀다.

어제 점심식사를 한 ‘정이품송가든’에서 다시 점심식사를 하고 보은민회 동지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내년에 다시 만나길 기약하며 서울로 올라왔다.

갑오년 보은군수에게 함께 왜적을 물리치자는 다급한 동학농민군 격문이 귀가에 쟁쟁하다.

“오늘날 왜적과 양적이 나라가운데 들어와 혼란이 극심하다. 지금 서울은 온통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었다. 임진년(서기1592)과 병인년(서기866)의 치욕이 되씹힌다. 그 때를 어찌 차마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삼천리 금수강산이 흉악무도한 짐승들의 발자국으로 가득차다. 우리 수만명은 죽기를 각오하고 힘을 합쳐 저 왜적과 양적을 물리쳐 나라를 지켜내고자 한다. 바라건대 보은군수도 충의로운 선비들을 모아 우리들과 힘을 같이 하라. 협력하여 보국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 계사년(서기1893) 3월 10일 동학창의유생등東學倡義儒生等 백배상서百拜上書 -

보은취회 때 동학농민군이 보은관아 3문에 내걸었던 <보은관아통고報恩官衙通告>

▲동학혁명기념공원 입구에 늘어서 있는 장승들. 머리모양을 양반에서 부터 천민에 이르기 까지 고르게 조각한 장승들이다. 동학의 평등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촛불봉기 때 박근혜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촛불시민들을 진압하고자 했다. 전차, 장갑차로 무장한 군 병력을 동원해 발포까지 상정한 진압작전을 치밀하게 세워두고 있었다. 공수특전부대까지 동원하여 전국을 장악, 학살진압을 예고했다.

민주주의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공권력을 사유화하여 민생을 파탄낸 책임을 물어 촛불을 들었다. 갑오년 동학농민횃불도 이와 같았다. 리조선 정권은 의로 봉기한 자국민을 청나라, 왜군을 끌어들여 학살진압했다. 5백년 부패기득권 체제 수호가 국민생명보다 더 중요했다.

촛불봉기 정국 때는 달랐을까. 박근혜정권이 만약 군병력으로도 타오르는 촛불을 진압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굴복했을까. 아니다. 수도권에 주둔해 있는 미군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6백년 부패기득권을 이어온 세력이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동학혁명은 그래서 지금도 진행 중이다.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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