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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동학혁명 본산, 보은을 가다갑오동학농민전쟁을 불러 온 125년전 부패 학정 상황 지금은 다른가.
오종홍 기자 | 승인 2018.11.11 23:58

 

불의 역사 물줄기 돌리려던 동학혁명 본산

보은 속리산초등학교 마당서 고천제 거행

의백학교 학생들 동학혁명 본고장, 보은서

1박 2일 의백정신 풀무질 활발하게 펼쳐

‘개같은 왜적놈’ 거센 화력앞에 쓰러져 간

동학혁명 원혼들 아직도 피맺힌 한 진동해

 

▲ 충북 보은군 보은읍 성족리 동학혁명공원 맨 윗자락에 자리한 이름없는 동학농민군 동상이다. 왜군의 최신식 무기앞에 무참히 쓰러져 간 동료를 안고 끝까지 싸운 모습을 담았다. 지금으로 부터 125년전 이 땅의 산하는 타락, 부패한 이조선 정권과 이 땅을 침략한 왜적을 쳐 물리고 새 세상을 열고자 떨쳐 일어난 백성들의 피로 물들었다.

"진달래 되어 조선산하 굽이굽이 꽃불밝히리라"

서기1894.12.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여 보은으로 몰려든 동학농민군은 추격해 온 이들과 다시 맞닥들였다. 수백미터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12월 18일 눈까지 지독하게 내려 더욱 추웠다. 짚신바람, 헤어진 옷가지, 농민군들은 불을 지펴 몸을 녹였으나 배고픔으로 이미 기력이 다하고 있었다.

2천6백여명의 농민군이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이날 새벽 일본군의 최신식 화기가 불을 뿜었다. 양반유생과 향리 등으로 구성된 민보군民堡軍이 가세했다. 부패, 타락으로 수명을 다한 이조선 5백년 정권을 떠 받치던 기득권 세력이었다. 유교 성리학 이념으로 개창한 이조선 체제를 위협하는 동학혁명에 반기를 든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서기2016.10.29. 부패, 타락한 박근혜-최순실의 국정파탄으로 촛불시민봉기가 타올랐다. 민보군은 촛불봉기에 반대하여 일어난 '성조기, 태극기' 부대격이다.

보은으로 집결한 농민군은 이미 충남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무라타’ 소총, ‘캐틀링’기관포 등 서양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주력이 무너져 내린 바 있다. 우금치 계곡이 피로 냇물을 이루었다. 일본군 1인당 평균 동학농민군 3백여명이 희생되었다. 일방적 학살이었다.

살아남은 농민군은 태인, 정읍, 입암, 순창, 장수, 무주, 황간, 영동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동학혁명군 대도소(지휘부)가 있는 충북 보은으로 몰려들었다.

재정비를 하기가 무섭게 다시 일본군과 민보군 공격을 받은 것이다. 보은군 장안, 북실 마을 일대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12월 18일 새벽 기습을 받고 이날 오후까지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의 압도하는 화력 앞에 무너져 내렸다. 또 현지 지형지물을 꿰뚫고 있는 지역 민보군 지원받는 일본군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지금 송리산 초등학교 앞에는 냇가가 있다. 동행한 조정미 동학혁명북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이 냇가가 피로 물들었다고 당시 참상을 전했다. 12월 한 겨울 하얀 눈밭을 농민군 피로 물들였다. 이 때 희생된 농민군은 2천 6백여명이라고 한다.

동학혁명공원 벽에 조각된 글이 있다. 이름없이 사라져간 한 동학농민군이 남긴 글이었다.

“석달만에 보은에 돌아왔다. 관군이 부숴 패허로 변한 장안마을 초막들과 살갖을 저미는 매서운 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삼문을 부수고 보은 관아를 점령한 우리 부대는 일본군과 민보군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는 척후병 전갈을 받았다. 포위망을 벗어나 북실마을로 이동했다.

날이 저물자 눈보라가 더욱 거세졌다. 모닥불을 지피어 얼어붙은 몸을 서로서로 기댄 채 온기를 아꼈다. 끝없이 쏟아지는 폭설과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온 마을을 뒤 덮었다. 12월 18일 마을을 둘러싼 산자락에서 적들의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마지막 결전이었다. 골짜기 마다 까마귀에게 눈알을 뺏기고 심장이 파 헤쳐진 채 나뒹굴던 벗들이여, 아, 우리의 피와 살과 뼈가 흩어진 이 산하에 고이 잠들라. 그대들 따라 쏟아지는 눈보라 뚫고 왜놈들 총구 헤치고 이 깊은 역사의 겨울을 넘어가리니. 기필코 눈부신 봄을 맞이하리니. 진달래 되어 조선산하 굽이굽이 꽃불 밝히리니.”

갑오년, 1894년 호랑이보다 무서운 지배세력의 압살 폭정과 쳐들어오는 외세에 맞서 동학으로 무장한 백성들이 제폭구민, 보국안민, 척양척왜 기치를 내 걸고 일어났다. 봉기초기, 한양도성으로 쳐들어가 나라를 망친 권귀들을 척살하고 바로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파견된 선무사 공작에 속아 전주성 점렴으로 그쳤다. 그 사이 조정은 청나라를 끌어 들였다. 이를 틈타 일본군이 들어왔다. 이 땅이 외국군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서기1592년, 임진년 비극이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이해 7월 임금이 있는 경복궁을 점령하고 임금을 감금했다.

고종 임금을 압박하여 구습타파 개혁을 내세워 조정을 친일파 내각으로 바꿨다. 김홍집 내각이라고 한다. 교과서에서 말하는 '갑오경장'이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헌법이라고까지 칭송한다.

이로써 관군도 일본군 손아귀에 들어갔다. 나라를 바로잡고자 일어난 백성을 외국군대와 합세하여 학살하는 형국이 되었다. 자기 백성을 일본군의 총구 앞에 내 던져 버린 것이다. 지배세력은 백성 목숨보다 부패, 타락한 기득권이 우선이었다.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갑오동학농민봉기는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충북 보은에는 동학혁명당시 혁명군을 총 지휘하는 대도소大都所가 있었다. 동학 2대 교주, 혜월 최시형이 지휘하는 가운데 전국의 동학 대접주들을 모아놓고 대접주大接主 임명장을 주고 전투명령을 하달한 곳이다.

여기에는 의암 손병희와 백범 김구도 있었다. 역사에는 이를 북접北接이라고한다.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동학 남접南接을 염두에 둔 말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암 손윤 손병희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연구에 따르면 남접은 존재하지 않았다. 북접만이 있었고 북접산하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이 전라도 동학혁명군으로 거병했다고 한다.

손 이사장은 남접은 대일항쟁기 일제치하에서 만들어낸 식민사관이라고 못박았다. 오지영의 <동학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용어라는 것이 주요근거다. <동학사>는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난 시기에 저술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시기에 나왔다고 한다.

동학혁명을 직접 목격한 매천 황현이 쓴 <오하기문>에는 남접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의백학교 이사장이기도 한 손 이사장이 서기2018.11.10. 보은에서 열린 의백학교 학술발표회에서 이 같이 주장했다.

존재하지 않는 남접을 만듦으로써 동학혁명 역량을 분산시키고 깎아 내리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한다. 오지영의 <동학사>는 이런 큰 그림으로 쓰여졌는데 일제치하에서 일제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이 손 이사장의 추정이다.

동학혁명이 남접, 북접으로 분열되어 오합지졸로 처음부터 실패가 예정되었다는 자학사관이 들어가 있다고 의심한다.  동학혁명 정신이 다시 불붙은 것이 3.1만세혁명이고 이후 대일독립투쟁이 전개되는데 투쟁의 힘을 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손 이사장은 오지영의 <동학사>에 이런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관이 스며있다고 풀이했다.

이날 보은에서는 의백학교와 보은동학민회가 중심이되어 동학혁명북접기념사업회 창립대회 및 의백학교 현장수업이 있었다. 현장수업과 창립발기인 행사는 속리산유스호스텔 지하 강당에서 1박 2일로 진행되었는데 공연과 학술발표회및 분임토의, 화백회의 등으로 진행되었다.

본 대회와 현장수업 들어가기에 앞서 이날 오전 보은 속리산초등학교 마당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지냈다(2부에서 이어짐).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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