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의 갈석산은 한나라때 갈석산이 아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추진한, 민족, 식민사학자로 구성된 역사답사 결과는?

고고학유물로 식민사관 명맥유지하려는 식민사학계,

중국이 내놓는 것은 검증, 비판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

조작, 날조 가능성 전혀 의심하지 않아...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바다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땅에 살고 있다. 이 땅을 우리는 흔히 ‘한반도’ 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반도라는 이름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의도적인 평가가 들어가 있다. 우리를 침략하여 영원히 왜구의 노예로 만들고자 했던 섬나라 왜구가 지어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대륙과 해양을 넘나들 수 있는 한땅이라는 말이 알맞다. 지금은 이 한 땅으로 쪼그라들어 살고 있지만 고구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 한땅은 물론이고 만주대륙과 중국 하북성까지 최소한의 역사무대를 일구고 있었다.

그런데 왜구는 우리보다 먼저 서구화를 완료하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침략사관으로 우리역사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입시켰다. 역사의 공간적 범위는 이 한땅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고 세뇌시켰다. 서기19세기 후반에 완성한 이 침략사관 곧 일제식민주의사관으로 만들어진 역사가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로 둔갑하여 주입되고 있다. 이 식민주의 노예사관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녹아들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어머니 배속에서 나오자마자 이런 환경이고 그 속에서 자라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주의사관에 물들어 있는 지조차 감지하기 어렵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8월 18일부터 21일까지 중국 하북성과 내몽골자치주 그리고 요녕성 일대를 답사하였다. 여기에는 민족사학계와 식민사학이라고 비판받는 강단주류사학을 대표하는 학자들을 구성원으로 꾸렸다. 그리고 몇 개의 일간지 기자들도 포함시켰다. 현지답사를 통해서 민족사학계와 강단주류사학계의 견해 차이를 들어보고 좁히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도 직접 참여하였다. 민족사학계에서는 허성관 ‘미사협’ 상임대표회장, 황순종 역사연구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문성재 박사가 참여하였고, 강단사학계에서는 공석구 한밭대교수, 정인성 영남대교수, 박준형 박사, 윤용구 박사가 참여하였다. 신문사는 중앙, 동아, 경향, 세계일보 기자가 동행하였다.

참여한 민족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3박4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여러 곳을 답사하고 현장 토론과 저녁의 주제발표를 소화해내기는 벅찼다고 한다.

본지에서는 이번 답사에 참여한 민족사학계의 두 명의 학자와의 대담을 통해서 답사의 실체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두 명의 학자는 황순종 역사연구가와 문성재 박사다. 다음은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의 저자 황순종 역사연구가와,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의 저자 문성재 박사와의 대담이다. 민족사학계와 강단주류사학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사군 위치문제를 중점으로 대화가 이루어졌다. 총2부에 걸쳐 싣는다.

 

기자: 다녀온 소감을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황순종: 동북아역사재단이 추진한 이번 답사에서 강단주류사학과 민족사학 사이에 토론의 자리이기는 하였다. 이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낮에는 현지 유적지를 보면서 현장토론을 하고 저녁에는 숙소에 와서 주제발표를 하였다. 언론도 따라감으로써 강단주류사학에서는 긴장할 만한 것이다. 우리는 정말 허물없이 각자 주장하는 논리를 학문적으로 공격과 방어의 시간을 갖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양측은 자기에게 유리한 자료만 인용하고 상호 충분한 문답식의 토론은 이루어지 않았고 의견대립만 있었다. 이것만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래서 제대로 하려면 언론보도목적보다는 학문적 토론장을 마련해서 청중들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도록 하고 시간도 제한 없이 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꼭 해외로까지 가는 것 보다는 아주 좁은 주제를 가지고 시간제한 없이 토론을 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기자: 어디, 어디를 다녀오셨는지요?

 

황순종: 8월 18~21(일요일)까지 해서 산해관의 갈석산과 내륙으로 들어가서 승덕시 홍산문화지역 적봉시와 요하를 넘어 심양으로 해서 귀국하였다. 일정이 3박4일밖에 안되어 4군데를 들러 성곽에서 토론 한번 하고 갈석산과 갈석궁이라는 곳에서 토론하였다. 서로 의견차가 심해서 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또한 시간에 쫓겨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비도 오고해서 철수하는 경우도 많아서 제대로 된 학술답사를 하지 못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자신들의 과오를 무마하려고 한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자: 아무래도 이번 답사모임도 주요 쟁점이 한사군 위치가 어디에 있었느냐 일 것 같은데 말씀해 주시지요.

 

황순종: 이번에 같이 간 강단주류사학을 대표해서 온 사람들은 낙랑군 수성현이 갈석산에 있었다는 기록을 믿지 않는다. 익히 알려진 대로 낙랑군은 원래 평양에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측에서 갈석산에 수성현이 있었다는 자료가 쏟아져 나오니까 슬그머니 평양의 낙랑군이 나중에 대륙으로 이치(교치=교군), 즉 이사 왔다는 식으로 하는 이치론을 들고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근거로 삼는 사료에 나오는 것은 요동에서 요동근처로 이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명확한 문헌적 근거도 없이 슬그머니 평양에서 요동으로 이치 했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낙랑군의 왕준이 장통에게 얘기해서 모용외에게 낙랑군 1천 가구를 들어 귀부했고 모용외가 이 1천 가구를 가지고 새로 낙랑군을 설치했다. 이것을 평양에서 요동으로 낙랑군이 옮겨왔다고 한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결국 바다로 이동했다는 얘긴데 당시 고구려의 해군이 막강해서 불가능하다. 더구나 하나의 군이 몇 십만 명이 되는데 몇 천명가지고 군을 설치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문성재: 교치론은 근거가 박약하다. 교치주장의 근거를 <자치통감>에 나오는 것 가지고 하는데 거기에는 ‘교치, 이치, 교군’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1천호 정도가 옮겨갔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치라기보다는 안치라고 봐야 한다. 오늘날 시리아 난민들의 안치와 같은 경우다. 수용소와 같은 것이다. 1천 가구를 아무리 늘려도 7천여 명밖에 안되는데, 그것을 가지고 군을 설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안치한 수준을 가지고 교치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교치설 자체가 평양에 낙랑군이 존재했다는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굉장히 박약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강단주류사학의 주장 근거가 고고학유물, 교치설, 갈석산 정도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근거는 객관적으로 볼 때는 없다고 본다.

▲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의 저자, 문성재 박사가 낙랑군 재평양설의 근거로 제시하는 고고학 유물의 허구성에 대하여 사례를 들어 증명하고 있다.

황순종: 갈석산에 9명의 황제가 올랐다고 하고 갈석궁이 진시황의 것이라고 하는데, 유물 유적이 별로 없다. 갈석궁이라는 곳에 보이는 것은 병마용 조금 있고 성터도 별로 없고, 주춧돌 흔적정도가 있었다. 그런데 고고학을 전공한 영남대 정인성 교수는 이것을 가지고 한나라 때 가져온 것이라고 하면서 진시황 때 것이라고 틀림없다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는 진시황이 이 갈석산에 온 적이 없다. 당시는 조선의 강역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조조가 지은 시도 있다고 하는데, 조조가 창해를 보고 지었다는 ‘관창해’시다. 그런데  이 갈석산에서 보면 관창해가 안 된다. 이 갈석산은 바다로부터 너무나 많이 떨어져 있다. 현지인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다. 바다가 거의 안 보인다고 한다.

오히려 남쪽으로 임해서 바다를 보아야 한다. 현재 갈석산은 진시황뿐만 아니라 조조도 온 적이 없다. 실제는 개인적으로 볼 때 북경 쪽으로 보인다. 현장에서 의견을 다투고 있는 가운데 내가 이쪽은 확실히 아니라고 했는데도 조선일보는 정인성 교수의 견해를 위주로 실어 주었다.

갈석산 지명은 중국에 여러 군데 있다. 산해관 옆의 현재 갈석산은 진시황이 올 수 없는 곳이다. 2천 년 전에 하나라 우시기에 물을 다스리면서 전국을 9주로 나눈다고 하였고 그 때의 갈석산이 처음 나온다. 그 갈석이 지금의 갈석산이라고 한다. 하우 때부터 진시황 때를 따지면 그 시기가 2천 년간이다. 춘추 전국시대에 동쪽으로 잠식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현재 갈석은 그 당시 갈석산이 아니다.

▲ <임나일본부는 없었다>의 저자, 황순종 역사연구가는 <산해경>과 <관자>를 예를 들면서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은 대륙 북경아래에 있었다고 고증하였다.

기자: 강단주류사학도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자기들의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특히 한사군 위치와 관련하여 주로 이용하는 근거가 연나라 장군 진개가 조선땅 2천리를 뺏었다는 기록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황순종: 동호와 조선의 기록은 동으로 한번 한 것을 그렇게 쓴 것이다. 우리나라가 치우를 모시지 않고 관우를 모시듯이 강단에게 진개가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이병도나 송호정 등의 구학설은 요즘에는 안 통하니 젊은세대들에게는 다른 견해를 내도록 허용하는 것 같다. 강단 쪽의 박준형박사의 경우는 다소 나아져서 요서도 고조선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진개 이후로는 우리 땅이 아니었다고 한다. 언 듯 보면 강단주류사학이 고조선의 역사를 확장하여 예전보다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론은 앞의 세대와 똑같다.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에 따라 망할 때는 북한 평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한나라 한사군,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거기 박물관에 가 보니 연나라 것, 진나라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정인성 교수는 그 유물들이 이곳이 연나라, 진나라의 땅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며 열을 올렸다. 그러나 분명히 고조선 청동검 유물도 있을 텐데 안 내놓고 있을 수 도 있다. 또한 출토 유물 비율을 놓고 볼 때도 고조선 유물이 압도적으로 많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내 놓은 것 만 보고 연. 진의 땅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문성재: 그런 것은 확실한 근거는 없는 것이고 결국에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한다. 연나라 때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서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사군이 만들어질 때는 평양에 있었다고 못을 박는다. 문헌으로 증명이 안 되니까, 고고학자 데려다가 고고학적으로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고학도 신뢰할 것도 없다 유물조작도 일이 아니다. 쉽다. 조작가능성이 있다(2부에서 계속).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