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한 중국의 동북공정, 동이족 지우기와 유물조작 가능성 배제 못해...

본지는 지난 8월 30일에 이어 두번째로, 동북아역사재단이 진행한 중국역사답사에 참여한 두 명의 민족사학자에게 현지답사를 통한 조선(단군)의 대륙 강역을 들어본다.

 

지금 의무려산이 요하의 요령성에 있는데,

중국 인문지리서인 <대명일통지>에는 현재의 북경 근처 계현으로 나와...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명이 동쪽으로 대대적으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어...

 

문성재 박사, 중국의 유물조작은 아주 쉬운일이라고 사례까지 들어...

 

 

기자: 구체적인 유물조작 사례를 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문성재: 누리망에서 찾아보면 예를 들어 하북지역 산서지역에서 농한기에 농민이 겨울에 일손이 남으니까 돈이 필요해서 근처의 북위시대 유적에서 벽돌을 파내서 얇게 갈아서 가루 흙으로 만들어 토용을 만들었다. 인형으로 진시황 토용처럼 만들어 구워서 완벽하게 유물조작해 냈는데 현지의 박물관과 접촉해서 북위시대 유물이라고 속인것이다. 흙만 북위시대 것이다. 북위시대 토용이다. 이것을 박물관에 흥정해서 팔았다. 박물관직원이면 학문적으로 상당히 전문가일 텐데 진짜로 알고 사들인 것이다.

대나무로 된 죽간 문제도 그렇다. 춘추시대나 전국시대 죽간 중에서도 글이 쓰여진 것과 없는 것이 있다. 당대 것이지만 글씨가 없는 민 죽간도 있는데, 글씨가 써져 있는 죽간의 먹물을 긁어내서 새로운 죽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쓸모없는 글이 써져 있는 죽간을 긁어서 먹물로 만들어 쓰는 것이다. 해외로 우회해서 들어오는 것도 있다. 화교를 통해서 전국시대 초나라 죽간이 북경 청화대로 들어오는 것이다. 죽간이 우회해서 오는 것이다. 가짜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어느 정도 고고학적 지식이 있으면 1~2명 정도면 충분히 조작이 가능하다. 동북공정차원에서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체육관 정도에 깔아놓고 발굴되었다고 할 수 도 있다.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이 너무 중국 측 고고유물을 신뢰한다. 갈석궁에 있는 벽돌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공심전이라고 하여 속이 빈 벽돌인데 요령성에서 발견된 것이라며 서안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진나라의 갈석행궁이 현재의 거기 까지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이 갈석산에 관한 중국의 자료나 유물들을 너무나 신뢰하고 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갈석산이 세군데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두 사료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산동성 해풍현 마곡산, 산서성 상산의 구문현 등을 지적하고 있다.

황순종: (식민사학자들은) 신뢰 정도가 아니라 잘되었다고 하고 증거로 삼는다. 조작가능성 일체 고려대상이 아니다. 동북공정 수년간 (공을) 많이 들였는데 데 문헌적 연구만이 아니고 동이족 흔적을 지우고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유리한 것 만들었을 가능성 충분하다. 문헌연구만 하라고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을 리 없다. 일본인이 그랬으니까. (고고유물은) 일단 이모저모 따져 본 다음에 근거로 삼아야 하는데 성경의 교리처럼 맹신하는 수준이다.

문성재: 검증과정의 절차를 생략해 버린다. 그런데 검증절차가 필요 없다면 우리도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 적용을 하기 전에 기본적인 사료비판을 하듯이 고고유물이나 중국측이 내놓은 고고유물 논문에 대한 검증절차 이런 것 전혀 없다.

황순종: 왜 검증을 해야 하는가 하면 문헌사학을 보더라도 이병도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마치 없는 것처럼 모르는 척 해버린다. 삭 무시한다. 그 다음에 정 그 사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는 이 사료는 믿을 것이 못된다. 그렇게 전제를 일단 깔고 시작한다. '이것은 중국 주석가들이 잘못되었다'. '이것은 의심이 간다.'  하다 못해 이렇게라도 하고 논리를 전개하는데, 지금 고고학은 완전히 중국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인용하고 있다. 문헌의 경우는 그래도 사료비판을 하면서도 고고학유물은 일체 비판 없이 사실로 인정하고 끌어다 쓴다.

기자: 중국의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하는데...

문성재: 중국 측에서 낙랑군 평양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유물조작의 가능성도 배재 못한다. 그러나 문헌적으로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고분, 유물 등이 나와서 고고학적 뒷받침이 되니까, 한사군 설치시기 때는 이미 평양에 와 있었다고 하는데 문헌적으로 근거가 하나도 없다.

황순종: (식민사학자들에게) 낙랑군 평양설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이다. 식민사학이 완전히 해체된다. (요즈음 개선된 학설을 주장하는데 이는) 젊은 학자들의 차별화 전략이다. 위에서 승인을 다 받은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되, 결국은 (낙랑군)재평양설이다. 내부 지침을 받은 것 같다.

기자: 한사군 설치 전후하여 조선과 한나라의 경계선을 패수라고 하는데...

황순종: 패수가 여러 개 있다는 설이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른 패수는 상관없고 한나라 당시에 위만이 건너온 그 패수가 중요하다. 결국 위략이 중요한 것은 그 패수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의 열수다. 열수로 볼 때 식민사학이 더 틀렸다. 열수가 더 중요하다. 열수는 산해경에 조선은 열량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 열수의 북쪽을 말하는 것이다. 열량의 부근에 식민사관에 따르면 함경도쯤에 조선이 나와야 한다. 대동강이 열수라고 하기 때문이다.

《관자》에 제나라 환공이 관중하고 이야기 하면서 8천리에 있는 발조선이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게 하려면 제값에 치르게 하자는 얘기가 나온다.  8천리를 송호정은 산동에서 우리나라까지 거리라고 말하는데 어처구니 없는 소리다. 고조선 초기에 제순이 북쪽에 발 숙신과 산융의 이야기 나온다. 서기전 24세기에 이미 조선이 있었다는 얘기다. 하나는 발이고 하나는 숙신=조선이다. 사기 오제본기에 제순 때에 숙신으로 이름이 나온다. 발이 제순 때 북쪽에 있었다. 관자의 발조선, 오제본기에 발 숙신이 바로 북쪽에 있었다. 거리가 정확하게 8천리가 아니라는 이유는 다른 나라를 언급할 때도 거리를 모두 8천리로 쓰고 있다. 의례적인 거리를 말한 것이다. 관용적으로 해외에 있는 나라의 거리표시다. 실제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자: 조선의 강역이나 중국과의 경계를 말할 때 또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요수입니다. 설명 좀 해 주세요.

문성재: 고대사의 요수와 현재의 (요령성)요하하고는 다르다. 중국과 국내사학자들은 요동반도 요양이 요동 요수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 지리서, 지방지를 찾아보면 하북성 일대에서 비슷한 지명이 있다. 의무려산이 요령성이 아니라, 명나라의 황실에서 편찬한 《대명일통지》의 명승지에서는 하북성에 의무려산이 있고 계현으로 나온다. 그쪽에 산이 있다고 나온다. 《대명일통지》 명승지는 인문지리만 뽑아 놓은 것이다. 하바드 대학 옌칭도서관에도...

하북성에도 같은 지명이 있다. 어떤 목적에 의해서 현재의 요령성 요동쪽으로 옴겨 간 것이다. 모용연의 연나라가 오히려 하북지방에 있을 가능성 크다. 모용연이 갈석산 하북지역에서 활동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모용씨가 나라를 연나라로 썼는데 하북성 북경을 연이라고 한다. 만약에 모용연이 요령성에서 발생했다면 나라 이름을 ‘요’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고구려의 서쪽 영역도 하북성으로 더 가야한다.

현재의 거리와 과거의 거리를 비교할 때 고속도로가 없는데 어떻게 옛날의 둘러가는 거리와 같게 해서 계산할 수 있는가, 옛날의 길은 빙빙 돌아서 거리를 측정했다고 봐야 한다. 모용연과 고구려 강역문제와 관련하여 지리 비정할 때 상당히 신중해야 한다. 하북성 등 고구려의 서쪽을 심도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기자: 이번 중국답사에서 강단주류사학의 일원으로 윤용구박사도 갔어요. 그는 한나라 한사군이 설치될 당시에 민족사학계에서 한사군 위치로 비정하는 현재의 창려가 바다라고 했더군요. 한사군을 북경 근처 또는 더 서쪽이라고 보는 또 다른 민족사학은 '비록 조작논란을 받고 있지만 강단주류사학은 한사군 재평양설의 근거로 유물이라도 있는데, 한사군 창려설을 주장하는 민족사학설은 유물조차도 없어서 밀리고 있다'고 비판을 하더군요. 이에 대하여 설명을 좀 해주세요.

황순종: 조선과 그리고 한사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다른 지명들이 많다. 그것을 대입해 보면 나는 개인적으로 북경과 멀지 않은 상건하, 영정하를 습수로 본다. 《수경》에는 누수라고 되어 있다. 누수를 습수라고 하는 판본도 있다는 주석가가 있다. 《수경주》 서문에 나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습수라면 오른쪽으로 선수, 열수가 되는 것으로 나온다. 그 다음에 나오는 강이 습여수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요수는 북경 서쪽에 흐르는 강이다.

문성재: 나는 요수를 난하로 본다. 북경의 동쪽이다. 갈석산 요녕성 수중현이 갈석산이 아니라는 얘기다.

▲ 황순종, 문성재 민족사학자는 모두 한나라 때의 요수나 패수는 현재의 난하나 그 서쪽의 어느 강일 것이라고 하였다. 황순종 역사연구가는 낙랑군을 현재의 천진시 근처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강단주류사학이 한나라 때의 요수도 현재의 요령성 요하라고 주장하는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지명이동을 인식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로 보인다.

기자: 문성재 박사님은 전공이 중문과 관련되어있고 역사학은 전공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고대사를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문성재: 고대사를 하게 된 계기는 원래는 난징대에서 중문과 중국 희곡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에서 백하라고 당송명청시대에 쓰는 중문을 전공했다. 그런데 우리 고대사에 대하여 한문역사사료를 번역해 놓은 것을 보니, 해석이 너무나 이상했다. 안 맞는 것이 많아서 바로 잡아 드리려고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학위도 없으면서 고대사를 한다면서 무시하고 비난했다. 사학을 전공하지도 않고 학위도 없다면서 유사역사학자라면서 비난을 하였다. 거기서 화가 났다. 그렇게 역사연구를 하게 된 것이다. 한문으로 된 1차사료, 원문은 정상적으로 해석할 자신이 있다.

기자: 수경주의 수경에 패수가 임패현을 지난다고 나온다. 이 부분에서 과임패현過臨浿縣의 문구가 나오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고 있어요, 어떻게 보시는지요?

황순종: 착오다. 《한서》 〈지리지〉에 보면 임패현이 없다. 패수현은 있다. 수경의 착오가 아닌가 한다. 패수현을 임한다는 것이 아닌가, 《한서》의 패수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한다.

 

두 민족사학자와의 대담은 약 1시간가량 진행되었다. 향후 보다 내실 있고 탄탄한 민족사학을 구축하기 위해서 몇 가지 제안도 제시되었다. 현재 민족사학자들은 각자 연구를 하고 각자 주장만 하는 경향이 있어 강단주류사학의 주장에 효과적으로 대응을 못하는 면이 있었다. 강단주류사학도 제도권 정규학문교육을 받은 터라, 민족사학계보다 논리구성이라든가 글을 쓰는 방식 등이 일반대중에게 더 설득력이 있는 측면이 많다. 따라서 민족사학자들 끼리 모여서 강단식민사학이 내세우는 쟁점을 주제별로 파악을 하여 서로 대항군 설정해서 토론과 검증을 하자는 것이다. 강단주류사학이 주장하는 것 보다 더 강하게 대항군을 형성해서 끝장 검증을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확실하게 정리를 해두면 강단주류사학이 어떤 근거와 논리로 반격을 해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져 보자는데 모두 동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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