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표현 문장 구조까지 대를 이어 학습하는 도제식민사학...

매국식민사학이 한가하게 '역사순혈주의'를 논할때,

중국과 일본은 우리역사영토 집어 삼키고 있다...

반면에 이들 중에 군계일학처럼 나타난 학자가 김용섭 교수이다. 서울대학교에서 반강제로 쫓겨난 김용섭 교수는 자서전인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2011년)에서 조선총독부의 스에마쓰가 해방 후에도 서울대학교를 들락거린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한 바 있고, 김철준 교수로부터 “김선생 민족주의는 내(김철준)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아”(770쪽)라는 비아냥도 들을 정도였다. 그는 신채호의 역사연구에 대해, “그(신채호)는 우리의 역사는 그것이 무엇을 대상으로 연구한 것이거나를 가리지 아니하고, 최소한 우리나라를 주체로 하고, 우리의 역사사실을 충실히 서술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었다”(621쪽)고 말해 강만길, 이기백과는 다른 시각을 보였다.

또 한국사학의 과제에 대해, “왜곡된 사실의 부분적인 시정(是正)이, 한국사의 정당한 인식을 가능케 할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는 식민주의 역사관을 극복한 위에서, 새로운 한국사관의 수립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대하는 자세, 문제를 설정하는 데서 가치관을 달리해야한다”(536~537쪽)고 피력했다. 뼈대는 그대로 두고 살점을 몇 군데 붙이고 떼어냈다고 해서 새로운 한국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통렬한 지적이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은 사관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채 쓰였기 때문에 한국사의 신론(新論)이 아니라,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조선사의 답습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역사비평’ 여름 호에 실린 세편의 논문에 나타난 공통점은 고조선의 ‘넓은 영토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넓은 영토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의 선학(先學)이요, 안식처인 이기백으로부터 노골화 되었던 바 있다. 이기백은 1981년 국회 진술에서 “영토가 넓으면 위대하고, 영토가 좁으면 열등하다고 하는 식으로 국사교육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의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일제의 반도사관에 대한 철저한 신봉자가 그 반대의 사관을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서 오늘 식민사학이 자신들을 비판하는 민족사학을 사이비니 유사니 하는 비학문적 억지로 비판하는 원조를 보는 것 같다.

없었던 영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고대사료에 거듭 나타나는 고조선의 넓은 강역을 사료대로 설명하는 것이 어떻게 일제 식민사관의 함정에 빠지는 것인지 그 4차원적 논법에 찬탄을 금할 길이 없다. 박정학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철준도 1980년대 중반, 윤내현 교수의 기자조선 학술발표회장에서, “영토가 넓으면 다 좋은 것인 줄 아느냐? 젊은 사람이 예의도 없다”고 책상을 치며 윤교수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두 분 다 이병도의 철저한 후예답게 축소지향의 반도인이다.

윤내현의 조선(단군) 고증이 가장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다...

앞의 강진원씨도 “만주의 ‘고토’를 회복하지 않는 이상 한국은 강대국이 되기 어렵다는 생각, 혹은 만주를 영유하고 있을 때가 전성기였다는 생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만주와 함께할 때 온전한 역사가 되고, 그때 강국이 된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른 고구려를 높이 평가함과 아울러, 고구려의 멸망으로 만선일체 의식이 파탄을 맞이하였다고 보며 반도의 역사를 저평가한 만선사 연구자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이기백의 문장을 그대로 흉내 낸 것으로 행위는 객관적인 매국인데 평가는 애국으로 받고자 하는 이율배반에 다름 아니다.

마치 “너는 틀렸다. 나는 너와 다른 내 사관이 올바르다는 것을 이미 실증했고, 식민사학을 극복했다. 따라서 네가 그 틀린 생각을 자꾸 고집하는 것은 내가 이미 빠져나온 그 식민사학의 논리에 동조하는 꼴”이라는 이기백식 유체이탈 화법이다. 자기들이 아직도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속내를 남들은 알아채지 못하리라는 듯 초연한 척, 상대방이 도리어 식민사학에 빠져 있다고 안타까워하는 역설의 적반하장이다. 이종욱은 이들이 일제의 식민사학과 다른 면도 있으나, 근본적으로 식민사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면에서 ‘후(後)식민사학’이라 혹평하고 있다. 이 후식민사학은 해방 이후 다시 등장하였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매국적 신(新)식민사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 윤내현 “고조선의 후기 강역도”(고조선 연구 상권 371쪽)

그러나 만주와 요서, 그리고 한반도를 아우르는 고조선의 넓은 영토와 위만조선이 고조선의 일개 거수국(제후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윤내현 교수가 중국의 방대한 고대 사료를 가지고 사실로 입증했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윤교수의 고조선 대(大)강역설과 위만조선의 거수국설을 꺾을 강단사학계의 제대로 된 반론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지금 20여 년 동안 골방에서 벌벌 떨고 있다. 그러니 자신들은 무서워서 못 나오고 아직 학위도 따지 못한 어린 제자들을 싸움터로 내몬 것이 아닌가? 전장에서 졸병을 다 죽여 놓고도 ‘나 몰라’하는 못난 지휘관이 연상된다. 사관도 비열하니까 언행도 비열한 것 같다.

윤교수는 『고조선연구』(만권당 발행)에서 다음과 같이 ‘넓은 고조선 영토’(아래 ‘고조선의 후기 강역도’ 참조)에 대해 진실한 양심고백을 한다.

“고조선을 바르게 복원하고 보면 만주지역에 있었던 나라들이 한국사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그 통치영역으로 하고 있었던 국가였고 고조선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부여·고구려·읍루·동옥저·동예·최씨낙랑국·한(韓) 등은 모두가 고조선의 거수국(渠帥國)이었던 세력들이 독립하여 세운 나라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혹시 필자가 한국사의 영역을 만주까지 확대하기 위하여 그러한 의도에 맞추어 고조선을 재구성하였을 것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학문연구는 진실 되어야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앞에서 한 말로써 대답을 대신하겠다. 그리고 만약 필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고조선을 재구성했다면 그것은 역사왜곡으로서, 역사학자로서 큰 죄를 짓는 행위라는 것을 필자는 잘 알고 있다.”(윤내현의 『고조선연구』 상권 20쪽)

차제에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과 같이 ‘축소지향의 단군역사’를 같이 펴고 있는 식민사학자들과 일부 진보학계에 민족의 이름으로 각성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향후 20년 안에 그들의 모든 학설은 휴지조각으로도 쓰이지 못할 것이다. 이기백은 윤내현 교수를 비판하기위해 쓴 논문인 「고조선의 국가형성」에서 독백처럼,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고조선의 ‘실상(實像)이지 결코 그 허상(虛像)’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실상은 드러나고, 허상은 깨져야한다. 하지만 이기백은 윤내현 교수를 향해 고조선의 넓은 영토가 허상이라고 우겼다. 그러나 그것은 결단코 실상일 뿐이다. 자신의 주장이 허상임을 자기 제자들이 알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이병도, 이기백의 ‘신식민사학’을 폐기하고, ‘윤내현사학’을 일으킬 때가 된 것이다(끝).

글: 이찬구(전 카톨릭대 강사,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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