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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포은문화제'를 다녀오다(2)명나라가 망한지 언제인데, 아직도 '숭정'명왕을 찾는가...
오종홍 | 승인 2016.04.26 11:31

무덤앞에서 난장판을 벌이는 문화는 한국밖에 없어...

포은 문화제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여러 가지다. 어찌 보면 엄숙하고 근엄해야하는 죽음과 장례 그리고 무덤 앞에서 ‘난장판’이라고 할 수 있는 큰 잔치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중화문화권에서는 이러한 모습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이질적인 문화다. 일본 만 하더라도 장례는 가족간에만 조용히 치루고 끝난다. 이러한 ‘난장판’은 물론 우리나라 전통 초상 문화 속에서도 대동소이하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상갓집에서 밤새도록 화투치거나 노래하고 술 마시며 왁자지껄하게 노는 ‘난장판’이 그것이다.

그런데 포은 문화제는 무덤 앞에서 난장판 잔치를 벌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난장판은 우리만이 갖고 있는 뿌리문화가 아닌가 한다. 불교문화도 아니고 유교문화도 아니다. 굳이 그 나온 곳을 찾자면 무당의 굿판이다. 무당의 굿은 마지막에 상생, 화해의 굿으로 보통 마무리 된다. 신분의 귀천이나 계급의 높고 낮음이나 선악, 삶과 죽음 등 모든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원래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굿판이다. 이러한 유습은 불교의 空이나 기독교의 天國 그리고 도교의 道로 변형되어 남아 있다.

▲ 포은 정몽주 제단을 행사무대에 차려 놓고 제를 올리고 있다. 원래는 무대에서 1백여미터 떨어진 포은의 묘앞에서 제를 올렸다. 그런데 시민들과 함께 의식을 공유하고자 무대로 옮겼다고 한다.

포은 문화제의 난장판은 좌우에 늘어선 먹을거리와 각종 토속물 좌판에서 찾을 수 있다. 문화제에 온 사람들은 마치 먹고 마시러 온 것처럼 보였다. 포은 문화제를 핑계로 난장판을 즐기러 온 듯 했다. 음식과 술을 마시며 소리도 지르고 노래도 부르고 이를 기회로 마음에 가두어 둔 이야기를 쏟아 낸다. 또한 이를 기회로 한몫 잡으려는 장사꾼들도 즐비하다. 그리고 주최 측에서는 아예 수많은 행사과목을 마련하여 놀이판을 벌여 주고 있었다. 음담패설에 가까운 이야기를 인기연예인이 사회를 보면서 거침없이 재미있게 풀어놓기도 한다. 노래대회, 장기자랑, 백일장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심지어 군악대까지 불러다가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아득한 옛날 한웅천왕께서 신단수에 내려오셔서 세운 신시를 연상케 한다. 신의 시장을 열어 하늘에 굿을 먼저 올리고 사람들은 경향각지에서 몰려들어 서로 물건을 바꾸고 정보를 교환하고 먹고 마시며 즐겼다. 이러한 신시가 오늘날에는 포은 문화제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이어져 오고 있다. 또한 오늘날 전국적으로 남아 있는 5일장도 대표적인 신시의 유습이라고 할 수 있다.

有明조선의 그늘...

▲ 이성계조선을 세운 세력들은 주체적 유학을 하지 않고, 사대노예의 성리학을 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자주적 역사를 폐기하고 중국의 속민으로 살기를 자청하였다. '유명조선' 이라고 된 비석 뒤로 포은 정몽주의 묘가 보인다. 같은 유학자들이라도 이렇게 다를 수 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을 찾을 수 있다. 주체적인 기독교 신앙을 하는 교회가 있는 가 하면, 미국산 기독교에 매몰되어 미국을 어버이처럼 여기는 기독교도 있다.

포은 정몽주의 묘역에는 좌우에 이성계 조선시대 인물들의 묘가 1기씩 조성되어 있다. 같은 성리학을 숭배했지만 고려의 정몽주와 이성계 조선의 두 유생의 묘비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세월의 녹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비석에는 한쪽은 주체적인 성리학의 상징을 나타내고 있었고 또 다른 한쪽은 명나라를 어버이로 바라보는 종속적 성리학을 새기고 있었다. ‘有明朝鮮... ’으로 시작하는 이성계 조선의 비석이 그것이다.

피는 단군의 조선을 이어 받고 있지만, 자신들은 단군의 자손이 아니라 중국 한족, 명나라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명나라의 소유물, 조선이라는 것이다. 명나라 사대주의를 국시로 삼았던 이성계 조선은 고려의 기운이 남아 있던 초기에는 그래도 자주적인 기상을 읽을 수 있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고려의 물이 빠지고 유교를 전체주의적 지배이념으로 삼고 사대주의 종속적 이념이 득세를 하면서 이에 비례하여 우리의 고유정신과 전통문화가 뿌리 체 뽑혀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태조실록을 보면 이조선이 어떤 근성으로 나라를 열었는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래 글은 명나라에게 이성계를 고려권지국사로 세워달라고 빌었는데 결국 그렇게 해주어서 감사함을 표시하며 영원히 떠 받들어 사대하며 명나라의 노예국으로 살겠다는 충성맹세다. 또한 이성계조선을 사실상 기획하고 연 삼봉 정도전의 정신세계를 보면 이성계 조선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더욱 잘 알 수 있다.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정도전(鄭道傳)을 보내어 중국 남경에 가서 사은(謝恩)하고 말 60필을 바치게 하였다. 그 표문(表文)은 이러하였다.
“배신(陪臣) 조반(趙胖)이 남경에서 돌아와 예부(禮部)의 차자(箚子)를 가지고 와서 삼가 황제의 칙지(勅旨)를 받았는데, 고유(誥諭)하심이 간절하고 지극하셨습니다. 신은 온 나라 신민과 더불어 감격함을 이길 수 없는 것은 황제의 훈계가 친절하고 황제의 은혜가 넓고 깊으시기 때문입니다. 몸을 어루만지면서 감격함을 느끼고 온 나라가 영광스럽게 여깁니다...중략...신은 삼가 시종을 한결같이 하여, 더욱 성상을 섬기는 성심을 다하여 억만년(億萬年)이 되어도 항상 조공(朝貢)하고 축복하는 정성을 바치겠습니다(
태조 1년 임신(1392) (홍무25).”

지금 천자天子 (명나라 태조 明太祖)가,“오직 조선(기자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다.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체받아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고 명하였는데, 아마 주무왕이 기자에게 명하던 것으로 전하(이성계)에게 명한 것이리니, 이름이 이미 바르고 말이 이미 순조롭게 된 것이다.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洪範)을 설명하고 홍범의 뜻을 부연하여 8조(條)의 교(敎)를 지어서 국중에 실시하니, 정치와 교화가 성하게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이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善政)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 명나라 천자의 덕도 주무왕에게 부끄러울 게 없거니와,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 학과 8조의 교가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삼봉집 제13권 조선경국전 상(朝鮮經國典 上)”

정몽주와 같이 주체적인 유학을 한 세력은 제거되고, 자신의 영달과 가문의 영광 등 사리사욕의 세력들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개국의 정당성을 중국 명나라에게서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국조 단군은 사라지고 중국인 기자를 이어받아 기자의 후예, 조선을 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중국인 기자가 오기전에는 서로 싸우며 볼 것이 없었는데 기자가 옴으로 해서 우리가 문명개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명나라의 소유, 유명조선이라고 한 것이다.

정몽주 묘역 아래에 조성된 제당에 걸려 있는 편액을 통해서도 유학 사대주의 자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지 오랜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崇禎’ 乙卯년이라고 하여 명나라 연호를 쓰고 있었다. 유생들에게는 어버이 나라,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가 원수였다. 그래서 청나라를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 뒤에도 ‘유명조선’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작은 중국을 내세운 이성계 조선은 세계사의 흐름을 놓쳐 버리고 말년에 가서는 궁궐조차도 지킬 군대가 없어서 일본에게 침탈당하고 결국 나라를 일본에게 내어 준다.

▲ 포은 문화제에서는 중국 주나라의 예에 따라, 대부에게 올리는 4일무를 추었다. 황제에게는 8일무, 제후에게는 6일무를 올리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에 나오는 숫자는 춤을 추는 인원의 행렬 수를 나타낸다. 결국 인원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포은 문화제는 지방문화축제의 하나다. 모든 축제가 그렇듯이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성공적인 잔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생민들은 잔치에서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놀기 위해 모여 든다. 모여든 생민들이 먹고 마시는 데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문화제 잔치 이틀째인 23일에 극명하게 드러났다. 주 행사인 포은 정몽주에 대한 제사차례에도 관람석은 절반가량이 비어 있었다. 대신 행사장 무대 왼편에 자리 잡은 먹고 마시는 장에는 사람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단체로 온 손님, 개별적으로 온 손님 할 것 없이 음식과 안주 그리고 술을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어떤 단체객들은 무엇이 그리도 만족스러운지 ‘위하여’를 온 장이 다 들리도록 쩌렁 쩌렁하게 외쳐댔다.

여기서 관건은 뭐니 뭐니 해도 먹을거리, 마실 거리의 가격이 저렴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여든 서민들은 주머니가 가볍기 때문에 적은 돈으로 최대한 많이 먹고 마시길 바란다. 주최 측과 관련된 지역의 새마을 부녀회 등에서 판매하는 음식과 술만큼은 최대한 싸게 공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비싼 출연료를 주고 수많은 외부 인사를 끌어와서 잔치를 풍요롭게 하는 것도 좋지만, 모여든 생민들이 우선이라고 본다면 출연료를 삭감해서라도 먹고 마시는 것에 지원을 해야 한다. 출연 과목을 보면 문화제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들도 보였다.

이런 것을 조정하여 여기에 소모되는 비용을 모여든 서민들이 보다 풍성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음식부분에 투입할 것을 기대해 본다. 또한 아쉬운 것은 풍물 굿과 같은 굿 놀이 등 우리의 뿌리문화 과목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전통문화와 떼어 놓을 수 없는 포은 문화제라면 이방원의 철퇴로 비명에 간 포은의 혼을 위로하는 무당굿, 그리고 보다 좋은 곳에서 영면을 하라는 뜻으로 풍물패를 불러 1시간가량 풍성하게 치면 아마도 먹을거리 장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던 사람들이 저절로 흥에 겨워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보강하면 더 내실 있는 포은 문화제로 거듭날 것으로 본다.

필자는 비빔밥에 막걸리를 곁들여 마셨다. 잔디로 잘 단장된 무덤지역의 완만한 경사지, 소나무 그늘 아래 누워서 혼자 즐겼다. 내년에는 짝꿍이 생겨, 같이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 소록소록 솟아나는 마음을 안고 저녁 무렵에 행사장을 나왔다.

글 : 오종홍(삼태극http://cafe.daum.net/mookto국사광복단, 풍물연구소 소장)

 

오종홍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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