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가 혼란과 멸망하는 것은 언어와 문자가 불완전, 상실에 있다.

글: 박용규(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언어 보존이 민족 보존

말과 글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함

민족 말과 글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애국

 

▲ 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시기의 이윤재독립운동가 이윤재 모습 ⓒ 이윤재

먼저 일제시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서의 그의 삶을 살펴보자. 이윤재는 마산의 창신학교와 영변의 숭덕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고, 3차의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참여로 1년 6개월간 평양 감옥 생활했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1년간 서대문형무소 생활을 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끝내 함흥형무소에서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그의 반일 의식은 3년간 북경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하면서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더욱 굳어졌다. 북경시절 그는 반제국주의의 인식을 확고히 하였다. 그는 1923년 3월에 북경에서 전개된 전국학생연합회의 대회에서 나온 결의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동명󰡕이라는 잡지에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중국과 조선에 적敵이 됨은 물론이요 일본의 평민에게도 적敵이 된다. 아등은 일체 피압박민족을 연합하여 국제제국주의에 향하여 선전宣戰할지니, 그럼으로 아등은 피압박민족의 연립전선을 고호종합高呼綜合할 것이다.

그는 1924년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담당하였다. 1929년에는 경신학교에서 부임하면서 학생들에게 “너희는 독립을 보리라”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1930년에 동덕여고에서 근무하였다.

이어 1931년에서 1933년까지 연희전문에서 조선어강사로써 학생을 가르쳤다. 학교의 일이 끝나면 그는 조선어학회로 가 학회의 일을 보았다. 그의 언어관에서 우리는 반제의식을 찾을 수 있다.

중국은 언어가 불통일한 나라다. 중국이 역사상으로 왕조의 변혁이 유달리 많았고, 또 현금에 국내가 불통일하야 란마亂麻와 같이 어지러워 혼란 상태에 빠져 있어서 외우와 내환이 그칠새 없게 되는 것도 실상 언어의 불통일에 말미암음이라 할 것이다.

튀르크가 국운이 자꾸 쇠퇴하게 된 원인은 다른 데에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그 언어와 문자의 불완전함에 있다 할 것이다. 세계대전 끝에 토붕와해하여 거의 멸망에 빠진 튀르크는 대영웅 케말 파샤의 손에서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

그의 경우 언어의 통일유무가 국가의 흥망과 직결된다는 인식이다. 중국과 터어키가 언어가 불통일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내우외환에 있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내우외환은 국내불통일, 혼란상태를 말한다. 그에게 있어 언어의 통일은 나라의 독립과 통일, 그리고 내우외환 극복에 기여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민족보전을 위해 조선어사전을 완성하고자 하여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원이 되어 헌신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그의 사전 편찬에 대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글이다.

우리 조선사람은 다들 잘난체 너펄대고 잇지마는, 제 말 제 글 가지고 사전하나 만들어 놓지 못하고도 오히려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다.···제 말 제 글 하나 보전하지 못하여, 결국 사전 없는 민족, 다시 말하면 말과 글이 없는 민족이 되고 만 것이다. 外人들이 우리를 대하여 미개한 인종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을 우리는 달게 받아야 한다.

이 민족적 수치를 기분幾分이라도 씻으려면, 우리는 각자가 힘닿는 대까지 이를 위하여 희생적 봉사가 없어서는 아니 될 줄 안다. 그러나 나는 사전의 완비完編을 계획하자 함이 아니다. 이 사업은 워낙 거창하여 도저히 일시 一人의 힘으로 쉽사리 되는 것이 아님으로써이다. 그러고 이것은 다만 사전사업에 일부 보조역이 됨에 불과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말과 글이 없는 한국민족이 되는 것을 막고자 조선어사전 편찬에 매진하는 한글운동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그는 조선사전편찬회 조직 이후 1930년에서 1931년까지, 그리고 1936년에서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 발생 전까지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 편찬에 전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 이윤재는 서기2013.9.28.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에서 안장되었다. 이전에는 대구에 묘가 있었다.

조선어사전 편찬이 독립운동이라는 주장은 이윤재의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윤재는 지방에서 찾아온 청년들에게 늘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말과 글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한다. 일본이 조선의 글과 말을 없애 동화정책을 쓰고 있으니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글과 우리말을 아끼고 다듬어 길이 후세에 전해야 한다. 말과 글이 없어져 민족이 없어진 가까운 예로 만주족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글을 써 두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해 두면,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후에 이것을 근거하여 제 글과 말을 찾아 되살아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되고 또 민족 운동이 되는 것이다.

이윤재는 조선어사전을 편찬해 두면, 이것에 근거하여 우리 민족이 제 글과 말을 찾아 되살아 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처럼 이윤재에게 한글운동은 민족운동 즉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의 언어관도 언어 민족 일체관에 입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추진한 사전편찬이 재정난으로 사업의 진척이 어렵게 되자, 1933년 겨울부터 사위되는 김병제에게 “조선 사람에게는 조선말 사전 한 권도 없다”라고 늘 말하며 단독으로 조선말사전의 편찬을 시작하여 두 해 동안이나 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조선어학회의 일과 여러 중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조선어의 어휘에 뜻풀이를 하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그는 다시 수감되었다가 옥사하였기 때문에, 조선말사전의 편찬을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사위되는 김병제가 해방 뒤 장인인 이윤재의 사전 유고를 보충하여 <표준 조선말 사전>을 출간하였다.

이윤재의 이 사전은 <조선말 큰사전>이 나오기 전까지 해방 조선에서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그는 조선어의 통일과 조선말사전의 편찬을 통해 나라의 독립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아래는 2013.03.06. 오마이뉴스에 게재한 글-

아직도 제자리 잡지 못한 어느 독립운동가의 묘지

이윤재 선생 묘지, 정부가 국립묘지 안장 추진해야

▲ <한글>지 표지 모습.이윤재 선생이 편집하여 발행함 ⓒ 조선어학회

이윤재(李允宰, 1888-1943) 선생은 일제시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한글학자였다. 일제강점기에 그만큼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윤재 선생의 발자취를 추적하다 보면 가슴이 먹먹하여 안쓰러움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는 숭덕학교 교원시절에 3·1운동을 주도하였기에,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수양동우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기에, 1937년에서 1938년에 걸쳐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이 넘게 감옥살이를 다시 하였다. 출옥 이후에도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우리말사전 편찬사업에 몰두하였다.

일제시기에 이윤재 선생은 여러 중등학교에서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특히 경신학교 교원 시절인 1933년과 1934년 사이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주저 없이 하였다.

"우리가 지금 일본의 총칼 밑에 잠시 눌려 산다고 언제나 이럴 줄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나는 나이도 들었고, 지금 형세로는 감옥에서나 죽게 생겼지만, 너희들은 대명천지 밝은 날에 내 나라 다시 찾고, 독립 국민으로 떳떳이 살날이 꼭 올 것이다.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 그러자면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민재호, 「이윤재 선생님의 조국애」, <경신>42, 1985)

그러면서 그는 조선어 교과목 시간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삼국시대 역사며 태극기며 독립운동사를 틈틈이 가르쳤다. 이처럼 그는 투철한 항일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이윤재의 묘소와 2014년 묘비 건립(애국지사 제1-1묘역 499번) 필자 묘비문 작성

한편 이윤재 선생은 1930년대에 조선어학회에 참여하여 동지들과 함께 언어독립운동인 한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일제로부터 또다시 탄압을 받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그것이다.

조선어학회의 중진이었던 이윤재 선생도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42년 10월 함남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어 일제 형사들로부터 매일 난타를 당한 것도 모자라 6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그는 살아서 감옥에서 풀려나기 어려울 정도로 구타를 당하였다. 함흥감옥에서 복역하다가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43년 12월 8일 옥사하였다. 이윤재 선생은 이렇게 일생 동안 우리 말글을 연구하며 민족혼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침략자들에게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의 영혼을 담는 그릇인 우리말을 유지하여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히 보존하는 투쟁을 전개하다가 침략자에게 희생을 당한 그를 대한민국과 우리국민이 잘 선양을 하였는가? 답은 그렇지를 못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가장 크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묘소이다. 현재 그의 묘소는 불행하게도 남의 땅에 있다. 남의 땅에 이윤재 선생을 계시게 함은 선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이에 필자는 이윤재 선생의 묘소가 제자리를 잡지 못한 과정을 알리고자 한다.

이윤재 선생의 아들 이원갑이 1943년 12월 초에 아버지를 뵈러 함흥감옥에 면회를 갔다. 간수가 머뭇거리다가 이윤재 선생의 사망을 알려 주었다. 이원갑은 아버지를 화장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유골함에 담아가지고 경기도 광주군 방이리에 있는 집으로 모셔왔다. 이윤재 선생이 생전에 개간하여 만든 과수원 근처의 야산(방이리 산 28번지)에 봉분도 없이 가매장하였다.

해방 뒤 함흥감옥에서 나온 이극로 등 조선어학회 간부들은 동지 이윤재 선생의 묘소가 봉분도 없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조선어학회는 제대로 이윤재 선생을 안장하려고 앞장섰다.

1946년 4월 6일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의 사회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방이리(지금의 서울 송파구 방이동) 유족 주택 부근 산상에서 고 이윤재 선생 이장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봉분 옆에 묘비도 세웠다. 묘비의 3면에는 순 한글로 이윤재 선생의 업적이 기술되어 있다. 이장식 이후에야 이윤재 묘소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사업을 하던 셋째 사위가 그만 사업의 실패로 장인 이윤재 선생 묘소와 집터를 남에게 매도하고 말았다. 6·25전쟁 때 대구에 거처를 정한 셋째 사위는 장인이 남긴 산과 집터를 매도하여, 거기서 남은 돈을 바탕으로 장인의 유골을 수습하였다.

1973년 봄에 셋째 사위는 장인의 묘소를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면 이천리 산 48번지(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동)로 다시 이장하였다. 현재 마천산 기슭에 안장되어 있다. 다사읍은 대구에서 변두리에 있어 이윤재 선생의 묘소로 부적당한 장소였다.

더 큰 문제는 그 사위가 또 사업에 실패하여 장인의 묘소까지 다시 남에게 매도한 데서 발생하였다. 묘소라도 분할 측량을 하여 온전히 남겨두었어야 했는데 그렇게도 못하였다. 그 뒤 사위는 장인의 묘소도 지키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현재는 외손자가 묘소를 돌보고 있으나, 임야 주인은 이윤재 선생의 묘소가 이장되기를 바라고 있다. 필자가 알아보니 외손자도 건강이 좋지 못해 외할아버지의 묘소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해 2월 필자가 선생의 묘소를 찾아갔을 때, 무덤 주변을 멧돼지가 파헤쳐 놓아 보기에도 민망하였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소재의 이윤재 묘소.무덤 뒷면에 멧돼지가 파헤친 모습이 보임(현재는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에 안장). ⓒ 박용규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이윤재 선생의 경우 1962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기 때문에, 국립묘지로 안장함이 궁극적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을 나라의 독립에 헌신한 분인데, 그의 묘소를 이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선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국가보훈처 등 정부기관이 나서서 이윤재의 묘소를 조속히 국립묘지로 안장하는 데 힘을 모아줄 것을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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