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는 조선의 마음이며 조선의 혼이다

글: 박용규(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언어란 것은 그 민족의 정신적 산물

그러므로 각 민족의 정신적 특성이 서로 다름을 따라,

그 말이 또한 같지 아니하다"

 

▲ 외솔 최현배 선생. 그는 국어학자로서 일제치하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뤘다. 순 한글쓰기 운동을 주창했다.

4)최현배의 언어관

다음으로 최현배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주시경의 언어 민족 술 의사 상을 발전시켰다.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일 때 학우로부터 ‘조선의 간디’라는 별명을 들은 최현배는 연희전문에서 1926년 4월부터 1938년 7월까지 13년간 철학 과목과 조선어 과목을 강의했다.

그러다가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1938년 8월 25일 강제 사직을 당하였다. 이후 같은 해 9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유예 상태에서 경성보호관찰소의 보호관찰처분을 받았다. 이후 그는 해직상태로 있다가 1941년 5월 연희전문 사무직원으로 근무하다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다시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그는 1910년 주시경과 김두봉의 감화를 받아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자신도 조선어와 한글을 통해 한국 민족의 문화 기초를 세우고자 하였다. 한편 그는 1926년 9월부터 12월까지 65회에 걸쳐 「조선민족갱생의 도」라는 글을 기고하였고, 이 글을 묶어 1930년에 출판하였다.

그는 이 저술에서 ‘한국 민족은 3·1운동에 의해 생기(生氣)를 진작시켰다.’고 격찬하였고, ‘한국 민족의 갱생을 위해 각 개인이 각종 다양한 단체에 1개 이상의 단체에 가입하여 지구적(持久的) 진용(陣容)을 가졌다.

동시에 한국 전체 민족의 대동단결을 통해 최후의 진용을 마련하여 밖으로 다른 민족과 평등하고, 안으로 각 개인이 평등이 됨을 얻는 공동 목표 아래 총출동을 하게 되면 민족갱생이 성취될 것이다’라고 민족운동의 전개를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여 한글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후 이 단체가 조선어학회로 개명한 뒤에도 중진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언어 민족주의자로서 민족운동을 일관되게 전개하였다.

그는 조선어를 조선심과 조선혼으로 인식하여 말하기를 “우리말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산물의 총합체이다. 이 말의 울리는 곳에는 조선심(朝鮮心)이 울리며, 이 말의 펴나는 곳에는 조선혼(朝鮮魂)이 펴난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그 연장선에서 말을 “민족정신의 반사경(反射鏡)”으로 보며 이렇게 말했다.

언어란 것은 그 민족의 정신적 산물이다. 그러므로 각 민족의 정신적 특성이 서로 다름을 따라, 그 말이 또한 같지 아니하다. ···· 언어로써 그 민족 국민의 특성을 察知할 수 있는 것이다.····언어와 그 민족이 막대한 深切한 관계가 있음만 말하여 두자. 민족의 정신활동은 그 특유의 언어를 낳고, 그 언어는 또 그 민족의 정신을 도야하며, 民族感을 확고히 결합하는 것이다.····세계공통어로 실현되는 시대가 온다 할지라도, 각 민족 고유의 언어가 廢絶될 理는 萬無한 것이다.

즉 민족과 언어의 불가분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언어관을 가지고 그는 민족이 ‘자본주의란 사회제도의 한 산물, 한 방편이라고 하더라도 점차적으로도 소멸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혈통·생활 근거지·언어·민족 특질·역사가 다르므로 민족의 구별이 생긴 것이며, 민족이 소멸할 理가 없다.고 민족주의자로서의 역사 인식을 드러내었다.

이처럼 최현배는 조선어와 한글의 연구·정리·보급을 통해 민족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는 이미 1926년에 조선어와 한글의 정리와 보급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가지고 있었다. 즉 정리로는 맞춤법 통일, 표준말 사정, 사전 편찬을, 보급으로는 한글 보급 운동 전개, 한글 교육의 장려, 문맹타파 운동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 뒤 최현배는 한글 운동을 전개하며 우리말에 대한 이론화 작업을 추진하였는데, 󰡔우리말본󰡕(1937)을 통해 드러내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조선어의 어법(語法)에 대해 음성학, 품사론, 문장론으로 분류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하였다.

이어서 그는 <한글의 바른길>(1937)에서는 한글 운동의 본질과 발전을 서술하면서 “우리의 모든 사상, 감정의 발표를 단순히 우리말, 우리글로써 자유롭게 하는 시기-그때에는 우리 조선의 문화가 얼마나 고속도로 발달할 것을 생각해 보라-가 하로라도 속히 실현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말을 자유롭게 쓰는 시기는 일제에서 해방되어야만 가능한 시기다. 우리 말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기를 앞당기는 운동이 한글 운동이라는 게 최현배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민족적 요구 때문에 일어난 운동이 곧 한글 운동이다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저술을 다 순전한 우리말과 우리글로 되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의 출판물 소설과 종교 서적을 포함하여 신문도 순전한 우리글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궁극적으로 일본말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말이 지배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이바지하는 것이 한글 운동의 역사적 과제였음을 최현배가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전시 파쇼체제를 강요하면서 한국 민족을 말살하는 정책을 시행함과 더불어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시기에 최현배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탄압받아 해직상태에 있었다.

이 해직 기간에 그는 방대한 양에 달하는 󰡔한글갈󰡕(1940)을 저술하여 한글의 역사와 학자들의 학설에 관해 서술하였다. 그는 세계문자 가운데 한글의 지위에 관해 기술하면서, 소리글자인 한글이 뜻글자보다 나은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첫째로, 글자 수가 적어 학습에 편리하다. 둘째로, 언어의 음성 통일에 낫다. 뜻글자는 음성적으로 통일할 수 없다. 셋째로, 글자의 수가 적어 인쇄가 편리하다. 인쇄비의 절감은 책 보급에 이바지한다. 값싼 책의 보급은 국민지식의 향상에 이바지한다.

넷째로,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기가 좋다. 타자기를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최현배는 일본어 상용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다시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뒷날 이극로는 이렇게 평가했다. “최현배 선생은 왜정 때 생명을 걸고 우리말의 문법을 집대성하셨습니다.” 최현배의 한글 운동에서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우리는 최현배의 언어관이 언어 민족 일체관에 입각하여 있고, 그의 한글운동 인식에도 반제적 성격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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