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북공정 현장에서 한국고대사학회, 동북아역사재단의 실체를 확인하다.

 

글: 허성관(전 행정자치부 장관)

 

 

중국 역사 왜곡, 날조 심각

요녕성 박물관, 연진장성 북한 평양까지 왔다고 그려

한국고대사학회와 동북아역사재단이 이를 그대로 추종

국고 47억 들여 이렇게 그려

단군조선 땅 요녕성을 예맥, 동호, 산융족 할거한 것으로 왜곡

고구려 산성은 이름만 바뀐 채 있고 옆에는 서낭당 서 있어

임진왜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조선인 출신

 

▲ 요녕성 우하량지역에서 발굴된 서기전 3천년이 넘는 새 형상 옥기. 흔히 홍산문화 옥기로 알려져 있다.

2018년 중국에 있는 우리 역사 현장 답사

② 7월 8일(일요일)
   심양 요녕성박물관 ⤍ 고려성 ⤍ 이여송 일가 묘역 ⤍ 철령시

▇ 만주 곳곳이 우리 역사의 현장이다

오늘은 심양에 있는 요녕성박물관을 관람한 다음 철령시 서북 은주구(銀州區)로 간다. 은주구 가는 길에 연원이 확인되지 않는 고구려성과 임진왜란 때 명나라 지원군 장수로 왔던 이여송(李如松) 일가 묘역을 답사한다. 이동 거리가 대략 150km 정도여서 다소 느긋한 일정이다. 날씨가 흐리고 가끔 비가 뿌려 조금 걱정된다.

요녕성박물관 관람에 기대가 크다. 홍산문화 중심지 적봉박물관과 우하량박물관 등을 예전에관람했을 때 뭔가 전시품이 소홀한 느낌이었다. 중요한 핵심 유물들이 성(省)급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했었다. 요녕성박물관은 규모가 크다.

자세히 살펴보려면 당연히 시간이 많이 소요되겠지만 일정에 맞추어야 하는 탓으로 고대관 3개만 둘러본다. 요녕성 지역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우리 민족 활동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요, 금, 청 등 제국을 건설한 북방민족들이 발흥한 지역이다. 오환(烏桓)과 모용선비(慕容鮮卑)의 근거지도 이 지역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전시가 무질서한 느낌이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 유물들 전시가 뒤섞여 있다. 신석기 시대의 다양한 석기들을 볼 수 있다. 오환, 부여, 고구려, 모용선비 유물들도 맛보기 정도로 전시되어 있다.

홍산문화 유지에서 모습을 드러낸 각종 대표적인 옥기들이 이곳에 대량 전시되어 있다. 옥기 중에서 아래 사진에서 보는 돼지를 닮은 용이라고 하는 옥저룡(玉猪龍), 양쪽에 사람 머리를 새기고 구멍을 세 개 뚫은 장식품, 최초 봉황이라고 불리는 옥봉(玉鳳)은 홍산문화 옥기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이 박물관에서 비로소 이들 옥기의 진품을 보았다. 대략 서기전 35세기 무렵에 만든 유물들이다.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들었을까?

▲ 중국 요녕성 우하량에서 나온 옥저룡(좌)와 두 사람 머리를 형상을 하고 있는 세개 구멍뚫린 옥기(오른쪽)

 이 옥기들의 모조품을 만들어서 우하량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여행객들에게 기념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라 선물로 주기에는 조금 그렇다.

청동기 시대 유물도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다. 북방민족들이 남긴 청동기 유물들은 대부분 무기류, 농구, 마구(馬具) 등인 반면에,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청동 예기(禮器)들은 상(商)나라 이후 유물들이다.

요녕성 서쪽 객좌현에서 출토된 청동 예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전에 하남성 안양의 상(商)나라 유적에서 본 청동기에 비해 정교하고 실용적이다. 요녕성을 비롯한 발해 연안에서 서기전 25세기 무렵에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청동기를 제작했다는 것이 고고학 발굴 결과다.

그런데 오히려 천 년이 지난 상(商) 주(周) 시기에 북방으로 청동기 기술이 전해졌다고 이 박물관 안내문에 설명해 놓았다. 이 역시 역사 왜곡이다.

▲ 요녕성 객좌현에서 출토된 청동기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물로 예맥유적 곡인단검(濊貊遺跡 曲刃短劍)이라는 주제로 비파형 청동단검 여러 개를 전시해 놓았다. 곡인단검은 비파형 단검으로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중국에서는 고조선이라고 쓰지 않고 반드시 예맥, 동호, 산융 등으로 쓴다. 부여와 고구려를 주제로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나 주목할만 한 유물이 보이지 않는다. 요녕성 서부가 모용선비의 주 활동지였던 탓으로 모용씨가 남긴 유물을 제법 전시하고 있다.

아마도 모용선비 도읍지 중 하나인 조양(朝陽) 박물관에 많은 모용선비 유물이 전시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모레 조양에서 묵을 예정이다.

요녕성 박물관은 애써 고구려 유적을 감추고, 발해 유적은 아예 없다. 요녕성이 700여년동안 고구려 강역이었고, 300여년 동안 발해 강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출토 유물이 없어서라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집안 박물관에는 비록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공안이 따라다녔지만 지난 5월에 찾았을 때 고구려 유물이 넉넉했었다. 하얼빈 흑룡강성 박물관에 2016년에 들렸을 때 한 층에 온통 발해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지우려는 것이 아마도 중국의 속내일 것이다.

반면에 요녕성 박물관은 중국 전국시대 연(燕)나라 역할을 부각하여 전시하고 있다. 주(周)나라가 주공의 아우 소공 석(召公 奭)을 제후로 봉한 나라가 연나라이다. 그 중심이 지금 북경이었다.

연나라는 전국시대 전국 7웅(雄)의 하나로 한때 강력한 국가였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북방민족들 침입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래서 그 북쪽에 장성을 쌓았다. 결국 진나라 시황제에게 망했다.

그런데 만리장성 동쪽으로 알려진 연나라 장성을 그린 지도는 중국의 역사 왜곡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진시황이 요동 요서 만주에 장성을 쌓은 기록이 없다.

연나라도 지금 조양(朝陽)시내를 흐르는 대릉하가 서쪽 중심이었지만 요녕성박물관에 걸린 다음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진(燕秦)장성 동쪽 끝을 평양으로 그려 놓았다. 평양도 연나라 강역이었다는 황당한 주장이다.

▲ 전국시대 연(燕)나라 장성 동쪽 끝이 평양이라는 역사 왜곡 지도

생각해보니 이 장성 선이 바로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국고 47억원을 들여 제작했다가 폐기된 동북아역사지도의 고구려 서쪽 국경선과 일치하지 않는가! 아무런 사료적 근거도 없이 그린 지도이다.

한국 고대 사학자들이 얼이 빠졌거나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지도를 그릴 수 있겠는가! 산과 강이 고대나 현재나 자연스런 국경이다. 중국 요녕성박물관의 연진장성 지도와 한국에서 국고로 그린 동북아역사지도는 압록강, 혼강, 요하를 건너고 장백산맥, 천산산맥, 연산산맥을 잘라서 장성을 쌓았다니 기술이 발달된 현대에도 시도하기 어려운 웃기는 지도이다.

중국의 역사 왜곡과 우리 고대사학계가 한통 속이라는 구체적인 실례다. 이러니 한국고대사학회장 모씨는 중국 공항에 내리면 자신을 중국 당국이 모신다고 자랑하더라고 지인이 필자에게 전해주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중국 사료들은 만리장성 동쪽 끝이 진나라 때는 지금 하북성 동북부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 부근이고, 명나라 때는 산해관이었다고 일관되게 전하고 있다.

씁쓸한 기분으로 요녕성 박물관을 나와 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철령시로 출발했다. 심양시 북쪽 외곽에 우리 기업 CJ 사료공장이 눈에 들어온다. 어제는 심양 시내에서 LG전자 공장도 보았다.

외국에서 우리 기업들 공장을 보면 항상 상쾌하다. 조금 더 가자 심양시내를 벗어나고 멋지게 가꾼 도로에 들어선다. 생태회랑도로(生態回廊道路)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도로 분리대는 폭이 15m 쯤 되는데 정원처럼 조성되어 있고, 길 양쪽으로는 폭 50m 정도 가로수 숲이다. 숲 안쪽으로 역시 정원처럼 만들어서 깔끔하게 손질해 놓았다.

중국이 살만해지자 모범적으로 조경한 도로로 보인다. 30분 넘게 달리자 생태회랑도로가 끝나고 오른쪽에 산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왼쪽에도 산이 나타난다. 우회전해서 왕복 2차선 길로 접어들었다. 평범한 우리 시골길과 같다.

현지에서 청룡성(靑龍城)이라고 불리는 고구려성을 찾아야 한다. 조그마한 강이 흐르고 제법 높은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형 지형들이 이어진다. 행정구역은 철령시이다. 물어 물어 청룡성 근처에 도착했다. 넓은 들판은 모두 논이다.

만주의 벼농사는 우리 민족이 개척했고 주위가 온통 논이니 이곳에 우리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촌로에게 청룡성을 물었더니 내를 건너 보이는 야트막한 산에 고려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 한다.

주변 지형을 살펴보니 서북으로 낮은 고개를 넘어 철령시로 이어지고, 남서쪽으로는 우리가 온 길을 따라 심양시로 이어진다. 심양시로 가는 분기점에서 동쪽으로 가는 길은 무순(撫順)시로 통한다.

청룡성이 있다는 산은 서쪽으로 높은 산과 바로 연결되어 있고, 동쪽으로 들판을 지나면 역시 높은 산 줄기이다. 이러니 지금 우리가 온 길이 이 지역을 지나는 유일한 교통로이고, 청룡성은 이 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요충지로 보인다. 지형으로 보아 군사기지가 있음직한 위치다.

촌로가 지시해준 산 밑에 가보니 산 정상에 기와를 얹은 건물이 희미하게 보이고, 성벽 같은 흔적도 보인다. 일행들은 길도 없는 산비탈을 곧장 오른다. 필자는 산에 오르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비가 온 뒤라 길이 미끄럽기도 하고, 아무래도 나이도 있어 혹시 넘어지기라도 하면 일행들에게 폐를 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동행한 옛 친구 이노창 군 신발 뒷축이 망가져 걸을 수 없어 같이 있기로 했다. 한 참 기다리니 일행들이 동쪽 옥수수밭 사잇길로 돌아왔다. 산 오른 편 완만한 비탈에 길이 있었던 것이다. 토성 흔적이 남아 있었고 멀리 보였던 옛 건물은 성황당이었다고 한다.

예상했던대로 산성에서는 북 동 남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고 전해준다. 청룡성 근처에 규모가 큰 고구려 산성인 최진보성(催陳堡城) 있다고 한다. 기록에는 여기에서 가까운 곳에 고구려 남소성(南蘇城)이 있지만 일정에 없어 후일을 기약했다. 고구려 산성들을 체계적으로 답사해서 기록을 남기는 것도 의미있는 답사일 것이다.

▲ 청룡산성 유지, 가운데 정상 벽처럼 드러난 곳이 토성 흔적, 오른쪽 정상 건물이 성황당

청룡산성에서 지나온 길을 10여 km 되돌아 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593년 1월 명나라 지원군 사령관으로 조선에 온 이여송(李如松 1549~1598) 일가 묘역이 길가 평지에 있었다. 이여송 어버지 이성량(李成梁 1526~1615), 이여송, 동생 이여백 묘를 중심으로 묘역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철령시 최진보향(催陳堡鄕) 소둔촌이다. 이여송 선조가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여송은 성주(星州) 이씨인데 7대조가 이천년이고 이 분 동생이 고려말 권신 이인임의 할아버지 이조년이다. 이조년은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는 시조로 잘 알려진 분이다.

이천년의 아들 이승경은 원(元)나라에서 벼슬하다 고려로 돌아와 장관급인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그의 아들 이영이 죄를 짓고 이곳 철령으로 도망와서 정착했다. 그는 무인으로 성공했고 이여송의 아버지 이성량 대에 와서 명나라 요동 지역을 총괄하는 요동총병(遼東摠兵)으로 출세했다.

이성량은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이어 이여송과 그의 막내 아우도 요동총병을 지냈다. 이여송 일가가 명나라에서 성공의 기반을 닦은데는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들 도움이 컷을 것이다.

고려말 조선초 철령 지역에는 조선족, 만주족, 몽고족이 서로 혼인하면서 섞여 살았다고 『조선왕조 실록』이 전한다. 지금 철령시를 소개하는 자료에도 만주족, 조선족, 몽고족이 철령시에 많이 산다고 소개되어 있다.

이여송은 조선으로 출병해서 1593년 1월 왜장 소서행장이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을 탈환했으나 12월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하고 개성으로 철수한 후 일본과 강화회담이 시작되자 1593년 말 본국으로 철군했다. 이여송은 우리에게 썩 유쾌한 인물은 아니다.

조선 지원군으로 왔지만 항시 명나라 입장에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못난 선조 임금은 명나라 군대를 천군(天軍 하늘이 보낸 군대)으로 호칭했으나 그들의 전투 성과는 신통하지 않았다.

사대모화에 찌들은 조선 지배층들은 명나라가 군대를 파견해서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은헤를 베풀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에 달고 살았다. 주체성을 망각한 지배층들이 보여준 우리 역사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여송은 1597년 몰골 차하르부가 요동에 칩입하자 전투에 나섰다가 전사했다. 이여송 아버지 이성량도 청태조 누르하치의 원수였다. 이여송 아우 이여백은 형과 함께 조선 지원군으로 왔었다.

만주족 2만 기병에게 명나라 27만 대군이 섬멸당한 1619년 살이호 전투에서 이여백은 장군으로 참전했지만 겨우 목숨만 건졌다. 살이호는 소둔촌에서 150km 정도이다. 이여송 일가 묘역은 우리 역사의 한자락이다.

만주 곳곳이 우리 역사 현장임을 말해주는 예가 이 소둔촌이다. 요녕성 북쪽 끝 시골 마을에서 몸을 일으켜 명나라 동북 지방 지배자가 된 조선인들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 이성량(뒤), 이여송(왼쪽), 이여백(오른쪽) 묘비

야트막한 고개를 넘자 철령시내로 들어가는 길이다. 날씨는 계속 흐리다. 시골길을 조금 달리자 철령 시내다. 우리 일행은 철령시 서북 은주구(銀州區)로 향했다.

고려의 반발에 밀려 봉집보에 설치한 철령위를 은주구로 옮가면서 철령이라는 행정구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철령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고 지인이 전해준 적이 있다. 시간이 늦어서 박물관을 관람할 수 없어 아쉽다.

내일은 월요일이라 중국 박물관은 모두 휴관이다. 철령시 유래를 소개한 기록 사진을 꼭 찍어야 하는데. 또 기회가 있지 않겠는가.

철령시는 넓은 분지에 자리한 도시다. 위도를 보면 아마도 농업과 유목 지역 경계일 것이다. 철령시는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농사도 잘 되는 잘사는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천흥대주점(天興大酒店)에 여장을 풀고, 근처 사천식 샤부샤브 식당에서 저녘을 먹었다. 국물이 너무 맵다. 다행이 채소가 넉넉해서 좋다(허성관의 2018년 중국에 있는 우리 역사 현장 답사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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