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를 중심으로 요녕성, 내몽골자치구는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새겨진 역사현장이다.

 

글: 허성관(전 행정자치부 장관)

 

고려말 국경선을 증명하는 봉집보를 찾아내다
조선초까지 우리 국경선은 심양 이남이었다
고구려, 발해 후손 청나라, 심양 궁궐에 잠들다

 

▲허성관 전 행자부 장관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지난 7월7일 부터 16일까지 중국 만주일대를 답사했다. 내몽골자치구를 답사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에서 주관하는 중국에 있는 우리 역사 현장 답사에 2013년 이후 8회째 참가한다. 이번 역사 답사 여행 첫째 목적은 고려말 조선 초기 우리 서북 국경 현장을 찾아 보는 것이다.

둘째 목적은 고대 우리 민족 활동의 중심지 중 하나인 요녕성 북부와 내몽골자치주 지역을 살펴보는데 있다. 요녕성 성도 심양(瀋陽)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철령(鐵嶺)시, 서남쪽으로 부신(阜新)시와 조양(朝陽)시를 답사한다.

여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영성(寧城)시, 오한기(敖漢旗), 적봉(赤峯)시, 옹우특기(翁牛特旗), 파림좌기(巴林左旗)로 간다. 파림좌기에서 동쪽으로 통료(通遼)시로 가서 남쪽으로 창무(彰武)시를 거쳐 심양으로 돌아와서 귀국한다.

2018년 7월 7일(토)부터 16일(월)까지 전체 9박 10일 일정이다. 참가 인원은 14명인데 두 분은 조양에서 합류한다. 버스로 이동할 거리가 2,200km 정도다. 지난 답사 여행에서는 이동 거리가 3,500km 내외여서 항상 시간이 촉박했다.

시간에 쫒기다 보니 우선 힘들고 주마간산(走馬看山)인 경우도 많아 여행을 즐기는게 쉽지 않았다. 이번 답사는 하루를 제외하고는 이동 거리가 짧아 비교적 느긋한 일정이다.

① 7월 7일(토요일)
심양 ⤍ 봉집보(奉集堡) ⤍ 심양 고궁

▇ 조선조 초 우리 서북 국경은 요하(遼河) 동쪽 심양(瀋陽) 이남(以南)이었다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어깨에 간편하게 멜 수 있는 가방을 샀다. 사진기 손전화기 여권 지갑 사탕 비상약 등을 넣어 휴대하기 위해서다. 문명이 발전하다 보니 오히려 불편한 점도 있다. 예전에는 주머니에 두어가지만 넣으면 되었는데 이제는 휴대가방이 필요할 정도로 문명의 이기가 늘어난 탓이다.

중국남방항공 심양행 비행기가 오후 1시에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중국 동북지방으로 가는 비행기 길은 언제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 바다 위로 발해만에 진입한다. 오른쪽 요동반도 끝 여순에서 안중근 이회영 신채호 세 분이 대일항쟁기 조국 광복에 헌신하시다 순국하셨다.

세 분의 명복을 하늘길에서 빌었다. 맑은 날이면 요동반도가 훤히 내려다 보이지만 오늘은 뿌연 날씨 탓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연무 탓인지 미세먼지 탓인지는 알 수 없다.

1시간 20분 후에 심양공항에 내렸다. 한국은 지금 장마철인데 이 곳은 햇볕이 따가운 맑는 날씨다. 심양공항을 여러차례 이용한 적이 있어서 생소하지 않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고 통역해줄 김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선생은 지난 6년동안 한가랍 답사를 안내했기 때문에 친한 사이다. 락뮤직(rock music)을 좋아하는 성실한 청년이다. 장가 언제 가는지 물었더니 빙그레 웃기만 한다. 대절한 버스를 타고 봉집보를 찾아 나섰다.

봉집보는 명(明)나라 초에 철령위(鐵嶺衛)라는 군사기지를 설치한 곳이다. 지난 5월 봉집보를 찾느라 요양시 진상둔진(陳相屯鎭) 일대를 5시간이나 헤멨지만 실패했다. 진상둔진 탑산(塔山)아래 봉집보가 있다는 기록만 믿고 진상둔진에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낮은 산줄기 기슭만 헤집고 다녔던 탓이다.

왜 2달 후에 다시 봉집보를 찾으려 왔는가? 봉집보가 고려말 조선초 명과 조선의 국경이였기 때문이다. 봉집보는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한 곳이고, 명나라가 고려에 철령위 이남은 고려 강역이라고 인정했다.

그래서 우리 서북 국경이 어디였는지를 확정하기 위해서 봉집보 위치를 확인하려 나섰다. 우리가 배우는 국사 교과서는 고려말 조선초 북쪽 국경이 서쪽 신의주에서 동쪽으로 함경북도 남쪽 길주(吉州)를 잇는 선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철령위를 ‘고려 후기 명나라가 함경남도 안변, 곧 철령 이북의 땅에 설치하고자 했던 직할지’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1918년 일본인 이케우치 히로시(地內宏)가 안변에 철령이라는 고개가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우긴 것이다.

이 철령은 백사 이항복이 귀양가면서 ‘철령 높은 곳에 쉬어가는 저 구름아, 고신 원루를 비삼아 띄워다가, 님 게신 구중 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라는 시조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광복 후에도 주류라고 자칭하는 매국 강단사학사들이 맹목적으로 이께우치 히로시 주장을 추종하여 교과서와 백과사전에 버젓이 기록된 부끄러운 사실이다.

그러면 고려 조선 명나라 역사책에 기록된 철령위는 어디일까? 명나라는 1371년(홍무 4년) 요동도지휘사를 신설하여 군사기지 25개 위(衛)를 관장하게 했는데 제일 북쪽 위가 철령위였다. 명나라 정사인 『명사(明史)』 「지리지」 내용을 보자.

“철령위 서쪽에 요하(遼河)가 있고, 남쪽에 범하(汎河)가 있고, 또 남쪽에 소청하(小淸河)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유입된다.....범하성이 철령위 남쪽에 있다....동남쪽에 봉집현이 있는데 즉 옛 철령성으로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홍무 초에 설치했다가 곧 폐지했다.”

이 기록은 철령위가 요하(遼河) 동쪽 가까운 곳에 있고 지금의 봉집보가 철령위 자리이며,  봉집보가 고려와 국경을 접하며, 이 철령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봉집보가 요하와 가깝고, 요양, 심양 근처이며, 고려와 국경지대에 있었다는 엄연한 기록이다. 매국식민사학자들은 이 역사 기록을 애써 무시한 양심 불량자이거나, 공부하지 않은 그야말로 유사역사학자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다.

 

▲심양공항 남쪽 25km 봉집보 마을에 있는 봉집보유지 표석

역사 답사에는 역시 운이 따라야 한다. 싱양공항에서 버스를 타자 곧장 봉집보로 간다고 한다. 지난 5월에 그렇게 헤메고도 찾지 못했는데! 우연히 봉집보 위치를 아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심양공항에서 남쪽으로 정확하게 25km를 달려 봉집보에 도착했다.

평원에 있는 제법 큰 마을이다. 낯선 사람들이 골목길에 들어서니 더위에 지친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댄다. 골목길 이름이 성 서쪽거리(城西街)로 되어 있어 뭔가 성 유적이 있을 것 같다. 주민들을 붙들고 물어보니 모두들 옛 군사기지가 있었다고는 하는데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

사람 키보다 큰 옥수수가 빼빽하게 들어서 있고, 오전에 비가 내린 탓으로 길이 군데군데 질퍽하다. 중년 부인이 여기라고 알려준 장소에서 살펴보니 토성이 있었을 것 같은 흔적이 보이고, 평지에 인위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조그만 골짜기가 연결되어 있는데 해자였던 것처럼 보인다. 물은 없고 역시 옥수수가 울창하다.


옥수수밭 어딘가에 흔적이 있다면 찾을 수가 없겠구나 하는 실망감이 든다. 골짜기 오른쪽에 오미자 농장이 있었다. 다시 찾아보자며 오미자 농장을 질러 나오자 자전거 탄 노인을 만났다. 노인이 안내해주겠다고 나선다.

온 길을 200m 쯤 되집어 가서 여기라고 한다. 마을 가운데 조그만 연못을 파고 있는 곳이다. 그저 옥수수만 보일뿐이다. 낙담하고 있는데 이덕일 소장이 골짜기 건너편에 희미하게 뭔가 보인다고 한다. 모두들 바라보니 옥수수 밭 가 큰 나무 옆에 뭔가 보였다.

곧장 그 곳으로 땀을 흘리며 골짜기를 건넜더니 옥수수 밭 가에 표석이 보였다. 급히 올라갔더니 ‘봉집보유지(奉集堡遺址)’, ‘봉집보 옛 터’라고 2014년 심양시에서 문물보호단위로 세운 표석이 있었다.

모두들 환호했다. 고려 서북 국경이 이곳이라는 역사 기록이 엄연히 존재하고, 기록과 일치하는 현장을 확인했으니 기록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심양에서 신의주까지 고속도로 거리가 250km이다.

우리 국사학계 위증사학자들이 그동안 남북 250km에 달하는 우리 역사 강역을 지웠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이다. 서울에서 대구, 서울에서 평양까지가 대략 250km이다. 저들이 지운 우리 역사 강역이 얼마나 넓은가! 이 발견이 바로 역사 답사 보람이다. 천지신명이 도왔거나 이곳에 노닐던 옛 선조들이 영혼이 천상에서 도왔을 게다.

이 지역은 발해가 망한 후 거란족 요(遙 916~1125)나라가 잠시 지배했다 그러나 고려 광종 10년(960)에 수복했고, 요나라 1차 침입 때 서희와 소손녕 담판 결과 고려 영토로 인정받았다. 금(金 1115~1234)나라 시대에도 고려 영토였다. 원(元 1271~1368)나라 때인 1258년(고려 고종 45년) 조휘(趙暉) 탁청(卓靑) 등이 이 지역을 들어 원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원에 속했다.

이로부터 98년이 지난 1356년(공만왕 5년) 고려의 옛 영토 수복전쟁으로 다시 고려에 편입되었다. 게다가 『요사(遼史)』 「지리지」는 봉집보 지역을 관할하던 회중군이 한나라 때에는요동군 험독현(險瀆懸)에 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집보가 험독현 일부라는 말이다.

험독현은 위만조선 도읍이라고 『한서』 「지리지」는 전한다. 이러니 지금 평양이 험독현이라고 떼쓰는 위증 사학자들이 이 기록의 진위여부를 공부해서 명쾌하게 답변하기를 고대한다.

 

▲고려 조선 중국 사료로 본 고려 북방 강역, 진상둔진으로 표시한 곳이 봉집보이다

 봉집보에 설치된 철령위는 얼마 후 북쪽으로 이동했다. 1387년(고려 우왕 13년) 명태조는 고려에 “철령위 이남은 고려 영토이지만 동쪽 서쪽 북쪽은 자국 영토”라고 통보했다.

이에 고려는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 선춘령(先春嶺, 지금 흑룡강성 영안시 부근) 이남도 고려 강역이라고 항의하면서 요동 정벌을 단행했다. 철령위가 함경남도 안변이라면 고려군이 안변으로 출병해야지 왜 요동을 공격하려 했을까?

이 질문에도 위증사학자들 답변을 기대한다. 위화도 회군(1388)으로 요동정벌은 무산되었지만 고려의 군사행동에 놀란 명나라가 결국 철령위를 더 북쪽으로 옮겨 1393년 설치한 곳이 지금 철령시 은주구(銀州區)다. 이 곳은 내일 답사할 예정이다.

봉집보를 쉽게 찾게 되어 시간이 남았다. 심양 고궁(古宮)으로 향했다. 청(淸 1612~1912)나라 태조 누르하치(1559~1626)는 1613년 여진족을 통일하고 허투알라(혁도아랍 赫圖阿拉)에서 1616년 칸으로 즉위했다. 허투알라는 심양시와 동쪽에 접한 무순(撫順)시 신빈(新賓)인데 이곳이 흥경(興京)이다.

누르하치의 성(姓)이 ‘아이신 교로(애신각라 愛新覺羅)’인데 아이신은 금(金)을 의미하고 교로는 씨족 또는 부족을 의미하니 결국 김씨이다. ‘김 누르하치’가 성명이다. 문성재 박사는 ‘교로’가 우리말 ‘겨레’라고 풀이했는데 맞을 것이다. 김 누르하치가 발흥하자

명나라는 1620년 20만이 넘는 대군을 보내 토벌을 시도했다. 그러나 심양 동쪽 사르후(살이호
薩爾滸) 전투에서 명군은 김 누르하치의 2만 기병에게 전멸당했다. 이어 심양을 함락하고, 1626년 심양으로 천도하고 성경(盛京)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 때 지은 궁궐이 심양 고궁이다. 1644년 북경을 함락하여 천도할 때까지 이 심양 고궁이 청 황실 거처였다.

심양 고궁은 입장료가 60위안인데 70세 이상 노인은 외국인도 무료다. 다른 나라에서도 노인을 우대해주는구나! 유교의 유풍이 남아 있는 것이다. 심양 고궁은 규모가 크지 않고 참 소박하다. 오후 5시 30분에 문을 닫는다고 하니 1시간 정도밖에 여유가 없어 서둘러 둘러보기로 한다. 왕이 정무를 다스리던 숭정전은 아래 사진에서 보눈 바와 같이 아담하다.

 

▲심양 고궁 숭정전(崇政殿)

심양 고궁에는 내용이 충실한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건국 초기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여 전시하고 있다. 특히 태종 홍타이시(황태극 皇太極 1592~1643) 사후 여섯 살 순치제(順治帝 1638~1661)가 즉위하는 권력투쟁 과정에서 합의를 이끌어낸 숙부 도르곤(다이곤 多爾袞)과 어머니 효장태후(孝庄太后) 포목포태의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다.

도르곤은 어린 순치제의 섭정왕으로 청나라 실권자였는데 그의 후처가 조선의 인조 양녀 순의공주였다.두 사람은 금슬이 좋았지만 혼인 후 도르곤이 7개월만에 죽어 순의공주는 비운의 여인이 되고 말았다. 도르곤이 오래 살았더라면 조선과 청 관계가 좋았을지도 모른다.

포목포태는 몽고 공주 출신으로 홍타이시 후궁이었다. 뛰어난 정치 감각을 발휘하여 아들을 황제로 즉위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들이 일찍 죽자 어린 손자 강희제를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키운 초원의 여자다.

강희제 할머니 효장태후 포목포태(심양 고궁)

도자기와 문인화도 전시되어 있는데 도자기가 아주 고급품으로 보인다. 필자는 골동품에 안목이 없어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보기에 정말 멋지다. 왕실 소유니 당연히 당대 최 고급픔이었을 것이다. 소더비 경매장에 내놓으면 아마도 모두 수 백만 달러는 나갈 것으로 보인다.

고궁 경내에는 정자 비슷한 조그마한 같은 건물 건물 8개가 있다. 잠시 쉬는 곳으로 보이는데 들어가 보니 8기(旗) 상징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팔기는 청나라 군사와 행정 조직이다.
 

▲심양 고궁에 전시된 아름다운 도자기

팔기는 정황기(正黃旗), 정백기(正白旗), 정홍기(正紅旗), 정람기(正藍旗), 양황기(鑲黃旗), 양백기(鑲白旗), 양홍기(鑲紅旗), 양람기(鑲藍旗)이다.각 팔기의 군기, 대장의 갑옷, 사용한 무기 등
과 각 기의 유래가 보관되어 있다. 소수 여진족으로 천 배가 넘는 한족 중국을 통치한 기본 조직이 팔기였으니 청나라로서는 당연히 자랑스러운 조직일 것이다. 각 기의 수장은 황제 자신이거나 황족이었다.

▲팔기 깃발(윗 줄 왼쪽부터 정홍기, 정람기, 종황기, 정백기. 아랫 줄 왼쪽부터 양홍기, 양람기, 양황기, 양백기) 자료 Daum 백과사전

관람을 종료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여기저기 수리 중인 전각도 있고, 자세히 살펴보면 좋겠는데 시간에 쫒겨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한다. 다시 기회를 만들어 꼭 천천히 살펴보리라. 이번 답사는 오늘 봉집보를 찾았으니 대 성공이다. 흐뭇한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왔다(허성관의 2018년 중국에 있는 우리 역사 현장 답사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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