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사학과 일제식민사학을 '극단의 시대' 가 만든 파행이라고 비판

9일 서울 송파구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 주최로 한국고대사 시민강좌가 열렸다. 이번 1회 강의에는 노태돈 전 서울대 교수가 '근대사학의 형성과 한국고대사연구'라는 제목으로 맡았다. 먼저 노교수는 '국사 이해를 둘러싼 논란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이다. 특히 학계의 학설과 이를 담은 교과서가 온통비난의 대상이 되는 상황을 보면서 당혹해하는 학생과 그들을 지도하는 교사가 그 직접적인 피해자들'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학계의 주장을 시민사회에 직접 전하기 위해 강좌를 열게 되었다'며 강단사학계를 대표하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고대사 시민강좌 제1강을 하고 있는 노태돈 전 서울대 사학과 교수

노교수는 20세기 전반 한국고대사 연구 동향을 소개하였는데, 초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고대사 연구에서 단재 신채호 사관을 소개했고 이어 일제식민주의 사학의 고대사연구와 사회경제사학의 고대사 연구, 마지막으로 실증사학을 소개하였다. 노교수는 단채 신채호 사학과 일제식민주의 사학은 둘 다 '극단의 시대'가 만들어낸 파행적 모습이라고 두 사학을 비판했다. 또한 사회경제사학의 '내재적 발전론'은 사회와 국가가 내재적 요인만으로 진전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와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비판하였다. 실증사학에 대하여는 일제식민주의 사학에 결과적으로 부응하는 면이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사실 실증은 역사 연구의 기본요소이고, 역사학도가 실증에 충실하여야 함은 미덕이 아니라 의무'라고 하면서, '어떤 주제를, 무엇을 위해 실증하였느냐가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바'라고 실증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노교수는 이어 '해방후 고대사 연구 동향'을 소개하면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고대사 연구의 발전을 주요 성과로 들었다. 특히 청동기의 연대가 서기전 10세기로 올라간다면서 동검문화의 분포지역을 언급했다. 이어서 그는 고조선 중심지를 소개하였다. 재평양설은 일제식민주의 사학에서 주장하는 것인데 처음부터 고조선은 평양을 중심으로 세워졌고 한사군인 낙랑군도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고, 이동설은 고조선의 중심이 처음에는 요동에 있다가 현재 평양으로 왔고 한사군인 낙랑군도 현재 평양이라는 것이다. 이 이동설은 현재 노태돈 교수를 비롯한 강단주류사학계가 주장하는 것이다. 재요령설은 고조선이 요령에 있었고 망할 때도 거기가 중심이었으며 한사군인 낙랑군도 거기에 있었다는 것으로 비주류사학계가 주장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어 노교수는 한사군인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증거로써, 西安平을 압록강 하구로 보았는데 거기서 출토된 토기에 '安平낙미앙''安平成'이 새겨진 명문과 삼국지 등의 문헌 기록이 말해준다고 했다. 또한 평양의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호구부와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수경주의 기록 등을 들었다.

노교수는 강의를 끝내고 질문을 받았다. 종이에 써서 제출하면 그것을 보고 답변하는 형식을 취했다.

질문요지는 크게 노교수의 주장에 대체적으로 동조하는 질문과, 강의내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질문이었다. 답변의 내용은 동조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질문에 주로 시간을 할애 하였고 반대하는 질문에는 대체적으로 간략하게 답변하였다. 특히 노교수가 일제식민 사학을 비판하면서도 일제식민 사학이 주장하는 한사군 재평양설을 똑 같이 부동의 견해로 주장한다는 질문에는, '식민사학이라는 것은 한사군 재평양설을 식민통치의 목적으로 주장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식민사학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한사군 재평양설'을 주장할 때 어떤 논리를 가지고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는 궁색한 변명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번 강의에는 젊은 학생들도 많이 왔는데 사학과 학생들이 많았다. 강의장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와서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이 시민강좌가 최근 비주류사학이 강단주류사학을 '식민사학' 이라고 비판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향후 양 사학계의 '식민사학역사전쟁'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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