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 갈고 농사지으면서 배우고 독립투쟁에 나선 선각자들이 있다.

신흥무관학교 창설일을

육군사관학교 개교기념일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경학사'耕學社'를 아십니까...

일하면서 배우고 싸웠다...

 

허성관의 2015년 중국 우리 역사 현장 답사 ⑤

7월23일(목) 통화⟶삼원포⟶고산자⟶합니하⟶집안
 ━ 신흥무관학교, 이곳이 그곳이구나!

중국의 행정단위는 성(省), 시(市), 현(縣), 진(鎭), 향(鄕)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이 우리나라의 면에 해당하고, 향은 마을이라고 보면 된다. 오늘은 통화시에서 북쪽으로 삼원포진(三源浦鎭)에 있는 추가가(추씨마을), 고산자진(孤山子鎭), 광화진(光華鎭)에 있는 합니하(哈泥河)를 답사한다. 이 세곳은 모두 통화시 지역이고, 대일항쟁기 독립전쟁의 간성을 길러낸 요람인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곳이다. 이어서 다시 남쪽으로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集安)까지 가야 한다. 대략 400km를 이동하는 빠듯한 일정이다.

삼원포 가는 길은 잘 가꾸어진 고속도로다. 길 양쪽은 온통 논이고, 야트막한 산기슭에는 옥수수 밭이다. 물론 이 곳의 벼농사는 모두 우리 민족이 일군 것이다. 한 시간 넘게 달려 삼원포에 도착했다. 유하현(柳河縣) 삼원포진은 우리네 시골 소읍과 다름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읍내 큰 길가에 삼원포조선족진 위생원이라는 병원이 보인다, 얼마나 반가운 이름인가.

조선족 숫자가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지역에 우리 민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이 근처에서 추가가(鄒家街) 마을을 찾아야 한다. 이곳을 답사한 적아 있는 이덕일 소장과 깁병기 박사는 계속 길 왼쪽 낮으막한 산들을 주시한다. 추가가에 있는 대고산과 소고산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탓이다. 멀리 둥그런 산봉우리가 보이자 대고산이라고 한다. 일행 모두 정신이 번쩍 든다.

▲ 들판 가운데 동그랗게 보이는 산이 대고산이고 이 산자락이 추가가 마을

추가가는 추씨 집성촌이다. 우리에게는 희망과 한이 서린 마을이지반 지금은 후줄근한 농촌 마을에 불과하다. 마을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대고산 자락으로 올라 갔다. 그저 산자락일 뿐이다. 아무런 흔적이 없다. 그러나 1911년 4월 조국 광복을 위해 망명해온 선각자들이 이곳에서 노천 민중대회를 열고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우당 이회영(1867-19320 선생  6형제,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 일송 김동삼(1878-1937) 등이 주역이었다

경학사 초대 사장으로 석주 이상룡선생이 선출되었다. 경학사는 개농주의(皆農主義)와 주경야독을 표방했는데 주민자치와 독립투쟁을 위한 민간 자치단체였다. 이후 부민단(扶民團), 한족회(韓族會),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진화해 나가면서 광복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동아일보 1920년 8월 2일자는 ‘봉천성 삼원보에 자치국’이라는 기사에서 “2,000호의 조선 만족이 모여 한족회가 다스리며 소‧중학교 교육까지 시키는 작은 나라를 이뤘다.“고 전한다. 이 보도는 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공화주의에 기초한 자치를 천명한 최초의 언론 보도일 것이다. 이 정신이 민주공화국을 지향한 상해임시정부의 국체와 대한민국 헌법 정신의 모태가 되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위대한 공화주의 정신이 실천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 대고산 자락이다. 추가가는 제법 큰 마을이고 주위는 지버분한데 답배 심은 곳이 여기저기 보이고, 접사꽃, 나팔꽃, 코스모스가 무질서하게 피어 있다.

 

▲ 대고산과 추가가

경학사를 설립 후 한달이 지난 1911년 5월 신흥강습소도 설립했다. 현지인들의 옥수수 저장 창고를 빌려서 개교했다. 추가가가 마을 주위를 둘러보아도 지금은 옥수수 저장창고는 보이지 않는다. 위 사진에서 보는 길 왼쪽에 널찍한 창고 비슷한 건물이 있는데 아마도 이 자리가 신흥강습소 터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신흥강습소에는 일반학과반과 군사반이 있었다.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무관학교라는 이름 대신에 강습소라는 이름을 걸었다. 마을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중국 경찰이 나타났다. 낯선 사람이 마을에 찾아들면 누군가가 신고해서 곧장 경찰이 와서 검문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이곳 추가가가 광복투쟁의 성지이기에 많은 한국 사람들이 다녀갔을 것이다. 현지 주민들이 100년 전에 있었던 역사를 기억하는 못하는 이름 없는 마을에 한국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오니 의아했을 수도 있겠다.

신흥강습소는 개교 다음 해인 1912년에 추가가에서 80km 정도 떨어진 합니하로 교사를 지어 이전했다. 애국지사들의 열망하던 무관학교가 드디어 마련된 것이다. 이회영 선생 6형제의 둘째인 영석(潁石) 이석영(李石榮 1855-1934) 선생이 자금을 댔다. 이회영 선생 6형제는 전재산을 처분해서 만주로 망명했는데 그 대부분이 이석영 선생의 만석 재산이었다. 처분한 재산이 40만원이었는데 쌀값 기준으로 환산하면 지금의 약 600억원, 시가로 환산하면 약 5조원이나 되는 재산이었다.

이석영 선생은 대과에 급제한 후 차관급 벼슬을 지내고 당시 59세 노인이었다. 자기 재산이 아깝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석영 선생은 지극히 곤궁한 가운데1934년에 상해에서 사망했고, 홍교(虹橋) 공동묘지에 묻혔다. 비록 현실에서는 실패한 삶일지 모르지만 자신의 재산으로 민주공화정의 씨았을 뿌리고, 무장 광복투쟁의 간성을 길러내는 초석을 마련했으니 역사에서는 빛나는 삶이다. 우리 역사에서 자신의 재산을 가장 가치있게 쓰신 분이 이석영 선생이다.

합니하의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신흥무관학교로 호칭되었다. 1919년 3.1운동 후 애국 청년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자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고산자로 학교를 옮기고 고산자를 본부로, 합니하는 분교 형태로 운영되었다. 신흘무관학교가 개교할 때 교관들은 이장녕, 이관직, 김창환 등 대한제국 장교 출신들이 주축이었다. 교장은 이철영, 이동녕, 이상룡, 여준 등이 차례로 맡았다.

▲ 고산자 거리

추가가에서 합니하로 향했다. 합니하 가는 중간에 고산자가 있다. 고산자는 우리 식으로 면소재지에 해당하는 진이다. 이곳을 몇차례 답사한 적이 있는 이덕일 소장이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는 옥수수 밭으로 변했고 지금은 아무런 흔적이 없다고 한다. 일제의 탄압으로 1920년 폐교될 때까지 대부분의 기간을 신흥무관학교가 합니하에 있었기 때문에 고산자 터 답사를 생략하기로 했지만 서운함을 어쩔 수 없다. 고산자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김병기 박사는 이 고산자 중앙 거리에서 우회전해서 한참 가면 백서농장이 있었던 곳이 있다고 한다. 만주의 호랑이이라고 불리던 김동삼 선생이 주도해서 개척한 농장인데 사실은 독립군 밀영(密營)이었다. 무관학교 졸업생들이 모여 군사훈련과 농사를 병행한 둔전이었다.

고산자에서 들길과 산길을 30km 남짓 달리자 광화진(光華鎭)이다. 두 개의 강이 만나서 하나로 흐르는 합수목이다. 초입에 마을 이름을 새긴 패루(牌樓)가 볼 만하다. 강폭이 넓고 수량도 제법 많다. 사람만 건널 수 있는 좁은 다리가 길게 걸려 있다. 아래 사진에서 다리 건너 편편한 언덕 끝에서 바라보이는 강 건너에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 합니하 다리

정확한 학교 자리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다. 김산이 쓴 <아리랑>에 의하면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산능선을 따라 18개 건물이 있었고, 산 가운데에 20여정보의 넓은 평지가 있었으며, 합니하가 천연 해자 구실을 했다고 하니 큰 길이 있는 강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다음 사진에서 강건너 오른쪽 구릉 너머에 평지가 있고 연이어 산이 계속되니 그 기슭에 교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지역에는 지금 중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 들어가 볼 수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군부대 주둔지를 결정하는 인간의 지혜에는 큰 차이가 없음을 알겠다.

▲ 오른쪽 야트막한 산 너머가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

대일항쟁기 독립투쟁은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일제는 악선전했다. 그러니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주역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로서 시회 지도층이었다. 이들은 무장투쟁 근거지를 만주에 마련하고자 사전에 기획하고 면밀히 답사까지 해서 이곳에 왔다. 이회영과 양기탁(1871-1938) 등을 중심으로 한 신민회, 이상룡 등 혁신 유림, 정원하(1855-1925)와 홍승헌(1854-1914) 등 양명학자 들이었다. 이들은 순차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유하현 횡도촌을 거쳐삼원포에 모여서 광복투쟁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들의 처절한 심정을 이상룡 선생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此頭寧可斷) 이 무릎을 꿇어 종이될 수는 없도다(此膝不可奴)”고 절규했다. 이들은 나라가 망하자 지도층으로서의 책무를 몸소 실천하신 분들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0년 동안 약 3,500여명의 독립군 장교들을 길러냈다. 특히,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일제 현역 장교인 지청천(1888-1957)과 김경천(1888-?)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합류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청천 장군은 후일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김경천 장군은 연해주 항일 무장투쟁의 전설이 된 백마탄 장군이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중간 간부로 청사에 길이 빛나는 공을 세웠다.

이후 의열투쟁과 무장투쟁의 핵심 간부들은 대부분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김원봉 장군은 의열단 단장으로 의열투쟁의 중심이었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했으며, 광복군이 창군되자 부사령관 겸 1지대장을 지낸 불멸의 혁명투사다.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이범석 장군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냈다.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아리랑(Song of Ariran)』의 주인공 김산(본명은 장지락)도 이 학교 졸업생이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중에서 현재 이름이 알려진 분은 500여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 3,000명의 종적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상당수는 광복전쟁의 와중에 중국 대륙에서 산화했을 것이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사람들도 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광복된 조국에서 이들의 이름이라도 찾아주는 노력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성찰이 필요하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이석영 선생의 아들 이규준이 재학 중에 쓴 다음 두편의 한시를 보면 짐작이 간다. 제목이 ‘가을밤 무예를 익히며 떠오른 느낌(秋夜講武有感)’이다.

大陸秋風倚刃歌   대륙의 가을바람 칼날에 우는데
  腥塵血雨匝關河   피비린내 나는 혈우 산하에 가득하네
  此疆爾界何沫較   이 강토 이 경계 어찌 거품에 비유하리만
  總是蝸牛角戱多   모두 달팽이 두 뿔 잡고 희롱하길 많았네

錫類于天同胞是   하늘에 길이 복 받을 동포 여기 있으니
  何優何劣垂爭多   어찌 낫다 못하다 다투겠는가
  秩然玉帛休兵日   질서가 옥백처럼 바로 잡히면 군사들이 쉴 터이니
  六大洲爲樂一家   육대주가 일가로 기쁨을 누리리
  (『新興敎友報』 제2호 55쪽 중화민국 2년 9월15일)

합니하를 떠나는 마음은 허전하다. “이곳이 그곳이구나” 하는 느낌만 안고 떠난다. 아무런 흔적이 없는 탓이다. 광복 71년이 되었고 중국과 국교가 정상화 된지 30년인데 신흥무관학교   터에는 표지석도 없다. 대한민국 외교부는 중국 당국과 협의해서 하루 빨리 추가가, 고산자, 합니하에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후손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광복 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省齋) 이시영(1868-1953) 선생은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신흥대학교를 설립했다. 지금 경희대학교 전신이다. ‘신흥’이라는 이름이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흥무관학교 개교 기념일이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개교기념일이 될 수는 없을까, 부질없는 생각들인가?

남쪽으로 압록강 강변 집안까지 오늘 가야 한다. 조금 달리자 어두워져서 밖이 보이지 않는다. 강를 끼고 길이 계속된다. 8시 넘어 집안에 도착했다. 향항성하일대주점이 오늘밤 잘 곳인데 영어로 Hong Kong Holiday Inn과 연계된 호텔이다. 압록강변에 있는 조선식 불고기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서운한 마음을 채우느라 술을 제법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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