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집안일대는 아득한 옛 날 부터 우리민족 역사무대였다...

고구려 개국신화는 고구려가 천하 중심 제국임을 알려주고 있다...

고구려 모본 태왕 때는 중국 산서성 태원까지 정벌해 들어갔다...

태조태왕 때는 요서에 10개 성을 쌓았다...

 

허성관의 2015년 중국 우리 역사 현장 답사 ⑥

7월24일(금)  집안 → 환도산성 → 환인

고구려의 중심에 가다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시에는 당연히 고구려 유적이 많다. 오늘은 집안시 북쪽 산기슭에 있는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고구려 무덤인 오회분을 먼저 답사한다. 이어 3km를 이동해서 환도산성과 그 주변을 답사한 다음 160km를 달려 환인으로 가는 일정이다. 이동거리가 길지 않아 수월한 하루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러나 답사에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 어찌될지? 집안과 내알 답사할 환인 지역은 고구려 유적 뿐만 아니라 대일항쟁기 독립전쟁의 유적도 많다. 특히,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군 3부인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중에서 참의부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서 독립전쟁 유적지는 훗날을 기약하고 고구려 유적을 주로 답사하기로 한다.

집안시는 남쪽으로 압록강에 면하고, 북쪽으로는 산이고, 동서로 압록강을 따라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산기슭이 비교적 널찍하지만 도시의 동쪽과 서쪽 끝은 폭이 좁다. 집안시는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알려져 있고, 여진족인 세운 금(金 1115-1234)나라 때는 오국성(五國城)이었다. 서기 1127년 금나라는 중국 송나라 수도인 개봉을 합략하고 송황제 휘종과 흠종 부자와 2천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중국 한족의 역사에서 두 명의 황제가 오랑캐(?)에게 포로로 잡힌 가장 치욕적인 역사인 정강지변(靖康之變)이다. 휘종과 흠종은 이곳 국내성에 유폐되어 일생을 마쳤다(흑룡강성 의란현이라는 설도 있음). 조선조 들어 수양대군(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난에

▲국내성 성벽

항거하여 거병한 함길도절제사 이징옥(李澄玉)이 대금(大金) 황제를 칭하고 수도로 정한 곳이 오국성 이곳 집안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남향인 호텔방 창문 밖을 내다보니 건너편에 돌담이 가지런히 길쭉하게 쌓여 있다. 담벽 너머에는 민가다. 누가 저런 돌담을 곱게 쌓았을까? 국내성 성벽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집안이 옛 국내성이니까. 허겁지겁 시진기를 챙겨서 돌담으로 다가갔다. 동행한 안성호 군에게 사진기 챙겨서 빨리 나오라고 연락했다.

국내성 성벽이었다. 최근 성벽을 복원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우아함이 놀랍다. 남아 있는성벽은 높이가 어립잡아 3m 쯤 되어 보이고, 폭은 3걸음이 조금 넘는다. 표지판에는 원래 성은 사각형 평지성이고 들레가 2,741m라고 되어 있으나 동벽 300m와 남벽 100m 정도가 남아 있다. 1930년대까지도 남아 있던 남문의 사진이 안내판에 새겨져 있다. 호텔 자리는 바로 성벽 밖이다. 커다란 돌덩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깜찍한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큼지막한 도깨비 석각이 정겹다. 그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우리 민족의 심성을 상징하는 도깨비 상일 것이다. 역사에서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아쉽게도 이곳 국내성에서 고구려의 웅혼한 자태를 마음속으로만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 국내성 성벽 밖 큰 돌에 새긴 도깨비 상

성벽 바로 옆에 새벽장이 열리고 있었다. 근처 농민들이 농사지은 채소와 과일, 백두산 산록에서 캔 인삼, 압록강 어란 등이 거래되고 있었다. 소박하지만 활기찬 시장이다. 계속되는 여행에 지쳐 백두산 인삼 한 뿌리를 살까 했지만 값이 만만하지 않다. 게다가 중국에는 가짜가 너무 많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은 터라 내키지 않는다. 어쩌다 중국이 우리로부터 이런 불신을 받게되었는지? 거래를 흥정하는 왁자한 가운데 정겨운 우리말도 들린다.

아침을 먹으면서 국내성 성벽을 우연히 답사했다고 이덕일과 김병기 박사에게 말했더니 자기들은 이곳을 수차례 답사해서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왜 미리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알고 있는 줄 알랐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의 답사 수준이 많이 발전했다면서 허허 웃는다. 우연히 돌담을 보고 국내성 성벽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고.

고구려의 유물을 본격적으로 감상하기를 기대하면서 집안박물관으로 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사진기와 가방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무엇이 걱정되기에 그러는지. 필자가 과문한 탓일 수도 있지만 시선을 끄는 유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압록강으로 이동했다. 폭이 넓고 수심도 깊어 보인다. 중국 쪽에는 선착장도 깔끔하게 마련되어 있고 부대시설들도 잘 갖추어져 있다. 건너편 북한 쪽 강변에는 별 시설이 없고 들판이 끝나는 산자락 마을이 고즈녁하다. 강 양쪽이 왜 이렇게 다를까? 아마도 지도자의 자세와 정치체제 때문이겠지만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강변에 관광객과 젊은이들이 제법 붐빈다.

▲ 압록강 건너 북한

집안 북쪽 산기슭에 고구려 유적이 집중되어 있다. 20대 장수태왕(413-491)르으로 알려진 장군총의 위용은 우리를 압도한다.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건립한 피라미드다. 기단 한변의 길이가 33mm이고 높이는 13m라고 한다. 꼭대기가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뾰족하지 않고 평평하다. 제사지내는 건축물이 있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뒤에서 보면 앞으로 약간 밀려나 있으나 1,600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한 상태로 웅장하게 서 있다.

▲ 고구려 제20대 장수태왕릉

장수태왕릉에서 웬지 발길이 돌려지지 않는다. 우리 역사의 빛나는 장엄한 순간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옆에 배총이 있다. 돌로 몇 층을 쌓은 위에 고인돌을 세운 특이한 무덤이다.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다. 고인돌은 고조선식 무덤이고 적석총은 고구려식 무덤이니 두 형식이 결합된 무덤이다. 아마도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민족의식이 반영된 무덤일지도 모르겠다. 왕의 무덤인데도 릉(陵)이라고 하지 않고 장군총이라고 총(塚)으로 부르는 중국 사람들의 심사가 곱지 않다.

장수태왕릉에서 남서 쪽으로 500m 정도 거리에 광개토태왕릉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가 묻힌 곳이다. 릉의 양식은 장수태왕릉과 같지만 윗 부분이 무너져 내렸고 그 위에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다. 복원하지 않은 중국정부의 무성의를 탓할 수 만은 없다. 어찌 세월이 무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규모는 장수태왕릉의 2배다. 가단의 한 변이 66m이고 남아 있는 릉의 높이가 15m이다. 민족의 영웅 무덤에 참배하는 것 만으로도 가슴 벅찬 경험이다.

릉의 왼쪽 높은 곳에 창문처럼 출입구가 있다. 그 안 쪽이 태왕의 시신을 안치했던 현실(玄室)인데 개방하고 있다. 올라가서 현실의 내부를 보았다. 위대한 태왕의 현실을 공개해 관광객을 유치해서 돈을 벌겠다는 당국의 의도가 결코 유쾌하지는 않다. 안타깝게도 현실 내부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규모도 아주 작다. 실제 현실이지 아니면 적당히 돌을 빼내서 만든 공간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언젠가 훗날 이 광개토태왕릉을 복원해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런 자부심으로 물려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릉

광개토태왕비로 이동했다. 현장에서 비문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선조들이 남긴 비문 중에서 일찍이 이 비석만큼 자부심과 확실한 세계관을 천명한 비문을 보지 못했다. 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곳은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창업하신 터다. 추모왕께서는 원래 북부여 출신이시고, 하늘의 아들이시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나셨으며, 나실 때부터 성스러움이 있었다(惟昔 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扶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추모왕은 성스러운 하늘의 아들이며 고구려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천하관을 선포한 것이 이 비석이다.

조선조까지만 해도 이 비석이 광개토태왕비인지 몰랐다. 일제 참모본부가 이 비문을 탁본해서 그 내용을 공개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일제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작했다는 비난을 지금도 받고 있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5-1950 납북) 선생이 <조선사연구>에서 해석한 비문이 가장 합리적인 내용일 것이다. 자랑스런 민족사의 기념비가 이 비석이지만 마음대로 사진을 찍을 수도 없는 실정이다. 그래도 몰래 찍었다. 높이 6.5m, 폭과 두께가 1.5m이니 우리 역사에서 최대 비석이다. 비석 자체가 보호 목적으로 유리벽 건물에 가두어져 있다.그러나 비석이 워낙 커서 사진에 그 전체를 담을 수도 없고, 물론 사진으로 글자를 식별할 수도 없다.               

버스를 타고 잠간 이동해서 20분 쯤 이동해서 환도산성 입구에 도착했다. 고구려의 도시들은 일반적으로 평지성과 산성이 짝을 이룬다. 평소에는 평지에 쌓은 성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유사시에는 모두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에 집중하는 구조다. 2대 유리왕 22년(서기 3년)에 비류수 가의 홀승골에서 이곳 국내성으로 천도했는데 국내성이 평지성이고 환도산성이 이곳이다.

▲ 광개토태왕비

그런데 막상 입구에서 환도산성을 바라보자 성벽은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지형이 우리네 산성과는 차이가 있다. 산성은 보통 성벽으로 골짜기와 능선을 연결하는 포곡식인데 이곳 환도산성은 뒤쪽은 높은 산으로 막혀 있고 남쪽으로만 통로가 나 있는 구조다. 만약 성이 함락되면 후퇴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공격하는 적의 입장에서 보면 남쪽 한 곳에만 병력을 집중하면 되기 때문에 공성전이 비교적 단순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고구려 산성으로는 드물게 적에게 2번이나 락당했다. 동천왕 20년(서기 257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과, 100년 후인 고국원왕 12년(서기 58년) 모용씨 연나라에 함락되는 치욕을 당했다.

▲ 환도산성 정면

환도산성 아래에는 돌로 쌓은 무덤인 적석총이 많이 남아 있다. 대부분 도굴되었다고 한다. 사실 적석총 규모는 장난이 아니다. 왕의 무덤도 아닌데 지금 노력을 들여도 쉽게 만들 수 없는 규모들이다. 강성했던 고구려의 위상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집안 답사를 마치면서 여러 의문이 남는다. 고구려가 동북아의 강국이었는데 어떻게 이 외진 곳을 근거로 국가를 통치했을까? 조세를 걷어 수로 이송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압록강, 혼강, 요하, 대릉하 등을 비롯한 수운과 발해를 이용한 수운이 잘 작동하고 있었던 탓일까? 아나면 계루부, 연나부, 관나부, 순노부, 절로부 5부가 중심이 된 지방자치 조직이 잘 정비되어 있었던가? 역사적으로 제국의 수도는 국가의 중심이나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는데 고구려는 좀 의외다.

제4대 모본왕 2년(서기 53년) 고구려는 지금의 북경 부근인 상곡, 어양, 우북평과 산서성 태원을 공격했고, 이 기록은 <후한서>에도 나와 있는데 아마도 집안 근처에서 군대가 발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 왕인 태조왕 때에는 요서에 10개성을 쌓았다 하니 모본왕 때 점령한 지역을 영구히 지배하고자 쌓은 성일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보면 고구려의 중심 세력들이 초기에는 지금의 요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학자들의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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