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만주 흑룡강선까지 먹겠다는 뜻에서 나온 흑룡회의 실체를 밝힌다...

 

일본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흑룡회,

일제명치정권에 대륙침략 앞잡이로 맹활약하다...

독도를 처음 발견했다며,

주인없는 섬이니 일본에 편입시켜야한다고 억지쓰다...

 

흑룡회의 ‘양코’섬 발견 주장

1901년 일본의 신문․잡지에서 갑자기 ‘양코’라는 섬이 동해에 등장한다. 그것도 지도에 없는 새로운 섬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새로운 섬이니 당연히 무주지이다.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흑룡회이다. 흑룡회는 한반도와 대륙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였던 국수주의 단체이다. 이 흑룡회에서는 기관지 󰡔회보󰡕를 발간하였는데, 1901년 3월에 발간된 제1호에서 「일본해중 미발견의 一島」 이라는 제목으로 ‘양코’라는 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의 울릉도에서 동남으로 가기를 30리, 우리 帝國의 오키도(隱岐國)에서 서북으로 거의 같은 거리 海中에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하는 무명의 섬이 있다. 이 섬은 아직 영국 해도에도 실리지 않고 일본과 러시아 해도에도 실리지 않았다. 또 조선의 판도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섬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로서 실제로 울릉도에서 돌아온 자는 맑은 날 이 섬이 산봉우리의 높은 곳에서 동남쪽으로 멀리 섬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중략) 섬의 형태는 매우 굴곡이 많고 어선을 정박하여 풍랑을 피하기에는 매우 좋은 위치에 있다. (중략) 참고로 말하자면 日韓 어민은 이 섬을 불러 ‘양코’라고 한다.

러일전쟁(1904.2)을 일으키기 3년전의 일이다. 해군성의 독도인식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1년 이전에 일본은 이미 러시아와의 해전을 앞두고 동해의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1899년 <조선수로지>등 수로지는 붓글씨로 쓴 근대 이전의 문헌과는 달리 현대식 활판 인쇄체로 공간된 책자이다. 해군성에서 발간했지만 군관계자는 물론이고 어업관계 종사자들 간에도 읽혔을 거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울릉도에서 육안으로도 보이는 상당한 크기의 섬, ‘양코’가 영국, 일본, 러시아 어느 지도에도 없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흑룡회의 <회보>에서 흑룡회는 ‘양코’가 울릉도와 일본 오키도로 부터 거의 같은 거리에 있으며, 울릉도에서 ‘양코’가 보인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반면에 새로 발견한 섬의 기본적인 형태, 東島와 西島로 이루어진 섬이라는 것 등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다. 새로 발견한 섬인데도 양국어민들에게 공통적으로 불리는 이름이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약하다.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이라 할 정도로 울릉도에서 더 가까운데도 ‘양코’는 울릉도와 일본 오키도의 대략 중앙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울릉도에서 일본방향으로 보이는 섬이라면 독도임이 분명하다. 독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면서도, 위치는 일본 쪽에 가깝게 해서, 쉽게 독도라고 단정할 수는 없게 하고, 이름도 조금만 ‘양코’로 바꾸어, 지도에도 없는 새로운 섬을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조선의 판도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하여, 독도를 무주지로 인식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 일본 도쿄 공대 세키노타다시(關野貞)가 경주 불국사 다보탑을 본떠서 만든 '일한합방기념탑' 앞에서 서기1934. 흑룡회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촬영을 하였다. 앞줄에서 오른쪽 세번 째가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사진: 조선일보, 김원모 교수 제공

흑룡회는 <회보>등 출판물을 통해 조선과 만주, 시베리아의 사정을 일본에 알리는가 하면 對러시아 전쟁을 주장하고 선동했다. <회보>의 기고자들은 본명이외에 필명 혹은 호나 아명 등 다양한 이름을 사용하고 있어 기고자의 다양함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치다의 경우 기고자 명의로는 경석(硬石)이라는 호 이외에 아명으로 갑(甲) 등을 사용했다. 다케다는 보령산인(保寧山人), 홍주(洪疇), 요시쿠라는 길주우(吉州牛), 비장군(飛將軍)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으며, 주요 집필자는 우치다, 구즈우, 요시쿠라 등이다. 이외에도 잡보형식의 기사에는 기고자의 이름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흑룡회는 <회보>, <흑룡>이외에도 <동아월보>, <內外時事月函> 등의 잡지를 출간했으며, 다른 저작물도 다수 출판하고 있다. 「最新滿洲圖」(1901. 4), <露西亞亡國論>(1901. 9 발매금지), <露西亞論>(1901. 11), 「露國東方經營部面全圖」(1902. 5), <한해통어지침>(1903. 1), 「滿韓新圖」(1904. 3), <軍國經濟論>(1904) 등이다. 주로 대륙침략을 선동하는 저작물이며, 군사적 전략지도이다.

이중 「最新滿洲圖」는 일본에서 가장 정확한 지도라고 자처했으며, 「露國東方經營部面全圖」(1902.5)는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것이다. 일본 정부에서 지도 제작을 의뢰할 정도로 흑룡회의 지리적 지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런 흑룡회가 동해에 ‘양코’라는 지도에 안 나오는 섬을 새로 발견했다고 그 기관지 <회보>(1901. 3)에 게재하고, 내용을 약간만 고쳐서 다시 「한국연해사정」(<흑룡>제1권 제2호, 1901. 6), <한해통어지침>(1903. 1)에 연이어 게재한 것이다.

양코 새로운 섬 발견설은 1901년 5월 동경지학협회의 <지학잡지>(地學雜誌) 제13집 제149권(1901. 5)에도 게재되었다. <지학잡지>를 발간한 동경지학협회는 현재도 존속하고 있고 <지학잡지>도 그대로 발간하고 있다. 그런데 <지학잡지>는 ‘양코’ 새로운 섬 발견 기사를 그대로 싣고 거기에다 지학전문지로서의 의견을 부가했다. ‘일본해중의 일 도서(양코)’라는 제목의 <지학잡지>(1901. 5) 게재 기사는 다음과 같다(23부에서 계속).

 

*** 흑룡회란?

흑룡회는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 구즈우 슈스케(葛生修亮) 등이 1901년 2월 설립한 단체로서, 흑룡회의 명칭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를 흐르는 흑룡강(아무르강)에서 비롯되었다. 만주의 흑룡강 일대까지 침탈하겠다는 기대와 욕구를 담은 명칭이다.(김채수(2007), 「1895~1914년 일본의 우익연구」 -단체ㆍ운동ㆍ사상을 중심으로- <동북아 문화연구>, Vol. 12, pp. 413-414.; 한상일(1980), <일본제국의 한연구 - 대륙낭인과 대륙팽창->, 까치, p. 68.)

흑룡회의 활동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한반도와 대륙침략의 첨병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흑룡회는 <회보>, <흑룡>을 발간하여 조선과 만주, 시베리아의 사정을 널리 일본에 알리는가 하면 對러시아 전쟁을 주장하고 선동했다. 강제병합 이전에는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통해 ‘한일합방’ 공작을 배후 조종했다. 흑룡회는 서구열강의 식민지배는 수탈과 착취를 위한 것이지만, 한일간의 ‘합방’은 한국과 일본이 차별이나 수탈이 없는 상호시혜적인 것이라고 선동했다.(강창일(2007), 「일진회의 합방운동과 흑룡회」, <한국민족문화> Vol.30, p. 220.)

글: 정태만(인하대학교 연구교수, 독도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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