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는 망국의 길, 백성만 죽어나는 길이다.

이소역대불가以小逆大不可만세,  사대주의 끝은 어디인가...

지금은 중국에서 미국으로 주인, 상전이 바뀌어 있다...

몸은 고려, 정신은 소중화 조선...

이 땅에 외국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 부터일까, 역사를 뒤져 보면 어김없이 이성계가 세운 소중화 조선에 가 닿는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반란하면서 낸 제 1성이 이소역대불가였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대드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작은 나라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큰 나라, 곧 중국 명나라를 지성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지난번 기사를 이어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었던 요동을 포기하고 회군반란으로 돌아선 이성계와 그 일당들의 실체를 고발한다.

“어떤 사람이 이성(泥城)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근자에 내가 요동에 갔었는데 요동 군사가 모두 오랑캐를 치러 가고 성중에는 다만 한 지휘(指揮)가 있을 뿐이니, 만일 대군이 이르면 싸우지 않고 항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최영)이 크게 기뻐하여 물건을 후하게 주었다(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명나라 군대가 한 개 지휘부만 남겨 놓고 모두 원나라 전투에 투입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기마병 중심으로 편성된 고려군이 요동으로 진군했으면 요동을 접수하고도 남았을 상황이다. 이어 여세를 몰아 원나라 군대와 전투 중인 명나라 군대 후미를 쳤다면 섬멸할 수 도 있었다. 그러면 신생 명나라는 고려와 북원의 공격을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고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고려가 주도했을 것이다. 당시 요동이 얼마나 통제가 안 되는 무정부 상태였는지 <고려사>는 이렇게 말한다.

“갑신甲申일에 니성원수泥城元帥 홍인규와 강계원수江界元帥 이의가 먼저 요동경遼東境에 들어가 살육과 약탈을 하고 돌아오니 우禑가 기뻐하여 금정아문기견을 하사하였다.”

요동지역으로 가서 마음대로 휘젓고 왔다는 기사다. 단순히 민간인이 아니다. 원수元帥라고 하는 것을 보면 고려군 부대장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군이 휘젓고 다녔다는 얘기다. 정벌군과 같이 대군의 주력부대가 아니라 소규모 부대로도 요동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모든 상황이 고려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데도 이성계는 직속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회군해 버렸다. 그렇다면 이성계가 회군 한 근본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을 것이다. 사료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성계의 정신이 문제였다. 4불가론의 첫 이유에서 알 수 있다. 이소역대불가以小逆大不可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이성계 발언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소중화 조선 <태조실록>에 차고 넘치도록 나온다. <고려사>를 보면 이렇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도리이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래로 대국 섬기기를 성실하고 부지런히 해왔습니다.”

이성계, 위화도 회군이 정당하다고?

이성계의 정신이 이것이었다. 큰 나라는 섬겨야 한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 감히 불경스럽게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인 명나라를 치러 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성계의 궤변에 따르면 고려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큰 나라인 명나라를 이길 수 없음으로 대들면 안 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섬겨야 한다. 그러나 이성계의 이러한 작태는 고려의 기상을 보면 바로 깨진다. 고려가 큰 나라라서 북방의 대제국 거란 요나라와 전쟁했나. 또한 고려가 큰 나라라서 대등하게 서희장군이 거란을 상대로 담판하여 싸우지 않고 강동6주를 얻어냈나. 고려가 작은 나라였는지는 따져봐야겠지만 이성계 말대로 고려는 작은 나라였는데도 북방 대제국, 거란 요나라를 이기고 땅까지 뺏어왔다. 이성계의 발언은 사대주의에 깊이 찌든 자의 추잡스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소중화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얼마나 사대주의에 찌들어 있는지 소중화 조선 <태조실록>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최영崔瑩장군(서기1316~1388))영정. 최영은 명나라 정벌군 총사령관인 8도도통사였다. 정벌군을 직접 지휘하고자 했으나 우왕이 따라간다고 해서 결국 우왕과 함께 후방에 남았다. 이것이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돌리는 단초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성계가 정벌군을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위화도 회군 반란을 손 쉽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중화 조선정권이 쓴 <고려사>에는 함께 반란을 주도한 조민수까지 간신열전에 집어넣어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최영 만큼은 간신열전에 넣지 않고 있다. 그 만큼 불의한 이성계정권 조차도 최영의 흠을 잡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최영의 억울한 죽음을 무당들이 단군 다음가는 최고무신으로 모셔놓고 굿으로 기리고 있다. 그리고 돼지고기에 '성계육' 이라고 이름 붙여 씹음으로써 최영의 원혼을 달래준다. 개성의 덕물산은 전국 무당들의 성지였는데 여기에 최고신으로 최영장군이 모셔져 있었다.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우인열(禹仁烈)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 남경에 가서 은혜를 사례하고 말 30필을 바치게 하였다. 그 표문은 이러하였다.

“배신(陪臣) 조임(趙琳)이 중국 남경에서 돌아오매, 삼가 예부의 자문(咨文)을 받아 황제의 칙지(勅旨)를 삼가 받들었는데 훈계가 매우 간절했으며, 이내 신(이성계)에게 권지국사(權知國事)를 허락하시니, 신은 온 나라 신민들과 함께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황제의 도(道)가 널리 미쳐서 만물을 덮어 길러 빠짐이 없었으며, 천자의 큰 계획이 선포(宣布)되매 훈계가 이에 나타났으니, 마음에 맹세하여 느낌을 알며 뼈에 새겨서 잊기 어렵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소방(少邦)에서는 공민왕이 이미 죽은 뒤로부터 변고가 여러 번 일어나게 되었는데도, 신은 매양 사대(事大)에 전심(專心)하여 다만 절개를 지키기를 더욱 굳게 하였습니다.」

회군반란을 일으키고 나서 잘했다고 칭찬받으러 명나라로 부리나케 달려가서 받아온 주원장의 글을 보고 황송해서 아주 죽어 자지러지고 있다. 왕도 아니고 겨우 ‘권지국사權知國事’라는 감투를 받은 것만 해도 어디냐며 감격에 겨워 죽는다. ‘돼지발정제’로 별이 된 홍준표가 지난 대통령 보궐 선거 때 미국 트럼프에게 지지 해달라고 호소한 것과 어쩌면 이렇게 같단 말인가. 홍준표에게 이성계가 환생하여 빙의 되었나. 주원장의 훈계를 아주 뼈에 새기겠다고 조아리고 있다. 지금 미국을 하늘로 숭배하면서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잡아먹을 듯이 달려드는 친일수구세력과 다르지 않다.

조선총독부 부역지紙들이 미국 대통령, 다혈질 트럼프가 한 말을 ‘격노’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삐딱하게 나오니까, 트럼프가 ‘격노’했다는 것이다. 이는 주인이 종에게 시키는데로 따르지 않으니 꾸짖었다는 것이다. 주인이 종에게나 쓰는 말을 문재인 정부에게 쓰고 있다. 이에 종은 어떻게 해야 될까, 살려달라고 조아리는 수밖에 없다. 상황은 약간 다르지만 이성계가 주원장을 대하는 태도와 똑 같다. 주인을 앞에 두고 설설 긴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종들이 같은 ‘종들’인 문재인 정부와 문정인 특보가 트럼프 ‘말씀’에 토를 달자 죽이려고 달려든 것이다. 오히려 이성계가 더 심한 증상을 보이고 있다.

▲이성계와 정도전. 이성계는 무력을, 정도전은 이론을 제공해서 고려를 뒤엎고 중화사대주의에 입각한 소중화 조선을 열었다. 그러나 그들의 나라는 역사를 거꾸로 돌렸고 종국에 가서는 왜구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만다. 자주를 버리고 사대를 택한 필연이 아닐까.

계속해서 이성계의 감격을 보자.

「이에 시세(時勢)의 위의(危疑)함으로 인하여 세상 인정(人情)의 추대에 힘써 따르게 되니, 깊이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어서 깊은 못도 얇은 얼음을 밟는 것과 같습니다. 조그마한 정성을 주달(奏達)하여 감히 황제의 궁궐에 전달되기를 바랐을 뿐이 온대, 어찌 천한 사신[賤介]이 이르게 되매 특별히 덕음(德音)을 내리실 줄을 생각했겠습니까?

이미 천리(天理)에 순응할 일을 지시하시고, 또 흔단(釁端)을 발생하지 말라고 경계하시며 서로 왕래하여 나라를 복되게 하여 먼 장래를 위한 계획을 장구한 세대에 도모하게 하시니, 비록 부모가 아이를 가르친 것이라도 그 대단한 친절에 비유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과 땅도 감동하였으므로 다만 눈물만 날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대개 삼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큰 도량의 너그러움을 넓히시고 지극히 인자(仁慈)하신 덕을 미루어, 만물(萬物)이 모두 혜택에 젖었는데 조그마한 몸도 또한 성덕(盛德)을 입게 되었습니다. 신은 삼가 마땅히 게을리 함이 없고 일을 폐기(廢棄)함이 없이 봉강(封疆)의 지킴을 조심하고, 장수(長壽)하고 부유(富裕)하시라는 말로써 송축(頌祝)하는 정성을 배나 다하겠습니다(태조 1년 임신(1392,홍무25) 12월 17일 계해).”」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살인귀가 되어 피도 눈물도 없이 뭇 생명들을 도륙한 거친 이성계다. 그런데 명나라 주원장 글을 받아 보고는 순한 양이 되어 시인詩人이 되어버린다. ‘깊은 곳도 얇은 얼음을 밟는 것과 같단’다. 문장이 영국이 자랑하는 셰익스피어가 와서 울고 갈 정도로 유려하고 찬란하다. 주원장의 은혜가 죽도록 사무쳐 어린애가 되어 눈물을 펑펑 쏟고 있다.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대주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성계는 이와 같이 철저한 사대주의 그것도 중화사대주의에 입각하여 고려군을 선동하여 반란군으로 바꾸어 고려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공자유교 사대주의자들인 정도전, 조준, 권근 등과 함께 소중화 조선을 연다. 소중화 조선 개국세력이 공자유교 중화사대주의에 빠져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을 벌였는지, 조선개국의 1등공신이자 혁명가이며, 재상정치의 모범이라고 마르고 닳도록 칭송받는 삼봉 정도전鄭道傳의 발언을 들어보자.

삼봉 정도전 다시보기...

「해동(海東=조선반도)은 그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朝鮮)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이 있었으니, 단군(檀君)ㆍ기자(箕子)ㆍ위만(衛滿)이 바로 그들이다. 박씨(朴氏)ㆍ석씨(昔氏)ㆍ김씨(金氏)가 서로 이어 신라(新羅)라고 일컬었으며, 온조(溫祚)는 앞서 백제(百濟)라고 일컫고, 견훤(甄萱)은 뒤에 후백제(後百濟)라고 일컬었다. 또 고주몽(高朱蒙)은 고구려(高句麗)라고 일컫고, 궁예(弓裔)는 후고구려(後高句麗)라고 일컬었으며, 왕씨(王氏)는 궁예를 대신하여 고려(高麗)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이들은 모두 한 지역을 (중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을 받지 않고서 스스로 명호를 세우고 서로를 침탈하였으니 비록 호칭한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무슨 취할 게 있겠는가? 단 기자만은 주무왕(周武王= 중국의 원조라고 통용됨)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朝鮮侯)에 봉해졌다.

지금 천자天子 (명나라 태조 明太祖)가, “오직 조선(기자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다.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체 받아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

라고 명하였는데, 아마 주무왕이 기자에게 명하던 것으로 전하(이성개)에게 명한 것이리니, 이름이 이미 바르고 말이 이미 순조롭게 된 것이다.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洪範)을 설명하고 홍범의 뜻을 부연하여 8조(條)의 교(敎)를 지어서 국 중에 실시하니, 정치와 교화가 성하게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이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善政)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 명나라 천자의 덕도 주무왕에게 부끄러울 게 없거니와,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 학과 8조의 교가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삼봉집 제13권 조선경국전상朝鮮經國典 上)」

정도전, 정말 요동정벌을 꿈꿨나...

소중화 조선에 미련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흔히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계획했었다고 한다. 이성계와 공모해서 고려를 무너뜨리고 소중화 조선을 연 후에 이 같은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사, 고려사절요, 이성계 태조실록 등 어떤 사료를 뒤져 봐도 명시적인 기록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보이지 않는다.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실체가 없듯이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하려고 한 명시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발언 중에서 명나라에 반발하는 듯 한 것을 가지고 요동정벌을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추정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또 다른 역사왜곡이 아닌가 한다.

설사 요동정벌을 구체적으로 실행해 옮기려는 듯한 기사가 보인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정도전 자신이 남긴 기록이 아닌, 이조실록에 나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도전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그가 직접 남긴 문헌을 봐야 한다. 삼봉 정도전은 삼봉집에서 미개한 나라가 중국인 기자가 와서 비로소 질서가 잡히고 문명개화 되었고, 명나라 왕의 은혜가 하늘에 사무치도록 그립다는 식으로 지껄이고 있다. 또한 나라 이름도 일정하지 않았다면서 중국이 명령도 하지 않았는데 지들끼리 나뉘어 치고받고 싸웠기 때문에 나라이름이 설사 있다고 해도 쓸 것이 못된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면서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성계와 공모하여 세운 소중화 조선만이 이름이 정당하고 좋다고 한다. 명나라 주원장이 지시해서 지어준 것인데 중국인 기자의 조선을 이어 받은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런 골수중화사대주의자가 어떻게 주인이자 상전인 명나라를 치려고 계획했다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이른바 정도전의 요동정벌이 당시 임금인 이성계와 뜻이 맞아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수없이 드러나듯이 이성계는 철저한 명나라 숭배, 중화사대주의자다. 뜻이 맞을 리가 없다. 따라서 요동정벌론은 허구였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성계의 모습,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그렇다면 이성계는 언제부터 중화사대주의 신봉자가 되었을까. 아마도 고려불교타락이 원인이 었을 것이다. 정도전이 <불씨잡변>이라는 책에서 불교의 ‘공허한’ 이론을 실랄하게 비판했듯이 5백년 가까이 불교가 고려 국교로 자리 잡아 온갖 권력을 누리다 보니까, 견제 받지 않아 타락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공자유교에 심취한 세력이 조정에 득세 하여 권력을 장악해 간다. 안향이니 이색이니 정몽주니 하는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나중에는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불교처럼 파를 나누어 성리학이니 주자학이니 양명학이니 하며 지들끼리 나뉘어 서로 정통이라며 치고받고 싸운다. 이성계는 평생 전쟁터를 누빈 무장武將이다. 사료에는 이성계를 공자유교 전문유학자들처럼 노골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를 전제로 한 중화사대주자의 모습이 절대적으로 많이 나온다.

그는 유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순수한 무장이었을 수도 있다. 후대에 역사를 쓴 자들이 이성계를 중화사대주의 유교신자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유학사상에 심취된 자들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고려를 뒤엎고 소중화 조선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학사상가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을 것이다. 소중화 조선을 떠받치는 이론이 유학이었으니 당연히 통치이념으로 유학을 알아야 했을 것이다. 더구나 권지국사라는 벼슬까지 내려주고 고려의 지배권을 인정해 준 명나라가 공자유교 나라인데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유학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유학으로 자신의 중화사대주의 이념을 정당화 시켰을 것이다(3부에서 계속).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