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문제, 이제는 통일된 목소리를 내는 범 국가기관 구성 필요하다.

 

독도야 미안해 19

 

소중화 조선의 해금海禁정책이 빚은 비극...

서기19세기 서구열강들이 독도를 지나다가 자신의 배이름을 따서

프랑스는, ‘리앙쿠르트’,

러시아는, ‘프리킷트’,

영국은, ‘호르넷트’ 라고 이름 짓다...

 

내무성에서 발간한 지도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주는 자료가 있다. 1905년 8월 <지학잡지>제200호에 게재된 다나카 아카마로(田中阿歌麻呂)의 「오키국 다케시마에 관한 옛 기록」이 그것이다. 이에 의하면, 메이지 초기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정원(太政官正院) 소속 지지과를 중심으로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일본영역참고도"에도 독도는 한국 땅으로 나온다.

 

메이지 초기에 정원지지과(正院地誌課)에서 (독도가) 일본영토인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아, 그 후 출판한 지도는 대부분 그 소재를 나타내지 않은 것 같다. 메이지 8년(1875년) 문부성 출판 미야모토 미히라(宮本三平)씨의 일본 제국전도에는 그것을 게재했으나, 제국(帝国)의 영토 외에 두어 도색(塗色)하지 않고, 또 아(我) 해군수로부의 조선 수로잡지에는, 리안코르트바위라고 제목을 붙여, 리안코르트호(號)의 발견 기타 외국인의 측량 기사(紀事)를 게재 할 뿐이어서…

 

<지학잡지>제200호(1905. 8)는 일본 정부가 독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 더욱이 일본이 독도를 편입한 이후에 발간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메이지 정부 초기 ‘태정관정원 지지과’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 발간한 지도에도 독도를 표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에도시대 1696년의 ‘죽도도해금지령’ 이후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인식은 메이지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메이지 초기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 정원 소속 지지과에서 독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했고, 이는 내무성, 해군성 등 정부 각 기관에 영향을 미쳤다. 태정관 정원의 지지과는 그 후 내무성 지리국으로 소속이 바뀌었는데, 1877년에는 내무성 지리국 주관으로 <태정관지령>에 의해 독도를 조선령으로 공식 확인하고 공시했다.

 

일본 해군성도 독도는 한국땅으로 인식...

내무성 뿐만 아니라 해군성에서도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은 섬나라로 사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있고, 해군성은 일본의 해양 방위뿐만 아니라, 해양에 있는 영토를 관리하는 중요한 기관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해군성에서 해양에 있는 독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해군성에서는 해양에 있는 영토와 관련하여 수로지를 발간하고 있었다. 1883년에 발간한 <환영수로지>제2권, 그리고 1886년 12월 이를 개정한 <환영수로지>제2권제2판을 발간하였다. 여기에 울릉도와 독도에 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환영수로지>제2권제2판(1886. 12)에 수록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리양코르트」 열암

이 열암(列岩)은 1849년 프랑스 선박 「리양코르트」(Liancourt)호가 처음으로 이를 발견하여, 선명을 취하여 「리양코르트」열암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후 1854년 러시아 「프리게이트」형 함선 「팔라스」호는 이 열암을 「메나라이」 및 「오리부차」 열암이라 칭하고, 1855년 영국 함선 「호르넷트」호는 이 열암을 탐검하여 「호르넷트」열도라고 이름 붙였다. 그 함장 「호루시스」의 말에 의하면 이 열암은 북위 37도 14분, 동경 131도 55분에 위치하는 불모(濯濯無産)의 2암서(岩嶼)로서 새똥(鳥糞)이 항상 섬 위에 쌓여 있어, 섬의 색이 이 때문에 희다. 북서서(北西微西)로부터 남동동(南東微東)에 이르는 길이 약 1리이고, 두 섬 간의 거리는 1/4리로서 보이는 곳에 암초맥(一礁脈)이 있어 이를 연결한다. 서도(西嶼)는 해면으로부터 높이가 약 410척(尺)으로서 형상은 당탑(糖塔)과 비슷하다. 동도(東嶼)는 비교적 낮고 평평한 정상으로 되어 있다. 이 열암 부근의 수심은 상당히 깊을지라도 그 위치는 하코다테(函館)을 향하여 일본해를 항행하는 선박의 직수도(直水道)에 해당하므로 상당히 위험하다.

울릉도(鬱陵島) 일명 松島, 서양명칭 다게렛트」, 해군해도...호를 참고할 것

이 섬은 오키(隠岐)에서 북서 3/4, 약 140里, 조선 강원도 해안에서 약 80里의 바다 가운데 고립해 있다. 섬전체가 높고 험한 원추형 구릉의 집합으로서 수목 울창하고...

 

▲ 일본은 해방 후에도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 대한민국 땅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일본 해군성<환영수로지>,

위도, 경도까지 표시하며 독도는 한국땅...

2개 수로지 모두 독도에 대한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1886년의 개정판에서는 독도와 울릉도의 소속을 보다 분명히 하여, ‘제4편 조선동안(朝鮮東岸)’에 독도와 울릉도를 기록하고 있다. 독도를 보다 분명하게 조선영토로 인식한 것이다.

울릉도의 명칭은 ‘울릉도(일명松島)’로 기록하고 있어 명칭의 혼동이 이미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독도에 대해서는 1849년 프랑스선박 리앙쿠르의 발견과, 독도에 대한 리앙쿠르암 명명(命名)부터 그 후 러시아 함선이 붙인 이름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에도시대부터의 일본 명칭인 ‘松島’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어느 수로지이든 일본인 또는 한국인들이 독도를 어떻게 부르는지에 대해서도 언급은 없다. 그 반면에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리양코르트열암의 경도, 위도까지 ‘북위 37도 14분, 동경 131도 55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환영수로지>에서는 독도의 형태에 대해, 동도와 서도 두 섬의 높이와 주변의 암초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자세하다. 독도의 높이는 서도가 168.5m, 동도가 98.6m인데 <환영수로지>에서는 “동도는 비교적 낮고 평평하다”(東嶼ハ較ク低クシテ平頂ナリ)고 기술하고 있다. 현재 독도의 등대와 선착장은 모두 평평한 동도에 위치하고 있다. 불모의 섬(濯濯無産ノ二岩嶼ニシテ)이라는 것은 <태정관지령>과도 일치한다. <태정관지령>에서도 松島, 즉 독도에 수목은 거의 없는 것(樹竹稀ナリ)으로 기록되어 있다.

<환영수로지>에는 독도의 영유권 귀속에 관한 직접적인 기술은 없다. 그러나 일본 서해안이 아닌 조선동안(朝鮮東岸)편에 기록했다는 것은 독도와 울릉도의 영유권이 조선에 있다고 인식한 것이다. 이는 역사적인 근거를 찾아보지 않고, 지리적인 위치만으로 판단하더라도 독도는 당연히 조선영토인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1891년 일본 해군 수로부에서는 해군해도(海軍海圖) 제95호로 「일본 혼슈․큐슈․시코쿠 부조선」(日本 本州九州及四國 附朝鮮)지도를 발간했다. 발간날짜는 메이지24년(1891) 11월 20일, 발간자는 수로부장 해군대좌 기모쓰키 가네유키(肝付兼行)라고 지도 왼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 독도는 ‘리앙코르트암’(リアンコールト岩)으로, 동경 132도선 바로 왼편, 북위 37도선 바로 위에, 동서 2개의 섬으로 그려져 있다. 그 위치는 현재의 지도와 정확히 일치할 정도로 아주 정밀하다. 경선은 1도 간격으로, 위선은 2도 간격으로 그려져 있어, 북위 36도선과 38도선의 한가운데를 그려 보면, 독도는 이 지도상 북위 37도선 바로 위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울릉도는 ‘鬱陵島(松島)’로 표기되어 있다. 울릉도의 위치도 아주 정확함은 물론이다.

<일본 혼슈․큐슈․시코쿠 부조선>지도는, 독도를 ‘<리양코르트> 열암’이란 이름으로 ‘조선동안’편에 기록한 <환영수로지>와 연계시키면, 이 지도는 보다 더 시각적으로 ‘독도는 조선영토’라는 인식을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 후에 발간된 <조선수로지>(1894. 11)는 이 지도를 참고하도록 명시하고 있다(제20부에서 계속).

글: 정태만(인하대교수, 독도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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